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그리고 베오날드가 나간 뒤, 황태자를 중심으로 그곳 알현실에서 곧장 회의가 열렸다.
주제는 당연히 방금 전 커다란 폭풍을 몰고 왔던 ‘용사’의 대신 임명.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고, 엄연히 제국 정치에 끼어들겠다는 선언이다 보니 다들 웅성거리면서 여러 방면으로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용사면 그냥 마족과 싸울 생각이나 할 것이지… 뭐? 대신?”
“하지만 그 권위는 무시할 수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성벽을 수복하는 전쟁에서 싸운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엄청난 무력도 가지고 있고, 한 번 암흑신교들의 공작으로 무너진 ‘신성국’의 복구 작업과 조직 정비까지 모두 완료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수완가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를 대신으로 임명할 순 없지 않은가?”
“이미 용사라는 신분 증명이 있긴 합니다만…….”
웅성웅성…….
귀족들과 신하들 모두 합쳐서 일일이 따지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의견이 분분하게 갈려 나가고 있었다.
일단 제국 정치 체계 안으로 갑자기 들어오려는 다크호스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신성국의 인증을 받은 용사가 갑자기 끼어드는 것에 대해 단순히 호수에 돌을 던지는 레벨이 아니라 폭탄을 터뜨린 격이었기에 이득 계산과 더불어 머리가 아파 오는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냥 명예직 같은 것을 주는 건?”
“바보인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펜을 들고자 하는 놈의 야망을 저지할 순 없을 것이다.”
“거부한다고 해도 싸운다고 할 거니 그냥 거절하지요? 애초에 용사라는 건 마왕을 토벌하기 위한 존재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본래라면 이런 자리는 황제가 주도를 해서 의견을 취합하고 정리해서 이끌어 가야 하지만, 조엔 황태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계속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만 있었다.
신하와 귀족들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로서 그는 우선 자신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기보다는 그들 다수가 토의해서 나온 것을 따르는 쪽이 더 화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 시간이 더 걸리겠군. 레기온 경은 그 용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으으음… 터무니없는 놈이지요. 그리고 그 어떤 신화나 전설에서도 보지 못한 자입니다. 하지만 본래 ‘용사’라는 존재 자체가 이레귤러 중의 이레귤러이니 뭐라고 할 수 없겠지요.”
“으으음… 아버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소?”
“황제 폐하라면… 여러 방면을 따져서 무조건 황실과 제국의 안정을 위한 선택을 하셨을 거라 봅니다. 다만 그게 어떤 식으로 계산이 되는지 모르기에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레기온 경도 이 복잡한 사태에 대해선 판단할 수가 없었기에 적절히 둘러대었다.
황제를 곁에서 오래 섬기며 지켜봐 왔지만, 제라도 칼레움 황제는 보통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을 하지 않는 쪽이었기에 지금 저 ‘용사’를 보고 어떤 판단을 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저 개인적으로 본다면 그의 말을 한번 믿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은 미래가 매우 어둡고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 밀어붙이는 마족들, 불안에 떠는 제국의 백성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저 귀족 무리들까지. 수도가 무너지면 그대로 제 살길만 찾으려고 하겠지요.”
“즉,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를 선택하자고 하는 도박수인 것이오?”
“도박이라기보다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하는 기대라고 해 두지요. 애당초 현 상황에서 뾰족한 타개책이 저희에겐 없으니 말입니다.”
“으으음…….”
레기온 경의 말을 들은 황태자는 손으로 턱을 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의 말대로 지금 마족에게 계속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제국은 날이 갈수록 국력을 갉아먹히는 상황. 일부 대귀족들은 어차피 제국 수도가 망하는 것을 기다린 뒤에 독립하거나 제 살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제국에 붕괴의 그림자가 서서히 뒤덮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황태자 또한 바보는 아니라 이런 움직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머리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음…….”
“물론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자는 건 아닙니다. 이용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고, 이용하고 경계하고, 그다음에 위험하면 내치는 것이지요.”
“위험한 도구라는 거군.”
“도구는 늘… 위험합니다. 쓰기에 따라 다르지요. 이 검도, 도끼도, 창도… 모두 다 하나같을 뿐이죠. 어쨌든 지금은 검을 휘둘러야 할 때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으으음…….”
어쨌든 현재 이 제국 수도에서 결정권자는 황태자인 조엔 칼레움이었다.
하나 대귀족들과 귀족들의 반발과 화합이 깨질 걸 생각한 그는 레기온 경의 말에 흔들리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는 레기온 경 또한 이 상황이 매우 복잡한 것을 알기에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귀족들의 대화를 계속해서 지켜보기로 한다.
***
베노피스, 분노의 마왕 봉인.
같은 시각, 용인들과 마족, 그리고 암흑신교들은 모두 봉인 앞에 모여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떨고 있었다.
방금 막 들어온 소식 때문이었는데, 500년 전 강림한 분노의 마왕을 이곳에 봉인했던 ‘용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소식을 전한 마족은 고개를 조아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이제 그 분노에 희생될 것이라 생각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진실이냐?]
“예, 진실이옵니다. 그 성검의 빛… 전선에 나가 있는 고위 마족분들이 보았던 그것과 똑같았다고 하옵니다.”
[그런가…….]
“…예.”
[라미엘, 봉인… 해제를 위해선…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지?]
수정 안에 있는 ‘분노의 마왕’은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자들 중 안대를 낀 여사제를 불러 묻는다.
