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그게 무슨 말이지? 보급을 직접 해결하고 있다고?”
“예. 그… 아시다시피 지금 이곳 수도의 방어전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여러 인력들을 군으로 돌리다 보니 산업력, 생산력이 떨어진 상태이고, 결국 다른 대귀족의 영지에서 구매를 하거나 지원을 받는 실정이라 군에 들어가는 물자가 원활하게 보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그 용사에게 제11부대의 지휘관 자리를 준 거고 말이지.”
그리고 물론 이 귀족이 말하는 것이 100퍼센트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는 황태자였다.
보급이 문제가 되는 건 이제 물자와 금전을 관리하는 귀족이나 신하들 선에서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첩보부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부친과 다르게 과감한 결단을 잘 내리지 못했기에 결국 일이 이렇게 방치된 것이었다.
“아무튼 그 제11부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어차피 보급이 해결되지 않아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부대였기에 베오날드에게 줘도 금방 해선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베오날드는 보급을 해결해서 정상 부대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보급을 한 건지 모르지만 제11부대를 인수받은 날부터 갑자기 보급을 혼자서 ‘기적’처럼 해결했고, 그 뒤로 계속 다른 부대와 연계력을 올려 가더니 이제는 벌써… 제9부대, 제10부대, 제12, 13, 15부대 등등 점점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첩보부에 문의해서 뒤늦게 조사해 본 결과… 벌써 그 ‘용사’님 아래 1만가량의 부대가 연계되어 있다고…….”
“말도 안 돼! 고작 일주일 만에?”
“무, 물론 진심으로 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급을 받기 위해서 거짓 충성을 하는 자들도 있지만… 결국 병사들의 사기는 배 속에서 나오는 법인지라.”
“하… 이게 무슨 일인 건지.”
자신들도 해결이 불가능한 보급을 해결해서 성벽을 지키는 군을 살려 내어 제국 수호에 기여를 한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군과 황실에 위협이 되는 영향력을 키우는 건 원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튼 황태자는 지금 이 사태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가 어떤 재주나 능력을 사용했는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결했단 말인가? 신성국이 지원해 준 게 아니란 말인가?”
“신성국의 성기사단은 애초에 자신들의 것을 직접 가져왔습니다. 용사는 홀로 그들을 떠나서 지금 저희 군에 스스로 몸을 담은 건데… 그걸 어떻게 해결한 건지는… 그래서 ‘기적’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아니, 마차나 물류의 움직임이 일절 없는데,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이건 기적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법사에겐 조사를 시켜 보았는가?”
“예. 하지만 ‘성검’의 힘 때문인지 그 또한 기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으으으음… 레기온 경,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황태자는 이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일을 도저히 자신의 머리론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레기온 경을 바라보면서 조언을 구한다.
레기온 경 또한 ‘용사’라는 것을 그저 전설 속의 존재라 생각하면서 마족을 퇴치하는 전문가로만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방식을 사용할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었다.
“오늘까지 제국을 섬겨 오면서 온갖 고난과 사건을 많이 겪어 본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옵니다, 전하.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은 그가 있어야만 제국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옵니다. 이 황궁엔 아직…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귀족들이 가득 있습니다.”
“…….”
그러면서 슬쩍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가신을 바라보았다.
저자 또한 귀족으로서 분명 제국에 충성은 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뒤로는 자신의 가문, 자신의 영지를 더 소중히 하려고 할 것이다.
그저 제국 수도가 무너지면 이제 대륙 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협력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국군에 자신의 것을 내어 주면서 제국 수도를 지키고자 하는 점을 보면 확실히 ‘용사’의 행보는 맞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를 탄압하거나 행동을 막으려 하면 오히려 제국에 대한 병사들의 반감만 늘어나겠지요.”
“그러면… 어찌해야 좋겠소?”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대신’의 자리에 올리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가 하는 보급이나 모든 행동과 공은 전하의 덕이 됩니다.”
“그, 그럼 결국?”
“예, 전하. 상대의 뜻대로 되는 거지요. 전하께선 오늘 하나 크게 배우신 겁니다. 아무리 합의와 상호 존중이 좋다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상대의 격과 실력,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법.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라면… 억지로 교섭 자리에서 힘을 쓰지 않아도 이렇게 알아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아십시오.”
