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피, 피의 강 님이 쓰러지셨다!”
“우어어어어어어!”
그리고 ‘피의 강’이 쓰러지자 몬스터들과 마족들은 일제히 놀라면서 부리나케 물러났다.
생각 없이 꼬라박기만 하는 놈들치곤 의외로 강자에 대한 의존도와 사기라는 게 존재하는 것이 놀라운 베오날드였다.
‘이겼나? 음, 역시… 막강한 놈이라서 그런지 피해가 심각하군.’
물론 아군의 희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기사들이 쓰러지고, 베오날드의 마갑주도 엉망진창으로 고장이 났다.
신관들 중에는 탈진해서 쓰러진 자들이 있었으며, 치열한 전투 끝에 마법사들과 성벽 모두 엉망으로 부서진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았으면 다음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이겨 내고 나아갈 수 있는 다음이……! 후우… 흡!’
‘성검’의 도움을 받아도 도저히 가시지 않는 전투의 피로로 눈이 감길 것 같았지만 베오날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전투가 끝나고부터 이제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베오날드는 몰려오는 수면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고, 포션을 마시면서 정신을 급히 깨우고는 우선 용사로서 해야 할 일부터 행하기 시작했다.
“다들 지치고 힘든가? 하나 놈은 스스로를 마왕의 제일가는 수하라고 하였다. 그 말인즉슨 이놈보다 강한 것은 마왕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버텨 내고, 버텨 내어서! 이제 마왕이 아니고서는 이 성벽과 도시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그러니 이건 절망할 일이 아니다. 희생이 아니다! 희망이다! 우리는 싸워 이겨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억지 논리였지만 베오날드는 용사로서 이래야만 사람들이 그래도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검을 빛내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약을 나누어 주면서 그는 모두의 수고를 치하하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숭고한 위로와 경건한 의식을 통해서 빌어 주었다.
인간의 긍정적인 면이라면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얼마든지 용기를 낼 수 있는 마음을 지닌 거였기에 베오날드는 그 불꽃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무겁군. 젠장!’
으득!
본래 성질에 맞지 않은 짓을 하려니 더욱 갑갑한 베오날드였다.
이 일은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직접 안 하고 적당히 용사 같은 인간이 해도 되는 건데, 가뜩이나 자질구레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모든 행사를 끝내고 돌아온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쉬고, 이렇게 뒤지나 저렇게 뒤지나 똑같다고 생각하며 지옥의 업무에 들어간다.
***
그 뒤로도 안심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피의 강’ 정도나 되는 고위 마족이 대패하고 나니 한동안 마족들의 공세가 멈추었다는 점이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여전히 바쁘기 짝이 없으니 하루 24시간도 부족한 게 그의 일상이었다.
하루 종일 서류 작업에 때론 현장도 나가 봐야 하고, 발데리안 영지와 연락 및 작업, 거기에 대수로 설득 및 재원 마련 등등… 대신으로서의 역량을 절찬리에 발휘 중이었다.
“이걸 다 하고 있던 게요?”
[해야… 하니까 하는 겁니다. 국가를 지배하는 자라면 능히 해내야 하는 일이지요.]
사각사각…….
어느새 수리된 마갑주를 입은 채로 베오날드는 마갑주 사이즈에 맞춰서 쓸 수 있는 펜을 들고서 열심히 서류 작업을 해 댄다.
애초부터 ‘용사’라는 껍데기를 유지할 생각이었기에 마갑주를 입은 상태에서도 무리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여러 조치를 해 놓아서 그의 작업은 문제없이 계속되고 있었고, 황태자는 그의 업무량과 처리 속도, 능력을 보며 기가 질린 듯했다.
“이전엔… ‘대신’이 되고자 한 그대의 요구를 권력욕이나 다른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지는군. 그야말로 분골쇄신, 전투가 일어나면 전장으로 나가고, 돌아오면 계속해서 일하고 있으니…….”
[이 사명을 위해서 삶을 부여받은 몸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아니, 뭔가 해 주길 원하시면 교육 제도랑 개선책 만든 것을 실행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노예제 개선안도 실행해 주시고 말이죠.]
“하지만 이 내용들… 너무 급진적인 게 많지 않나?”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시이고, 상시적으로 ‘마족’들의 침략이 있는 상황입니다. 이만큼 좋은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노예든 도적이든 뭐든 지금 인적 자원을 하나라도 더 끌어모아서 굴려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일단 ‘용사’로서의 위상도 위상이었지만 그간 보여 준 ‘대신’으로서의 역량과 국정 운영 능력도 황태자가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뛰어난 베오날드였다.