라미엘. 암흑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분노’를 섬기는 ‘분노의 사제’로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우길 바라며 내면이 항상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일어나서 잠시 손을 모으고 집중하더니 곧 상태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거의… 8할 정도 모였습니다, 마왕님. 앞으로 조금만 더 ‘분노’를 모으면 될 겁니다. 아니면 지금 무리해서 봉인을 풀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전력’을 다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런가. 알았다.]
“그보다는 전략을 수정하는 건 어떨는지요? 이대로… 제국 수도만 밀어붙이기보다는 마왕님의 군세를 사방으로 퍼뜨려서 자유롭게 하는 게… 지금 용사까지 그쪽에 나타난 이상 제국 수도는 더 뚫기가…….”
[…….]
‘분노의 마왕’은 조용했지만, 그 의미는 그 어떤 분노보다도 살벌한 것이었다.
수정을 깨뜨릴 듯이 퍼져 나오는 붉은 투기와 오러를 본 라미엘은 당장 엎드리면서 사죄를 바쳤다.
“죄, 죄송합니다! 이 어리석은 종이 감히 마왕님의 방침을… 지적하다니!”
[내가 분노하는 것은… 네가 내 방침을 지적해서가 아니다. 용사가 나타나서 더 뚫기가 어려워졌다고 하는 그 겁쟁이스러움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다. ‘분노’로 모든 생명을 없애고, 모든 세계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대상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 ‘별’ 또한 마찬가지이지.]
“…예.”
[애초에… 우리에게 패배란 없는 단어인데 말이지.]
지이잉…….
수정 안에서 불빛이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본래 베노피스의 성이 있던 자리의 폐허가 있었고, 그 위엔 거대한 붉은 마력으로 된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붉은 마력의 문에서는 분노의 마족들과 악마들이 끊임없이 나타나서 진군하였고, 그 진군하는 행렬은 끝없이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 전장에서 희생되는 만큼, 이곳에서 또다시 악마와 마족들이 보충되는 거였다.
[아무리 막아도 끝없이… 별의 생명을 먹고 나타난 내 부하들이 존재한다. 그렇게 별의 생명이 다하면 곧… 이 ‘별’의 목숨이 끝나고 그것은 멸망이나 다름없다.]
“마,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가서 더욱 분노하고… 더욱 가열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분노하고 싸워라. 용사의 목을 따서 내게 바치는 자에겐 암흑신이 내리는 것보다도 더 큰 축복과 포상을 내려 주겠다. 그러니 모두 가거라.]
“예!”
고오오오오…….
‘분노의 마왕’의 기운이 그제야 가라앉고, 모든 수하들은 일제히 그의 말에 대답하며 각자 무기를 들고서 남쪽으로 향하는 마족의 군세에 합류하여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고 베노피스에 머물던 고위급 마족들과 라미엘을 비롯한 암흑신교의 간부들까지 그곳에 합류한 것으로 제국 수도를 두드리는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을 예고했다.
***
다음 날, 황궁 알현실.
날이 밝자마자 대답을 하기 위해서 ‘용사’ 베오날드는 호출되었고, 어제와 같이 알현실에서 귀족들과 황태자가 있는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황태자는 품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더니 옆에 있는 시종에게 건네 그가 읽게 했다.
“용사님의 제안에 대한 현 칼레움 제국 황제 폐하의 대리이신 황태자 전하의 대답을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귀공의 제안은 매우 흥미로우며 한편으로는 제국의 새로운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칼레움 제국은 엄연히 제국 황실뿐만 아니라 귀족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화합의 국가. 모두의 동의 없이 ‘용사’를 멋대로 ‘대신’이라는 귀중한 자리에 앉힐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귀공에겐 ‘제국군 사령관’의 지위를 별도로 내려, 악의 파도로부터 능동적으로 수호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상.”
‘음, 예상보단 조금 더 내어 주긴 했군. 누군가 설득이라도 한 건가? 아, 레기온 경인가?’
본래 베오날드의 예상대로라면 그냥 잘 싸우랍시고 실권도 없는 명예직이나 주면서 지원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자리까지 줘서 놀라운 그였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베오날드의 본래 목적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이라서 예상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그러면 슬슬 준비한 것을… 아, 아니지. 이거 더 좋은 생각이 드는군.’
“…어떤가?”
‘음, 원래라면 준비했던 것을 꺼내야 하지만, 여기선 그냥 따라 볼까? 예상 밖의 지위도 손에 들어왔으니 말이야.’
살짝 눈치를 보는 것 같은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베오날드에게 물어 왔다.
일단은 대놓고 제안을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조심스러운 반면 베오날드는 본래 대응을 위해 준비했던 카드를 꺼낼까 했다가 다시 손에 집어넣기로 하고 일단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매우 감사하옵니다, 전하. 전에 말했듯이 그것이 전하와 제국의 결정이라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 그런가?”
“예. 그럼 제가 받을 부대와 병력을 지금 바로 인수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베오날드는 황태자에게 예를 표했고, 혹시라도 ‘용사’인 그가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억지를 부리면서 다시 갈등이 생길 걸 우려했던 황태자는 온건히 넘어간 것에 안도하게 된다.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베오날드가 더 좋은 계획을 떠올려서 한발 물러나 준 것일 뿐이었다.
한 발 뒤로 물러나면 그는 세 걸음을 걸을 생각을 해 두는 남자. 황태자는 이후 그냥 대신으로 임명했으면 작은 혼란으로 끝날 일을 더 큰 혼란으로 맞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