“아, 알겠소. 내가 어리석었군. 오늘 하나 크게 배웠소.”
조엔 황태자는 조화를 중시해서 결단력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황제가 후계자로 점찍은 만큼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보통 어리석은 황족이었다면 황가의 자존심, 황태자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어리석은 판단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스스로의 오판을 인정하고 레기온 경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잘못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황제로서의 자격은 있었다.
“당장 용사를 불러오시오, 레기온 경.”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결국 모든 것은 베오날드의 손아귀에 있는 셈이었다.
제11부대에서 계속 일하면서 다른 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키워 나가던 베오날드는 일주일 만에 자신을 보러 온 황제의 전령을 보자마자 피식 웃으면서 시시하다는 생각을 한다.
좀 더 제국의 황태자답게, 자존심을 부리면서 버틸 걸 예상했는데 말이다.
“용사님, 지금 곧바로 성으로 오시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이옵니다.”
‘음, 물론 성격이 유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안 그렇더라도 황실과 제국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을 텐데, 너무 성급하군. 이리저리 방해하고 다른 방법으로 딴죽을 걸면서 한 달은 지나야 굽힐 줄 알았는데 말이지.’
“용사님?”
[아, 죄송합니다. 당연히 명을 따라야지요. 잠시 정신이 팔렸습니다. 기꺼이 가도록 하지요.]
베오날드는 너무나 시시한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시간 절약이 된 것에 안도하며 자신을 데리러 온 황실 기사의 뒤를 따라 황궁으로 재입궐하여 알현실에 다시 서게 된다.
주변의 눈빛도 그렇고, 위에 앉아 있는 황태자를 비롯해서 가신들과 황실 기사단들까지 이번엔 경계심이 한껏 더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대강 어떤 이유인지 알 것 같은 베오날드였지만 그는 일단 능청스럽게 대하기로 하고는 예를 갖추면서 이번엔 무릎을 꿇는다.
[절 어찌하여 부르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다름이 아니라 그대의 활약이 귀에 들어와서 불렀네.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몰라도… 어려운 병사들의 보급과 사기를 해결해서 다른 곳보다 훌륭히 싸우고 있다고 해서 말이야.”
[용사라는 이름을 짊어졌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법이지요.]
순순히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말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뼈가 심어져 있는 말이었다.
베오날드의 말을 해석하자면 ‘그럼 용사라고 자칭하는 놈이 그 정도밖에 못하겠냐?’라는 뜻과 ‘나한테 그 구더기 같은 부대를 왜 준 거냐?’ 하는 이중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사죄하고 싶네. 사실 자네가 처음에 한 그 부탁이… 조금 과한 것이라서 단번에 들어주긴 힘든 것인지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 둔 다음 자네의 역량과 솜씨, 혹은 공훈이 생기는 걸 기다렸던 것일세. 그래서 그런 곳으로 보낸 것일세.”
‘호오? 저런… 유연함은 꽤 제법이군. 보통 황실의 권위나 황태자로서의 불안정한 지위 문제 때문에 직접 고개 숙여서 사죄하는 건 잘 안 하려고 할 텐데… 아, 물론 용사라서 가능한 것일 수가 있겠군.’
“하나 지금은 누구도 용사의 역량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네. 그래서 처음에 자네가 요구했던 그 ‘대신’의 자리를 기꺼이 마련해 주도록 하지.”
보통은 어색해하거나 머뭇거리면서 자신이 과거에 했던 잘못을 뭉개고 안면에 철판을 깔고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기 마련인데, 이 조엔 황태자는 깔끔하게 사과를 하면서 그럴싸한 명분까지 대는 것으로 ‘용사’의 기분을 풀어 주는 동시에 처음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쪽도 좋게 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오, 유연한 것도 장점은 있군. 하긴 이러니 그 황제가 후계자로 삼은 거겠지. 정통성도 정통성이지만 말이야. 일이 잘 풀리면 좋은 법이지.’
“아… 그리고 혹시 그것으로 부족한 다른 조건이 있는가?”
[검도 들지만 ‘펜’으로써도 싸우기 원하는 제 요구를 이제라도 들어주신 점 정말 감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 기꺼이 ‘대신’의 자리를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만, 한 가지 요청이 더 있사옵니다.]
