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어, 어떻게 여기에?”
베오날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한 놀람과 섬뜩함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를 제어하려고 했지만, 결국 지금 사태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기에 떨리고 만다.
그런 그를 향해 마왕은 얼굴 부분은 없지만 마치 훑어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 목소리를 내었다.
[인간들은 분노에 눈이 멀면 이성을 잃고 판단력이 흐려진다고 하지. 하지만 진정 극대화된 분노는 고요하면서도 모든 역량을 다하기 위해 불태우지. 나는 늘 그 상태이고 말이야.]
“항상 무식하게 굴었으면서…….”
[무식? 나는 항상 현명했다. 그저 불필요한 일에 헛수고를 하지 않으려 할 뿐. 그리고 지금 그 무식쟁이보다 못한 놈 하나는 발견한 것 같은데?]
분노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는 ‘분노의 마왕’. 베오날드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베오날드였다.
하나 그게 생각하기 어려운 게, ‘유성우 낙하’ 같은 대주문을 사용한 상황에서 마왕은 확실히 서쪽으로 향한다고 했었고, 실제로 오면서 끝없이 많은 마족과 몬스터들이 서쪽으로 향하는 걸 보기도 해서 이렇게 잠복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를 어쩐다? 아직 마갑주도 입지 못했는데, 이 상황에선…….’
[싸울 준비를 해 봐라. 기꺼이 기다려 주지.]
“…거참 자비로우시군.”
[무슨 짓을 하든 모든 결과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저… 오만함, 왠지 벨릭스 그 자식을 떠오르게 하는군.’
사람을 얕보는 저 시선과 오만함.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머리가 아파 오는 베오날드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 맨몸으로 이길 방안이 없으니 베오날드는 즉시 마갑주를 꺼내어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용사 노릇을 할 때 입은 것을 기반으로 만든 대(對) 마왕전을 감안해서 아르젠과 최선을 다해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들을 사용해서 만든 걸작품이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어디 덧없는 발악을 해 봐라.]
철컥!
베오날드는 마갑주를 착용하자마자 즉시 성검을 뽑아 들고서 마왕을 노려보며 대치한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 하나 마왕은 기괴한 촉수만 날름거릴 뿐 고요한 호수처럼 조용했다.
먼저 움직이라는 뜻이리라. 베오날드는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검을 움직이는 척하면서 허리춤에 꽂혀 있는 ‘볼트 슈터’를 갑자기 뽑아서 쏘기 시작했다.
‘대(對) 마왕전을 감안하고 만든 특제 미스릴 탄환이다. 일단 처먹어라!’
[흐음…….]
타앙!
쏘아 낸 미스릴 탄환은 이번 마왕과의 싸움을 위해서 비용 감안이라는 것을 아예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만든 특별 주문품으로, 오우거의 두개골도 그냥 분쇄해 버리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마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다가 촉수를 움직이더니 베오날드가 쏘아 낸 탄환을 모두 잡아 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다 잡아 냈다고?’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었군. 하지만 날 공격하기엔 속도가 많이 부족하군.]
‘괴물……!’
팅티리링…….
베오날드가 쏘아 낸 다량의 미스릴 탄환들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헐렁해 보이는 촉수인 줄 알았는데, 그냥 그것들을 잡아 내니 베오날드는 싸늘함을 배로 느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왕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자기 자신이 먹혀 버리면 그 순간 싸움은 끝이었기 때문이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뱀이군.]
쉬익! 텅!
횡 베기인 척하면서 찌르기인 살무사를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마왕은 전혀 현혹되지 않고 찔러 들어오는 궤도에 맞춰서 베오날드의 검을 쳐 냈다.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지만 마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 쳐 내고, 받아치고 쳐 내고를 반복하면서 그 자리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강하다. 역시 마왕이라고 해야 하나? 압도적으로 강해. 분명 봉인에서 억지로 나와서 약해진 상태일 텐데…….’
[내가 약해졌다고 해서 네놈이 강해지는 건 아니다만?]
‘생각을 읽나?’
[무기에 잡념이 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까?]
완벽하게 자신을 분석하고 있는 마왕을 보며 베오날드는 다급히 물러난다.
더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익히 체험한 그였다.
이 마왕은 그야말로 무(武)의 화신. 폭력이라는 단어를 살아 숨 쉬게 만든 형태의 근원, 말 그대로 최강이었다.
‘예전 라라나 그 라미엘이라는 여자에게서 느낀 위압감과는 차원이 달라. 이건… 마치 산이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일개 인간의 몸으로는 백 년, 천 년을 수련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광대한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 설사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곤 해도 이 마왕의 무(武)에는 그저 바다에 돌멩이 하나 던진 수준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든 그였다.
그래, 필멸자가 상대할 레벨을 아득히 넘어선 최강의 존재. 하긴 이래야 용사가 도전했고 그 용사가 봉인하는 게 최선이라는 걸 느낄 만했다.
‘…싸워서 이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군.’
[음, 혹시 절망했나? 그럴 법도 하지.]
“절망이 오긴 했는데, 아쉽지만 이미 단련돼서 말이지!”
절망은 이미 벨릭스 폰 노이멀의 아래에서 선별되기 위한 가축처럼 길러지던 시절에 철저히 겪었다.
