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내가 괜히 발데리안 영지에서 지난 5년간… 고생한 줄 아나? 다 이때를 위함이었지.’
이 기적을 선보이기 위해서 지난 5년간 발데리안 영지와 다이나 왕국을 돌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유적을 모두 활성화하는 건 물론 식량, 무기, 각종 장비의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지혜를 모은 끝에 완성한 것이었다.
물론 이 물건의 공간 이동 전송 자체는 베오날드의 ‘유산’인 ‘둥지’의 지하에 있는 마법진에 있던 기술이라서 응용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다.
‘이 전송 한 번에… 마정석이 얼마나 들어가더라?’
술식의 발동에 필요한 마력을 아르젠 쪽에서 부담할 수 있게 했지만, 문제는 이 ‘전송’ 한 번에 드는 마력량이었다.
그래서 늘 ‘유산’이 있는 ‘둥지’는 ‘지맥’이 있는 땅에만 만든 것이고, 그것을 간소화한 이것은 마정석을 사용해서 시전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지금도 다이나 왕국에서는 이 마정석 사용량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었지만, 앞으로 한참 걸릴 일이다.
이 문제만 없었더라면 베오날드는 진작 ‘신성국’에다 물자를 풀어서 복구 작업에 투자했을 것이다.
‘아니, 뭐… 이득이 없으니까 사실 할 수 있어도 풀지 않았겠지만 말이지.’
물론 감수한다면 그것도 감내할 수 있는 베오날드였지만 신성국에 그런 지원을 해 줘 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냥 쓰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용사라지만 자신은 자선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저 마족의 군세를 막고 마왕을 처치하는 임무가 있기에 아낄 수 있는 카드는 아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럼 밥도 먹었으니 본격적으로 일을 하도록 하지. 각 백부장은 휘하 병력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라. 부대 행정과 보급계는 물자 및 부대의 현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가져오도록. 없으면 만들어서 가져와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원은 부대시설 정비 및 창고 청소, 수리를 실시하라. 추가적인 보급을 계산하고 실행하려면 부대시설을 완벽히 정비해야 한다.]
“예!”
역시 밥을 먹인 덕분에 병사들의 인심을 얻어서 그런지 베오날드의 지시는 빠르게 이루어졌고, 베오날드는 필요한 물자의 양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망가진 갑옷과 피복, 무기류, 부츠 모조리 필요한 개수를 체크했고, 덤으로 병사들의 건강 상태도 확인했다.
[어디… 아프면 말하게.]
“예. 으아아아아아아악!”
[역시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았군. 제국군엔 군의가 있나?]
“그… 다, 다른 부대엔 있는데, 보통은 기사분들의 연줄로 모셔 오는 경우가 많아서…….”
[쥐뿔도 없으면 없다는 거군. 알았다. 보자… 근육이 뒤틀린 것 같으니 약을 일단 처방하지. 그리고 내일 성벽으로 가지 말고 부대 정비에 투입하게.]
제대로 된 진료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병사들의 몸 상태가 엉망인 곳도 많았다.
본래라면 좀 느긋하게 쉬게 해야 할 상처였지만, 지금 인원이 너무 급한지라 부대 내에서 휴식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할 수 있는 한 병사들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밤에 아르젠에게 연락을 넣어서 물자를 챙겨 달라고 지시를 내렸다.
***
다음 날, 제국 수도의 성벽.
그오오오오오오오!
아침 해가 뜸과 동시에 지평선 너머에서 파괴와 분노에 미친 악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대지를 울리며 다가오는 붉은 파도. 붉은 용인과 악마 형태의 마족, 각종 몬스터들이 오늘도 전쟁을 알리며 성벽으로 진군해 왔다.
“젠장… 오늘도 지긋지긋한 아침의 시작이군. 여신이시여…….”
성벽에서 근무하는 제10부대의 제국 병사 마틴은 마족들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매일같이 쳐들어오는 마족들에게 저항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할 지경으로 정말 그냥 저 마족들의 검과 주먹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하는 그였지만, 이 성벽 뒤에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싸우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해도 이 상태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 배고파.’
꼬르르륵…….
오늘 아침에 먹은 것은 수프에 고작 빵 반 조각. 성벽 위로 올라오니 이미 배가 다 꺼지고 난 뒤였다.