“요청이 또?”
‘…이렇게 날 부른 것만으로도 한 수 물렸다는 증거이니 나도 한 수 더 요구해야 하는 법이지.’
상대가 좋은 인재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냉혹한 정치 계산은 절대로 무르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도 엄연히 큰 비용이고, 이렇게 약하게 나오는 상대에게선 철저히 뜯어내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는 황태자였지만 이미 하기로 한 판단을 무를 수 없기에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았고, 베오날드는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대신이 되면 당연히 국정을 돌봐야 하는 법. 하나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의 모든 허가는 현재 황제 폐하의 대리를 맡고 계신 황태자 전하께 받아야 합니다. 하나 지금은 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급한 상황. 빠른 안건의 검토와 통과를 위해서 제 업무는 직접 전하께 전달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것은 그러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게.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반응을 보니 의미를 모르나 보군. 하긴 황당한 일이겠지. 뭔가 다른 거창한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냥 직접 안건을 전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니 말이야.’
하지만 고대부터 황제의 곁에 가까이 있는 자가 가지는 권력이야말로 제국의 귀족이나 다른 신하가 가질 수 있는 권력 중 최고라는 것을 알 만한 자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과거 환관이나 황궁에서 황제의 시중을 드는 자들은 그 의견을 귀족들에게 받아서 전달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상당한 권력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을 아직 황태자는 이해하지 못한 건지 어버버하는 반면, 레기온 경은 금방 눈치를 챘는지 용사의 모습을 한 베오날드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용사답지 않게 간교하군. 제국의 권력을 손에 넣을 생각인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요청이라서 당혹스러우실 것이고, 단숨에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될 제가 우려되시는 건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과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선 제 검과 펜이 꼭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말씀드리며 저는 다른 욕망이 아닌 오직 ‘용사’로서의 사명만을 행할 것을 이 성검과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고자 합니다.]
‘으으음…….’
‘자, 이 정도 담보를 걸었으면 좀 받아 줄 만하지 않나? 어차피 너희 모두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감시할 텐데 말이지.’
그렇기에 가차 없이 용사라는 이름에 걸린 ‘명예’를 담보로 걸 수 있는 베오날드였다.
신성국에서 온 용사로서 걸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이름인 ‘성검’과 ‘여신’을 담보로 걸었으니, 진의를 담은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정체가 베오날드라고 하는 것이 드러났다면 절대 걸 수 없는 것으로, 정체를 감추고 오직 ‘용사’라는 이름만 세웠기에 걸 수 있는 카드였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겠네.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바로 대신의 자리를 받고, 제국을 지키기 위한 업무를 시작하겠사옵니다. 실력을 곧바로 보여 드리며 분골쇄신하여 일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러게. 그런데… 이제 대신이 되었으니 솔직하게 묻고 싶은 게 있네만, 그 휘하 부대의 보급은 어떻게 한 건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물었다면 필시 용사인 베오날드는 진심으로 말해 주지 않았을 테니, 황태자는 그가 대신의 자리를 받아들이자마자 세세한 보급 사항에 대해서 묻는다.
도무지 궁금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게, 첩보부의 보고에 따르면 외부에서 마차도 들어오지 않고, 물자가 들어오거나 가는 조짐도 없고 신성국에서 온 신전 기사들이 무언가 지원하는 기색도 없는데 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것은… 일하는 걸 보시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겁니다.]
“…….”
[말로 하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또 사람은 사전 지식이나 이해 없이 ‘기적’을 본들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말이죠.]
물론 이건 그저 핑계. 베오날드로서는 ‘용사’의 신비감과 무게감을 지키기 위해 ‘기적’의 방법을 공개하는 건 좋지 않았기에 능글맞게 둘러댄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여신교의 용사가 ‘마법’과 ‘술식’, ‘연금술’ 등을 활용한 기술에 능하다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깨는 일이기에 그저 ‘기적’으로 남겨 두는 게 제일 좋았다.
어쨌든 드디어 ‘대신’의 자리를 손에 넣은 베오날드는 성벽의 전장보다도 더욱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는 전장에 들어온 것을 기뻐하며 곧바로 황제 대리를 맡고 있는 황태자와 함께 그곳에 뛰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