그 가혹한 선별 아래에서 얼마나 스스로 죽고 싶다고 절망했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나약하던 그때에 비하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곤 베오날드는 볼트 슈터를 쏘면서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럼 잘 있으라고!”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빨라?’
[용아(龍牙).]
발을 박차고 빠르게 도망치는 베오날드. 하나 마왕이 짧게 한마디를 하더니 베오날드에게 주먹을 휘두르자, 거대한 오러의 형상이 용의 이빨처럼 나타나더니 그대로 베오날드를 꿰뚫을 기세로 날아왔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였기에 베오날드는 다급히 성검을 들어서 그것을 막아 낸다.
‘윽! 이, 이건? 으윽! 으아아아악!’
투콰앙! 촤아아악! 쿵!
마치 거센 파도에 휩쓸려 밀리듯 베오날드는 전신에 느껴지는 압력과 함께 도망치는 속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날아서 땅을 굴렀다.
이전에 유성우가 떨어진 폐허를 수백 미터 구른 베오날드는 온몸이 쑤시는 느낌을 받으며 겨우겨우 일어난다.
방금 일격은 확실히 마갑주가 아니었으면 전신이 짓이겨졌을 공격.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베오날드는 정신을 다잡고 일단 몸부터 움직인다.
‘빨리 놈이 오기 전에…….’
[도망치려는 건가?]
‘이런 괴물 같으니!’
콰아앙! 쿠르르르르르!
방금 전까지 베오날드가 엎어져 있던 곳으로 마왕이 떨어져 내려왔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부서졌을 공격. 어찌나 막강한 위력인지 대지가 흔들리면서 땅 일부가 꺼질 정도였기에 정통으로 맞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좋군.’
[이건 뭐지?]
그리고 마왕의 일격으로 대지가 흔들리고 뒤틀리면서 땅 아래가 일부 무너지더니, 그 안에 있는 지하 건축물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두말할 거 없는 베오날드의 유산, ‘베노피스’에 만들어 둔 그의 둥지였다.
최초의 것이고, 대륙에서 오는 모든 비보와 유산들을 일단 모아서 분류하던 곳이었기에 다른 이름이 없는 것으로 굳이 붙인다면 ‘베노피스의 둥지’라고 칭할 만한 곳이었다.
‘이때다!’
그리고 마왕이 대지 아래에서 나온 이 건축물에 아주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베오날드는 잽싸게 몸을 놀려서 땅 아래의 유적, 건축물 내부로 들어가서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들어간 그 태도에 마왕은 그제야 베오날드가 강가에서 무엇을 찾아 나선 건지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군.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소환문을 노리고 온 게 아니라, 이걸 찾으러 온 거였군.]
마왕이 이 땅에 나타나고 봉인되고, 또다시 자리 잡은 이유는 오로지 마력이 풍부한 별의 생명점인 ‘성맥’일 뿐 이곳의 주인이었던 베오날드나 베노피스의 지하에 무엇이 있는가 따위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한순간 피어나고 사라지는 인간의 삶 따위에는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모든 것을 멸하고자 하는 그에겐 어차피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둘 순 없겠군.]
마왕은 베오날드가 꾸미는 일이 뭔지 전혀 모르지만 그가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대항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그대로 그를 쫓아 유적 내부로 들어갔다.
[…이쪽이군.]
유적 내부로 들어온 마왕은 바닥의 흔적을 보면서 베오날드의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아가는데, 갑자기 앞에 금속으로 된 격벽이 내려오고 땅이 꺼졌다.
떨어질 뻔했지만 허공을 밟고 뛰어오른 그는 안전하게 착지했고, 눈앞에 자신이 가려던 길이 막힌 것을 쳐다보았다.
[성가시군.]
끄그그극! 우지끈!
마왕은 태연하게 격벽을 뜯어내더니 쓰레기 치우듯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번엔 벽에서 나온 녹색 가스가 소리를 내면서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으니 살짝 마비가 오면서 피부와 몸에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는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와, 저 지독한 마왕 같으니! 500년 전 거라지만! 내가 철두철미하게 짜 놓은 함정과 보안을 모조리 그냥 돌파해 버리네! 젠장할!”
[성가시군.]
“그래도 시간 벌이는 되니 다행이군. 제길!”
유적 내부로 들어온 베오날드는 빠르게 중앙 관제실로 와서 인증을 한 다음 내부 시설을 활성화시켰다.
후계자인 ‘알테리오’는 역시나 내부 시설을 모조리 꺼 놨었기에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고, 작동만 넣자 금방 ‘성맥’의 마력으로 작동해서 열심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왕을 방해하여 지금 그에게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방법이…….’
베오날드는 긴장하면서 다급히 손을 움직여 패널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본래 계획은 여기 잠입해서 베노피스에 보관해 둔 유물과 물건들을 이용해서 ‘소환문’도 부수고 마법진도 처리한 다음 지하에 있는 이동 마법진을 활성화시켜 두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왕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고, 무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이상 다른 방안을 빨리 모색해야만 했다.
‘직접 싸워서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음…….’
지금 이 시간에도 마왕은 보안 설비를 담담히 부수면서 다가오고 있다.
시간은 철저히 소모되었고, 베오날드는 한시라도 빨리 방안을 찾아내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