무기로 든 창은 어제 몬스터의 피를 박박 닦았음에도 아직 피가 굳은 채 남아 있었고, 창대는 이제 여분이 남지 않아서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입은 얇은 가죽 갑옷도, 제국군 소속임을 증명하는 겉옷도 모두 너덜너덜해지고 피로 얼룩진 상태인데, 새것을 보급받기는커녕 정비조차 해 주지 않고 스스로 해야 해서 가뜩이나 배도 고픈데 피로한 상태가 더 심해졌다.
‘…하아아아. 음?’
“온다. 다들 기합 넣고 막아라. 이제 제대로 된 대장이 왔으니 말이다!”
“예!”
그렇게 힘 빠져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사이, 자신들 10부대 옆을 담당하는 제11부대원들의 목소리가 힘찬 것을 듣게 된다.
제11부대. 바로 옆이니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제10부대보다도 보급과 대우가 더 열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과 모습을 본 마틴의 눈이 커졌는데, 그들의 옷과 갑옷 무장이 모두 다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쟤네… 보급이 들어왔나? 무장이 다 번쩍번쩍해. 어라? 근데 못 보던 형식인데?’
제11부대는 어느새 갑주에서부터 무기까지 전부… 제국 수도군이 사용하는 것과 다른 양식의 물건을 장비한 채로 성벽에 서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제만 해도 자신들 제10부대보다도 더 빌빌대던 인간들이 지금은 힘이 넘치는 게, 자신들이 모르는 새 보급이라도 들어온 건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저기만 몰빵을 받은 건가? 왜 저렇게 펄펄해? 게다가 무기는 뭐… 어? 저건?’
그의 눈에 제11부대의 기사들을 이끌고 성벽에 나타난 거대한 갑주 하나가 들어왔다.
저 화려한 갑주부터 해서 위풍당당한 모습. 그저께인가? 아래쪽 성벽이 뚫렸을 때 지원을 온 ‘용사’라는 존재에 대해 들은 소문 그대로였다.
마틴은 늘 질리도록 악마들만 보다가 새로 등장한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는데, 그는 빛나는 검을 들고서 기합 넣은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한다.
[자, 다들 기합 넣고, 반드시 살아남아라! 우린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참고로 오늘 점심은 어젯밤부터 재워 놓은 양념 칠면조 구이를 따뜻한 빵에 끼워 넣은 샌드위치와 포도주다! 반드시 살아라!]
‘뭐라고?’
“와아아아아아!”
세상에 점심 메뉴를 알려 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사기가 오르는 부대가 있을까?
마틴뿐만 아니라 옆에서 듣는 제10부대와 제12부대의 병사들도 기가 막힌 듯 바라보면서도 어느새 다가온 악마들의 목소리에 결국 전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제10부대의 마틴은 부러움 반, 황당함 반을 품으면서 일단 창을 들고서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마족들을 처리해 나갔다.
그르르르르륵!
끼에에에에엑!
“죽어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제11부대는 그렇다 쳐도 다른 부대들은 아까 전 힘이 없던 것과 달리 죽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 열심히 싸우기 시작한다.
성벽에 건 사다리를 밀고, 올라온 마족과 악마들을 처치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가는 가운데, 제11부대는 ‘용사’인 베오날드의 지휘와 보급 덕분인지 이전보다 분투하면서 잘 싸우는 중이었다.
[흡!]
키에에에엑!
‘음, 움직임이 좋군. 그래도 병사들 모두 지금까지 살아남은 짬밥이 있으니 말이지. 보급만 제대로 되면 이리도 쉬운 것을… 하지만…….’
베오날드는 검을 휘둘러 붉은 용인들을 처단하면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제11부대는 베오날드의 보급 덕분에 아주 수월하게 싸우면서 아직까지도 희생이 없었지만, 다른 부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희생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제국 수도의 위태로운 상황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베오날드였다.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군. 병력 수도 수지만, 질도 떨어져 있어. 이 제11부대 쪽엔 보급이 안 돼서 숫자가 적지만 오히려 치열하게 잘 살아남은 놈들로만 이루어진 반면…….’