특히나 황태자는 이미 그 깐깐한 황제에게서 각종 교육과 제왕학을 익혔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베오날드가 정리하고 집행한 서류들을 보면서 그가 엄청난 관록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허…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군. 대체 비결이 뭔가?”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꽃과 풀들의 상태를 살피고, 해충을 쫓고, 물을 뿌리고, 때론 가지치기를 하고, 날씨의 영향에서도 지켜 내기 위해 모든 지혜를 짜내야 하죠. 물론 ‘정원’의 크기가 커지면 이제 관리할 사람이 더 필요해지고, 그 사람들까지 관리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을 보는 눈이 필요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건 비결이 아니지 않나?”
[정석이 곧 비결인 것도 있습니다, 전하.]
“그렇지. 그렇겠지.”
[그러니 유능한 인재를 여기저기서 찾아 주십시오. 신분 관련 없이… 다 데려와 주시면 제가 그에 맞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일손이 더 필요합니다. 글자랑 수를 알면 더 좋고 말입니다.]
물론 이게 쉽지 않은 건 베오날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쓸 만한 장정은 대부분 징병되어 있고, 교육이든 새롭게 완성된 체제라는 게 하루아침에 그 결실이 나오는 게 아니었기에 당분간 베오날드의 고생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황태자에게 자잘하게 투정을 좀 부린 베오날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서 행정 업무를 지속해 나가며 현재 상황을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은 그 거대한 놈을 잡은 것과 지원 병력 덕분에 수도 수비는 안정화되었고, 본격적으로 다이나 왕국에서 식량 생산이 시작되고, 발데리안 쪽에서도 식량 생산이 본격화된 덕분에 그것들을 들여와서 식량난도 해결되었다. 거기에 마갑주를 공급받은 크멜 가문의 전선도 빠르게 안정화를 넘어서 아예 볼레아로 쳐들어갈 기세 정도가 되었고…….’
그동안과 그리고 이전부터 해 놓은 작업들이 결실로 다가온 덕분에 전반적으로 대륙의 큰 위기는 넘긴 그런 느낌이 되어가는 전국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수로 공사’로 대영지와 제국 수도가 강 하나로 이어지게 되면 이제 물자 수송과 교통의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아지기 때문에 제국의 발전은 더 빠르게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혹시 수로가 안 되면… 철로(鐵路)라도 깔아 보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광산에 이용하는 그거… 덩치 키운 걸로 시험작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사실 ‘공간 이동 마법진’이라고 하는 것까지 이미 구현해 둔 베오날드였지만, 그것은 사용 코스트가 너무나 비싸서 일반적인 물자 운송이나 교통수단으로 쓰기는 안 좋았기에 좀 더 저렴한 버전을 만들고자 계속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광산에서 쓰는 ‘철로’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철도’에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달아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미 마갑주 연구로 술식 연구와 마력 효율도 꽤 좋게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충분히 가능하긴 한데, 여기 놈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또 동력원 연구도 마갑주 버전이랑 다르게 새로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못한 거지만…….’
그래도 강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수로보다는 단순히 철과 목재만으로 만들 수 있는 ‘철로’의 장점은 확실했기에 베오날드는 이것도 연구하자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류를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의 차이가 국력 신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아는 그였기에 언젠가 할 수 있게 청사진 정도만 만들자고 생각했다.
‘…이러면 또 일이 늘어나겠군. 제길! 이미 한번 통일 제국 정도의 나라를 만들어 보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급해! 젠장!’
예술가들이 같은 것을 조각하거나 그림을 그리더라도 처음 것보다 그다음 것이 더 나아지고, 이전에 하지 못하거나 해 보지 못했던 것을 시도한다거나?
게다가 이전 생에 이미 간신이자 권력자로서 즐거움은 다 겪어 봤고, 여신에게 명 받은 몸인지라 다른 미혹 없이 순수하게 국가 운영 자체에 몰두하게 되다 보니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먹고 일하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승기는 잡은 거나 마찬가지. 마왕 놈, 인간이 마음먹으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변할 수 있는 지 보여 주마.’
한 30년, 아니 이대로 15년이면 마갑주로 무장한 기사 군단과 발달된 연금술과 마법 공학의 힘으로 강화된 군대로 마족들을 싹 밀어 버리고 마왕 놈을 자신의 발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생각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이렇게 정상적으로 제국이 운영하는 걸 막아야 하는 게 암흑신교 놈들의 역할이겠지만… 나도 나름 ‘뱀’이니 말이지.’
