8화- 애증의 공생 관계.
유달은 잠시 고심하는 듯했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그는 이내 소파에 앉아 있는 송보름의 뒷모습을 턱짓했다.
-저기 계신 분이 따님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입니다. 반드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도와주십시오.
-예······ 그런데 카메라는 왜?
-제 딸의 주치의가 모든 것을 기록해 놓으라 해서요. 치료 목적 외에 쓰일 일은 없을 겁니다. 카메라 앞에서는 퇴마의식을 하기 곤란하신가요?
-아니요. 제가 급히 오느라 외모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요.
유달은 떡 진 머리를 잠시 매만지고 물었다.
-따님의 이름이?
-‘보름’입니다. 송보름.
-제 이름은 ‘달’입니다. 유달. 외자 한글 이름이지요. 그러고 보니 둘이 합치면 ‘보름달’이네요.
-네······ 그렇군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송보름은 뒤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기괴함이 느껴지는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유달이 진중한 얼굴로 그녀의 부모에게 말했다.
-여기 계셔도 되고, 잠시 다른 방에 들어가 있으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제가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중간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송보름의 부모는 응접실에 남아 있는 걸 선택했다.
그들은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시선으로 딸에게 향하는 유달을 바라보았다.
유달은 송보름이 앉아 있는 소파 왼편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관심을 주지 않는 그녀.
유달이 꼰대처럼 말했다.
-어허, 어른이 왔으면 쳐다는 봐야지?
이에 송보름이 천천히 고개 돌렸고, 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
송보름이 깜짝 놀라며 몸을 사렸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유달의 얼굴엔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좋아서 짓는 웃음이 아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모가 소갈비 사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누굴 원망하겠어. 속아 넘어간 내가 멍청한 놈이지. 안 그래?
유달이 바싹 다가가자 송보름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약한 소녀에게 유달이 몹쓸 짓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상황이다.
-나는 언제나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야. 그런데 너는 대화가 통할 것 같지가 않네?
유달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러고는 흠칫하는 그녀에게 매우 불량스럽게 말했다.
-그냥 나갈래? 푸닥거리 한판 할까?
곧바로 송보름이 사납게 인상 쓰며 소리쳤다.
-꺼져버려!
-반사.
유달은 가뿐히 무시했다.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한텐 그런 거 안 통해. 내 몸에 깃든 신이 너보다 레벨이 높다고.
송보름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네놈의 몸뚱이를 차지한 존재는 너만을 보호하지. 내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아.
-병신······ 나는 일방적인 접신(接神)이 아니야. 애증의 공생 관계라고 할까. 진짜 싫지만, 서로 필요하기에 붙어있는 사이지. 그리고 서로의 약점 또한 매우 잘 알고 있지.
유달이 송보름의 부모에게 말했다.
-여기 혹시 명품 있습니까? 사넬, 생로랑, 루이비통, 에르메스 기타 등등, 젊은 여자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요.
-자, 잠시만이요.
송보름의 어머니가 급히 방을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값비싼 명품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와서 거실 바다에 내려놓았다.
-어, 어느 게 괜찮을지······.
유달이 히말라야 색상의 핸드백을 가리키며 물었다.
-에르메스인가요?
-네, 작년에 선물 받은 건데, 한정판이라 국내에서 몇 개 없다고 들었어요.
-수고비로 저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보름이만 고쳐주시며 뭐가 아깝겠어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덜덜덜덜덜.
지진이 난 듯 카메라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고,
지지지지직,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는 듯한 기계적 소음이 발생하는가 싶더니,
팟!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 30초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팟.
다시 화면이 켜졌을 때,
송보름이 응접실 바닥에 누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고, 괴이한 비명을 발하며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유달은 징그러운 것을 못 보겠는지 이내 외면했다.
-목, 목, 목은 돌리지 마!
그녀는 한참이나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 쳤고, 유달은 딸이 걱정되어 난리 치는 부모를 안심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최후의 발악을 하듯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며 기나긴 비명이 이어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털썩.
그녀는 이내 정신을 잃었고,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땀범벅인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휙.
송보름이 함께 보던 스마트폰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어때요?”
장미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고생이 많았네.”
“그것뿐? 제가 무섭게 보이지 않아요?”
“글쎄, 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계속 봐왔던 사람이라······ 우리 커피 한 잔 할까?”
“왜요?”
“나는 사장님 보고 갈 건데, 혼자 기다리기 심심해서.”
“뭐, 그러시던가요.”
“주방 좀 써도 될까? 나는 믹스보다 내려 먹는 커피를 좋아해서.”
“맘대로 하세요.”
장미란이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 전문점에서 쓰는 고가의 커피머신도 있는데, 이를 사용하지 않는 건 귀찮아서인 게 뻔했다.
장미란은 작은 커피포트를 씻어 물을 끓이고, 찬장을 뒤져 커피 재료를 찾았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송보름이 대뜸 물었다.
“혹시 사장님에게 딴마음 품고 있어요?”
“어떤 딴마음?”
“당연히 이성으로서 끌리는 마음은 아니죠. 무속계의 금수저인 사장님의 재주가 탐나는 거죠. 잘만 이용하면 미궁에 빠진 범죄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장미란은 커피 만드는 손길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제법이네?”