다른 쪽의 상황을 보니 병력 수는 어떻게 채워져 있는 게 보였지만, 노인이나 어린아이까지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장성한 어른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전투를 해도 힘든 상황에 그들이 끼어 봐야 악마와 마족, 몬스터의 밥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군데군데 비는 라인에 베오날드가 이끌고 온 신전 기사들과 성직자들이 보조해 주면서 싸우기에 이때까지보다는 수월한 상황이었다.
‘하나 신성국의 지원 병력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겠어. 발데리안 가문에 지원 병력을 불러 달라고 연락을 넣어야겠군. 그리고… 남부나 다른 귀족 놈들에게도 지원 병력의 파견이 필요하겠고, 그리고 필요한 대량의 물자 운송 계획. 거기에…….’
“방어선이 무너진다아아아! 누가 좀 도와줘어어어!”
‘전선 지원까지 가야겠군. 제길! 아무튼… 가능한 한 빨리 여기 권력을 손에 넣어야겠어.’
서걱! 촤아아아악!
그렇게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베오날드는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싸워 나간다.
또 지휘관이라는 자리에 맞게 그는 전선을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다음에는 금방 제11부대의 영역으로 돌아가서 기사들과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계속해서 지휘를 내렸다.
[식사가 도착했다. 하나 적들은 물러나지 않으니 싸우면서 3분의 1씩 식사 교대를 하도록 한다. 아군이 비는 영역은 내가 메울 것이니, 빠르게 교대가 완료되면 전령을 보내도록. 시간은 20분씩 주마.]
“아, 예!”
[1분이라도 늦지 마라! 늦을 시, 이단으로 규정하고 내 손으로 화형시켜 주마.]
“아, 알겠습니다, 용사님! 샤크, 베일로, 쿠아란! 백부장! 부대원들을 데리고 빠르게 식사하고 와라!”
좋게 대해 주는 것 사이로 무시무시한 엄포를 놓는 것을 잊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어길 간 큰 놈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자신을 동화나 전설에 나오는 ‘용사’로 보고 ‘하하호호’ 하며 대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베오날드는 엄포를 놓으면서 병사들의 식사 시간 마련을 위해 약 300여 명의 병사들이 커버하던 성벽을 혼자서 맡는다.
‘음, 생각보다 여유로운걸?’
“끼에엑! 도, 도망쳐라! 이 빛은……!”
“캑! 여신의 힘이다! 끄아아악!”
타아앙! 탕!
그나마 ‘볼트 슈터’ 같은 준수한 원거리 무기와 ‘성검’이라는 마족과 악마들에게 천적인 무기 덕분에 300명이 수호하던 성벽의 라인을 혼자서 커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도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다 흘러갔고, 해가 질 무렵 몬스터와 악마들이 모두 물러나자 병사들과 기사들 모두 살아 있음에 감격하지만 이내 오늘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의 시체와 전투의 흔적을 바라보게 된다.
단, 베오날드가 지휘하는 제11부대를 제외하고 말이다.
“전투 보고입니다, 용사님. 우리 부대의 부상자는 총 4명, 그리고 사망자… 없습니다!”
[음, 다들 잘했다. 전후 처리를 하고 난 뒤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부대로 복귀 준비를 하도록 해라. 저녁밥이 우릴 기다리니 말이다. 저녁 메뉴는… 암소 통구이다. 널리널리 알려라.]
“아, 예! 알겠습니다.”
보급 하나의 차이 덕분에 용사에게 떠넘기듯이 하던 최악의 부대가 오늘 다른 그 어떤 제국군 부대보다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게 된 상황. 물론 이런 성과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자신과 부대의 소문이 다른 부대 및 귀족과 기사들에게 퍼지는 것이었다.
“자네들… 제11부대 상황 들었나?”
“어, 나도 들었어. 도저히 믿기지 않더군. 아니, 글쎄… 우리는 스튜에 빵만 찍어 먹어야 하는데, 걔네는 스테이크를 먹는다지 뭐야?”
“세상에, 진짜? 얼마 전에는 암소 통구이라며?”
“진짜라니까!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렇게 베오날드가 제국 수도에 도착하고 총 일주일째 되는 날, 모든 제국군의 부대가 제11부대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 귀족들은 물론 황실에까지 ‘용사’가 벌이는 신묘한 보급 능력에 대한 소문이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