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진심입니다.]
“제국의 국력을 키운다니……. 그게 마왕을 잡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아닌가? 암만 생각해 봐도 이 전쟁 중에?”
[소수의 인원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하는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는 거대한 힘을 운용해서 마족들을 이겨 내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쉬울 거라는 보장은…….”
[오히려 지금이 더 쉽지요. 눈,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위기가 눈앞에 있으니 말이죠. 사람들을 설득하고 뭉치게 하기 아주 쉬울 겁니다.]
마족이라고 하는 인류의 공적이 제국의 수도를 두드리고 있는 현 상황. 오늘만 해도 커다란 위기였고, 베오날드와 신성국의 군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레기온 경은 베오날드의 의견에 일부 동감하면서도 지금 사람들을 뭉치게 한다고 한들 하루에 수십,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이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헤쳐 나갈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쉽다곤 해도 상대적인 거지. 정치와 협력, 그리고 군사를 더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게다가…….”
[압니다. 하지만 해 봐야지요. 다른 방법이 없다면… 여신께 선택받은 제게 맡겨 주시는 건 어떠신지요.]
“으으음… 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네.”
‘그러시겠지. 결국은 황실 기사단장. 정치 문제로 들어가면 알아서 물러나는군.’
정치에 아예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뼛속까지 무인. 국가 운영이나 중대사가 되면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할 수 있고 없고가 아니라 판단하는 게 불가능한 일. 결국은 황실의 주인에게 그 해답이 존재했다.
“그러니 현재 폐하의 대리를 맡은 황태자 전하께 가세. 일단… 오늘은 살아남은 듯하니 말이야.”
[그러지요.]
베오날드는 레기온 경을 따라서 성벽을 내려와 성내로 들어가 궁전으로 향한다.
황제 대리를 맡은 황태자 조엔 칼레움은 본래 성벽에서 지휘를 하면서 같이 싸웠지만, 성벽이 무너진 순간 만일을 대비해서 미리 내려와 황궁으로 돌아가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레, 레기온 경! 무사하셨군요.”
“전령을 보냈을 텐데 왜 그런 반응인가? 내가 죽을 줄 알았나?”
“혹시나 싶어서… 정말 걱정했습니다, 레기온 경!”
“와아아아아!”
황궁에 다다르자 황궁을 지키는 기사들이 레기온 경을 보고 일제히 환호하거나 안도했다.
마족이 성벽을 뚫은 시점에서 이미 죽음과 제국의 마지막을 각오했을 정도라 전령이 온 것만으론 안도할 수 없었는데, 진짜 레기온 경이 돌아옴으로 인해 승리했다는 것이 현실로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뒤의 저 거대한 친구는?”
“신성국에서 온 용사… 라는군. 그의 활약 덕분에 우리는 수도를 지킬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네. 매우 막강한 친구더군.”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성내로 들어가시려면 무장을 해제하셔야 하는데, 갑옷을 벗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황궁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베오날드에게 물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에게 성검을 검집째로 내밀며 당당히 말한다.
[거절하지. 아쉽지만… 이런 모습과 성검이 아니면 누구도 날 용사로 봐 주지 않을 테니 말이지. 그리고 나는 엄연히 세상을 구할 ‘용사’라는 상황과 임무만을 중시하고 싶다. 그러니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개인을 버리고자 하니 이대로 날 들여보내라.]
“으으음… 으으으으으음… 어, 어쩌죠? 레기온 경?”
“일단 오늘은 내가 대동하고 있으니 허락하도록 하게. 매우 중요한 논의를 황태자 전하와 해야 하니 말이야. 물론 그 무장 상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와 거리를 더 멀리 두고 제약을 더할 걸세. 알았나?”
끄덕.
베오날드는 레기온 경의 중재에 찬성하며 그 타협점을 준수하기로 한다.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칼레움 제국의 황궁을 들여다보며 베오날드는 레기온 경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여러 곳을 넘어서 드디어 알현실에 도착했다.
황실 기사가 먼저 용사와 레기온 경이 온 것을 알렸기에 이미 황제의 자리엔 황태자 조엔 칼레움과 이 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수많은 귀족들이 양쪽에 줄지어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 레기온 경이 무사하군.”
“정말 다행이야. 암…….”
“그나저나 뒤의 저 친구는 용사라고 했던가?”
“상당히… 크군. 거인? 아니면 혹시 볼레아 출신인가?”
“음, 갑옷이 화려한 게 예술품 같기도 한데… 믿을 수 있나?”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 같군.’
뉴 페이스의 등장에 웅성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베오날드가 지긋지긋해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눈빛이었다.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득이 될 것인가를 따지는 저 추잡한 눈빛들. 베오날드가 이 마갑주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기 싫은 것은 그들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다는 점도 한몫했다.
‘어쨌든 지금은 젊은 몸이고, 저 발데리안 가문의 가신이라는 입장이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기껏 여신에게서 받은 ‘용사’라는 간판에 여러 때가 묻고 자신을 얕보게 될 바엔 이 답답한 갑옷 안에서 움직이는 게 훨씬 나을 정도였다.
아무튼 알현실에 도착한 베오날드는 일단 레기온 경을 따라서 거리를 둔 채로 그대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 신 레기온, 황실 기사단장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도착했나이다. 그리고 여기 이자는 성벽이 무너져 바람 앞의 촛불이었던 제국 수도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신성국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용사이옵니다.”
“정말 다행이오, 레기온 경. 그나저나 용사라니, 그게 정말 사실이란 말이오?”
