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역시 나는… 이런 게 체질에 맞는군.’
바닥에 굴러다니는 메데란네 주교의 시체를 보면서 베오날드는 시시한 감상을 내뱉는다.
아까 전 뿜어져 나오던 투기와 지금 그녀가 입은 옷을 봤을 때, 암흑신교 중에서도 꽤 고위 간부급으로 보이던 그녀를 잡는 데 보통은 치열한 전투를 상상하곤 하겠지만 베오날드는 간단하게 성검을 미끼로 함정을 판 것이었다.
‘미끼가 아주 잘 통해서 좋군. 게다가 이런 기능도 있으니 부담도 없지.’
슉! 탁!
베오날드가 성검을 향해서 손을 뻗자, 성검은 흔들리다가 베오날드를 향해 날아와서 저절로 그의 손에 쥐여졌다.
성검의 기능에 대해서 파헤치려고 애를 쓴 그는 이런 능력까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에 적절하게 미끼로 사용한 것이었다.
아무튼 베오날드는 성검을 회수한 뒤, 곧바로 메데란네 주교의 시신을 뒤지기 시작했다.
‘음… 아까 전 옷차림이나 투기로 봐선 꽤 고위 간부 같아 보이는데, 뭔가 있으려나. 오… 있군, 있어.’
그녀의 시신을 뒤지자, 암흑신의 문양이 그려진 황동으로 된 부적부터 시작해서 여러 물건들이 술술 나왔다.
인간의 가죽으로 만든 커버로 싸인 책, 주요 암흑신교의 간부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서찰, 도장을 찍는 용도인 인장, 역십자로 된 묵주, 분노의 마왕에 관한 유물 등등… 베오날드의 예상대로 알찬 물건들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은 수확이군.”
물건들을 챙긴 베오날드는 메데란네 주교가 나온 통로를 바라보며 다른 쥐새끼들이 더 나오지 않나 살펴보았다.
이 도시를 무너뜨리기 위해 계획을 짤 때, 당연히 그는 이 암흑신교의 본거지를 잘 알아 두고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을 한 번에 없애기 위해서 남겨 둔 것이었다.
마정석의 잔류 마력이 적은 것을 이용해서 폭발의 위력을 조절한 덕분에 놈들이 의심하지 않게 이 주변만 살짝 터뜨리고, 암흑신의 가호랍시고 안전한 거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덫을 놓은 것이었다.
‘이제 마음 놓고 제국 수도로 갈 수 있겠군. 바퀴벌레들도 이걸로 청소했으니 말이야.’
북쪽을 바라보며 베오날드는 이제 신성국도 정리되었으니 남은 건 크멜 가문의 지원과 함께 제국 수도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리를 나섰다.
***
며칠 뒤, 드디어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성전군’을 결성하고, 발데리안 백작가에서 지원에 대한 답장이 도착함과 동시에 제국으로 출발, 1만의 군대는 시시각각으로 보급을 받으면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베오날드는 군대의 선두에서 신전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가면서 부족한 물자 및 필요한 것들을 살피고, 동시에 발데리안 백작가와 북쪽에서 온 전갈을 보며 현 상황을 파악했다.
“제국 수도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발데리안 가문에서 지원이 와서 망정이지, 사상자는 끝없이 늘어나는 한편 서서히 제국의 힘이 빠진다고 생각한 건지 마족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서둘러 가야겠군… 라곤 하지만, 무리해서 좋을 건 없으니……. 아, 혹시 놈들이 따로 병력을 우회한다거나 그러진 않던가?”
“딱히 그런 모습을 보이진 않고 있습니다. 그저… 파괴의 화신처럼 오직 제국 성벽의 북쪽만 넘으려고 거기에 병력을 밀어 넣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로지 전진… 전진으로만 일관하는데, 그게… 그게 너무나 무섭습니다.”
‘전략이라는 걸 생각 안 하는 건가?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세계는 멸망했겠지.’
일말의 다행인 점은 단순무식하게 정면 싸움만 해 주는 마족들의 공세. 그나마 그 덕분에 제국 수도는 무지막지한 이 공세를 받고도 버텨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북쪽 문만 공성으로 두드리는 통에 그쪽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서 막아 내면 되니 말이다.