“사주카페 알바 3년이에요. 형사님 마음은 이해하는데, 포기하세요.”
“왜, 천기누설 때문에?”
“아니요. 사장님은 천기 따위는 전혀 신경 안 써요. 그냥 경찰하고 얽히는 거 자체를 싫어해요. 정의감 같은 거랑도 거리가 멀고······ 와, 커피 냄새 너무 좋은데요?”
장미란이 만드는 커피가 거의 완성될 때였다.
딸랑딸랑.
유달이 씩씩거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방에 있는 장미란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말했다.
“형사님, 우리 그놈 잡읍시다. 경찰 죽인 살인자 놈을 감방에 처넣자고요. 내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
송보름의 장담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
그윽한 커피 향이 퍼지는 굿 카페.
유달은 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장미란과 함께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송보름은 장미란이 만든 커피를 머그잔에 따라왔다.
이를 한 모금 마신 유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 이리 맛있어?”
“내가 만든 거 아니에요.”
송보름은 장미란을 고갯짓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어쩐지······.”
실망하여 머그잔을 내려놓는 그에게 장미란이 물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죠? 경찰하고 얽히는 거 싫어하고, 정의감과도 거리가 멀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지금도 변함없고요. 그 기자 놈이 선을 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인자 주제에 나보고 사기꾼이라고······ 허, 정말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요.”
“저도 좀 어이가 없네요. 누굴 건드렸는지 알려주겠다며 기세 좋게 나갔잖아요. 고소만 취하해주면 김 기자가 살인범인 건 상관도 없었고요. 그런데 고작 사기꾼 소리를 듣고 마음이 바뀐 건가요?”
“이게 상당히 복잡합니다. 제 몸주신과 저는 애증의 공생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암묵적인 합의 같은 게 있어서, 제 마음대로 인간사에 관여할 수 없어요. 그놈이 아무리 천하의 때려죽일 놈이라고 해도요.”
횡설수설 같은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 반대로, 정말 하기 싫어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이비나 사기꾼이란 말이 저에게는 그냥 욕일 뿐이지만, 몸주신에게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말이거든요. 제가 한 말이 이해는 되십니까?”
“어느 정도는?”
“다행이군요.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제가 형사님을 돕겠다는 겁니다. 제 능력과 형사님의 배지가 합쳐지면 그놈의 알리바이를 깰 수 있습니다.”
장미란이 완곡하게 말했다.
“나는 확실하게 이재형 경장을 죽인 범인을 잡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 기자 놈을 확실하게 같이 잡자고요.”
“제가 계속 말하잖아요. 김 기자는 이재형 경장을 죽일만한 동기가 없어요. 그냥 안면이 있는 사이일 뿐, 어떠한 원한 관계도 없다고요.”
“동기가 왜 중요합니까? 그놈이 죽인 게 확실한데. 아무 이유 없이 사람 죽이는 미친놈들 많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김형식은 아니에요. 개인적인 쾌락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의 성향은 없어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의 경향은 있지만,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성격도 아니고요. 성공의 이득과 실패 시의 손해를 철저히 계산하고 움직이는데, 아무 원한도 없는 경찰을 죽여서 얻는 이득이 뭘까요?”
“김 기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겁니까?”
“아니요. 김형식이 이재형 경장을 죽였다는 가정하에 생각해 봐요. 죽일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 그런 짓을 벌였을까요?”
“그, 글쎄요. 사이코패스 미친놈이 아니라면 대체 왜······!”
유달이 뭔가 번뜩 떠오른 반응이다.
“설마, 그 기자 놈을 사주한 놈이 있다는 겁니까? 뭔가 약점을 잡고서 경찰을 죽이라고 말이지요.”
“네, 저는 교사범이 있을 거라 확신해요.”
“그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경찰과 원한 관계가 있겠군요?”
“물론이죠.”
“형사님은 그놈이 누군지 아시는 거 같은데요?”
“기본적인 수사 방향은 연예인의 집에 침입하려던 단순 강도의 우발적 범행이었어요. 언론에도 그리 보도되었고. 하지만 현직 경찰이 살해된 특수한 케이스에요. 원한 관계를 포함한 다방면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유력한 용의자가 누굽니까?”
“수사 기밀을 민간인에게 말해줄 순 없어요. 경찰이 신중히 수사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신중하다는 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겠죠? 저는 고소 건 때문에 경찰서와 법정을 계속 들락거려야 하고요.”
“그렇죠.”
“환장하시겠네······.”
잠시 고심하던 기색을 보이던 유달이 말했다.
“형사님, 이렇게 합니다. 일단은 그 교사범이 누군지 저한테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몰래 접근하여 정보를 캐겠습니다. 저는 수사 기관과 연관 없으니 의심받지 않겠지요? 그놈이 기자 놈과 결탁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 형사님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장미란이 어이없는 웃음만 짓자 유달의 목청이 높아졌다.
“왜요? 경찰을 죽인 범인을 잡는 것보다, 수사 기밀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그건 둘째 문제고요. 제가 가장 염려 하는 건 유달 씨의 안전이에요. 그놈은 김형식보다 더 폭력적이고 지능적인 소시오패스에요. 함부로 접근하는 건 너무 위험해요.”
“대체 그놈이 뭐 하는 놈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