마족들의 전략은 무한히 공급되는 분노의 마족과 악마, 몬스터들의 군세가 정면에서 때리는 동안 암흑신교 놈들이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켜서 아주 자연스럽게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암흑신교에게 있어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히드라와 뱀’을 상징으로 삼는 노이멀 가문의 가주. 수많은 악당들만큼이나 간교하고 잔혹한 면도 있는 자로서 그들이 행할 일이나 패턴 정도는 능히 꿰고 있었다.
‘마족의 공세를 받고 있고, 거기에 암흑신교들에 의해서 신성국을 무너뜨렸다고 소문을 냈으니 신전 기사들이 아주 제대로 이를 갈고 조져 대고 있지. 후후후.’
엄밀히 말하면 ‘신성국’을 붕괴시킨 건 지금 ‘용사’인 베오날드였지만, 현재 누구든 그가 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암흑신교의 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성국’이라는 종교 국가 도시를 파괴한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림과 동시에 제국 수도는 물론 모든 영지와 도시에 암흑신교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쥐 잡듯이 잡아 대려고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삼조인가? 덕분에 용사의 입지도 좋아졌으니까……. 아무튼 내가 붕괴시켜 놓고 이득을 잔뜩 챙겼지. 후후후.’
그래서 마족들과 암흑신교의 전략 체계는 붕괴되었고, 결국 내부 단속과 통제가 확실히 되니 단순 무식하게 제국 수도에 병력만 꼬라박게 되는 것이 마족들의 운명이었다.
마왕의 수하들 중 최강인 그 ‘피의 강’인지 하는 마족까지 처리하게 될 정도로 전력을 키워 놨으니 이제 시간만 더… 버티면 버틸수록 강성해질 제국의 앞에서 마족들은 결국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처럼 될 운명이라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음,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남은 변수는 ‘마왕’인가?’
그러나 마지막 남은 변수가 아직 그들에겐 존재했다.
바로 분노의 마왕. 500년 전 세계를 멸망시킬 뻔한 존재,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된 원인이자 자신을 사랑하여 비극적으로 죽은 딸의 영혼을 가져간 망할 놈. 지금 이렇게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일하는 근본적인 이유이자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말하는 걸로 봐선 전혀 ‘분노의 마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딸의 영혼을 가져갈 때의 모습과 말투를 떠올리는 베오날드.
‘분노의 마왕’이라면서도 그다지 분노하거나 무시무시한 투기를 불태우는 게 아닌, 담담하고 고요한 태도를 보이던 마왕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끝없는 분노와 증오가 불타오르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단순 무식하던 부하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그가 무엇을 꾸밀지 계속해서 생각을 굴리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그저 이대로 몰아치면 될 뿐.]
그리고 같은 시각, 베노피스에 있는 거대한 붉은 수정의 봉인에서는 충격적인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안에 갇힌 ‘분노의 마왕’이 베오날드를 상대할 때와 같은 어조로 자신의 앞에 조아린 암흑신교와 마족들에게 무덤덤하게 선언하자, 암흑신교의 대신관이 벌벌 떨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알리기 위해 진언한다.
“하, 하오나… 지금 이대로면 당초 예상하던 마왕님의 부활 시기가… 엄청 뒤로 미루어질 것입니다.”
[내가 전에 뭐라고 말했었지? 내 봉인은 ‘분노’로 인해서 깨어나지만 내 수하들인 마족들은 이 별의 심장인 ‘성맥’의 마력으로 연 게이트를 통해서 계속 들어오고 있다. 죽은 ‘피의 강’도 결국 부활하겠지. 막대한 양의 ‘성맥’의 마력을 빨아들이고서 말이야.]
“아……!”
[승패는 이미 정해진 바나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더냐? 용맹, 승리, 희망이라면서 자화자찬하고 있겠지만… 결국 놈들이 싸우는 건 놈들이 서 있는 자신들의 별의 생명이다. 그것에 이기든 지든 결국 다가오는 건 멸망이고, 더 거세게 반격할수록 그 생명이 사라지는 건 빨라지는 법이지. 내 손으로 직접 모든 걸 불태우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말이야.]
고오오오…….
수정에서 마왕의 투기가 불타올랐고, 그제야 암흑신교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안도한다.
그래, 어차피 이 ‘베노피스’에 있는 ‘성맥’의 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이 별은 죽어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싸워서 이기든 지든, 결국 멸망으로 치닫는 현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결코 희망이라는 것은 없는 게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