“일단 ‘신성국’의 인증을 받은 자이니 틀림없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게다가 그가 없었으면 성벽에 쳐들어온 마족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복구해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 그런가……? 정말 감사하다고 해야겠군. 고개를 들어라, 용사여.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를 대신하여 감사를 전하겠네.”
드디어 고개를 드는 것을 허락받은 베오날드는 조심스럽게 황태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 황제인 제라도 칼레움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반면, 저 조엔 칼레움이라는 자는 상당히 사람 냄새가 나긴 했지만 너무 범용해 보였다.
‘…장자라서 된 건 있지만 너무 무던해 보이는군. 일단 정보가 맞는다는 건데…….’
어차피 제국 황실과 교섭을 해야 하기에 베오날드는 오면서 미리 여러 곳에서 전갈과 우편, 그리고 상인에게 소문을 모아서 황태자에 대한 평가와 평판을 알아 둔 것이었다.
조엔 칼레움. 제라도 칼레움과 황후 사이에서 나온 첫 번째 아들로 정통성과 서열은 최고였다.
그다음으론 이제 그의 능력에 대해서 들여다봐야 했는데, 인상은 수수하면서 무던한 남자로 보였고, 황태자로서의 삶 또한 무던했다고 하였다.
특별히 어느 분야에서 특출한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고, 제라도 칼레움 황제가 시키는 무예, 공부, 행정 등등… 모든 분야에서 일정 이상을 해냈으며 성격도 무던해서 어떤 귀족과도 사이가 나쁘거나 정치적으로 앙금을 만들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 그야말로 무난한 황제감이군.’
아마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정통성과 서열이 받쳐 주는 데다 저 기질과 어디 하나 모자라지 않은 능력으로 충분히 치세의 성군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지만, 지금 같은 비상시에는 저 무던한 성격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던하다는 것은 곧 신중할 순 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부작용과 단점에 집중하게 되는 스타일이라서 오히려 일을 망칠 수도 있는 타입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기도 하지.’
“이보게,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전하께, 아까 자네가 하려던 이야기를 자세히 해 보게.”
[아, 예.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감사 인사는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으나 전 용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저입니다. 오직 그 사명을 위한 용사로서 황태자 전하께 감히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해도 되겠습니까?]
황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법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한 베오날드의 예법이었다.
아무튼 황태자는 베오날드의 제안에 대해 생각하더니 잠시 후 그의 발언을 허가했다.
허가받은 베오날드는 예를 표하면서 일어나 성검을 검집째로 들어 올리면서 뽑아 빛을 뿜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우선 다들 이 빛을 잘 보십시오. 이것은 여신에게서 선택받은 증거인 성검의 빛. 하나 고작해야 하나의 검일 뿐, 저 또한 용사이나 그저 단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무리 빛을 비춘다고 한들 이 황궁의 알현실 하나를 채우는 게 전부죠. 예, 용사로서 검을 휘두르는 무인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군. 그럼 무슨 제안을 하려는 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전하, 절 제국의 ‘대신’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이 검 한 자루보다 저에겐 펜 한 자루가 더 필요합니다. 법을 정하고, 질서를 움직이고, 병사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예, 말도 안 됩니다. 하나 저는 ‘용사’입니다. 지금 전 ‘개인’으로서의 절 버렸습니다. 오직 여신께서 내린 숭고한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상태입니다. 제 목적은 오직 하나, 마족들을 섬멸하고 인류를 지키는 것. 그것을 위해 저는 이 ‘제국’을 빌리고자 합니다.]
“꿀꺽…….”
“이 무슨 미친 소리를……!”
“아무리 해도 심한 말 아닌가?”
“그냥 황제 자리를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웅성웅성…….
너무나 충격적인 발언이었기에 그것을 듣는 귀족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를 데려온 레기온 경 또한 이곳이 알현실만 아니었으면 허리에 있는 검을 뽑아서 바로 베오날드에게 휘둘렀을 듯한 무서운 살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베오날드는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짬밥은 이제 100년이 넘어갈 정도였기에 이런 반응쯤은 그냥 일상적인 것으로 넘길 수 있는 레벨이었다.
“으으음… 으으음…….”
[물론 거절하신다면 저는 일개 ‘용사’로서 여신의 뜻에 따라서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마왕 토벌을 하러 가라고 하신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여신이 수여한 성검보다도 제 손에 펜이 들어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게. 우선은… 먼 길 오느라 수고했으니 쉬고 있게나. 대답은… 내일 아침에 주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조엔 칼레움 황태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우선은 베오날드를 자리에서 물리고 이 알현의 자리를 끝내고자 했다.
혼자서 결단을 내리기엔 너무나 무거운 사안이었기 때문에 주변 가신들과 레기온 경을 포함한 이들과 상의해서 결정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행동이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인사 같은 경우에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베오날드는 잠정적으로 그가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원래 무던한 놈들은 보수적이니까, 겁쟁이스러운 선택지를 고를 확률이 높지.’
이미 그의 태도 하나로 내일 들어올 대답이 머릿속에 선한 베오날드였다.
정치란 결국 수읽기의 싸움. 베오날드는 이미 황태자의 수를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그는 아마 용사가 자신이 거절할 것을 상정해서 더 앞서서 움직일 거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마갑주로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이 안의 인물이 누구인지 가늠하기도 힘들 테니 말이지.’
눈이나 얼굴, 목소리 어느 것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대를 가늠하려면 말과 행동만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래서 베오날드는 ‘용사’의 입장으로서도 이런 정치적 싸움과 머리싸움에서도 우위를 가져가기 위해서 이 마갑주 차림과 성검을 사용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황궁을 나가자마자 그 앞선 판단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다음 작전을 실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