“크멜 가문은 어떻게 되었나? 그쪽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나?”
“예? 아직 연락상으로는 거기도 버티기 힘들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아니, 볼레아랑 크멜 가문에 작은 선물을 보내 줬었거든.”
“선물 말입니까?”
“그래, 선물이지.”
제국 수도를 공격한 마족들과 다르게 볼레아 왕국은 비록 야만인들이지만 암흑신교에 협력하는 인간 세력이라는 게 문제였다.
지금은 크멜 가문이라는 방파제가 있어서 막혀 있지만 만약 그들이 밀리게 되면 놈들이 약탈로 제국 전역을 노릴 게 분명하기에 베오날드는 그쪽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볼레아 왕국을 견제할 수단과 추가로 크멜 가문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보험이 필요했다.
‘음, 미리 손을 써 둔 게… 슬슬 효과를 발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500년 전, 통일 제국 섭정 시절의 베오날드는 다이나 가문의 경우처럼 놈들이 볼레아 가문이었을 시절의 볼레아 놈들에게서 빼앗은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나 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놈들에겐 아마 지금 이 시대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유물이었는데, 베오날드는 그것을 가지고 놈들을 처리할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이었다.
‘지금 내 일정상… 거기까지 가서 뭘 할 처지는 아니니까 말이지. 효과가 터지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고 말이지.’
최대한 빠르게 조치한 것임에도 지금 신성국의 문제 해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크멜 가문이 분전해 주는 것과 볼레아 왕국에 전해진 자신의 선물이 효과가 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곤 여신께서 자신을 돌본다면 아마 그들도 돌볼 것이라 믿으며, 행군 속도를 조금 더 재촉했다.
***
크멜 영지, 볼레아 왕국 국경.
나무와 숲이 가득한 크멜 영지 속에 세워진 성에서는 오늘도 공성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단단히 무장한 크멜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이 상대하는 것은 거의 반나체 차림으로 짐승 가죽을 걸친 채 무기 하나 혹은 나무 방패 하나만 들고 달려오는 야만족들이었다.
사실상 비무장 상태에 무모한 공성전을 하고 있어서 상대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어찌 된 일인지 보통 인간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생명력도 강해서 마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젠장! 여전히 지랄 같은 놈들이군! 제발 좀 죽어라!”
“크억! 전사의 신께서… 우릴… 돌보신다.”
그렇기에 이런 전장에선 ‘기사’의 가치가 압도적이다.
강한 피부와 근력을 가진 이 볼레아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오러의 힘으로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사’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크멜 가문은 ‘기사’들의 육성과 가문 내에서 더 강한 무력을 가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고, 기사 명문으로서 제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 비겁한 겁쟁이들아! 다 죽여 주마아아아!”
“젠장! 놈들의 전사장이다! 기사님들을 불러라!”
“으아아! 피가! 피 보라가 몰아친다!”
하나 볼레아 왕국의 인간도 엄연히 인간. 야만적이지만 무(武)를 익히고 싸움법 속에서 ‘오러’를 스스로 깨우친 ‘천연 기사’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볼레아 왕국엔 기사라는 존재가 없었기에 그들은 ‘오러’를 깨우친 전사를 ‘전사장’ 혹은 ‘마왕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불렀다.
“크하하하핫! 하아하하하하하하하핫! 누가 감히 위대한 볼레아의 혈통이자 전사장인 카르탄 볼레아를 상대하겠느냐!”
“젠장! 볼레아 직계인가? 기어이 놈이…….”
“멍청한 놈, 공명심에 눈이 멀어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크멜 가문의 기사들은 능숙하게 몰려와서 겁 없이 성벽 위로 뛰어 올라온 ‘전사장’을 둘러쌌다.
기사의 신체 능력이라면 능히 성벽 위를 오르겠지만, 성벽이 괜히 성벽이겠는가?
다른 병력의 지원 없이 이렇게 포위당해서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고, 크멜 가문의 기사들에게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크멜 가문을 우습게 보지 마라!”
“크하하하! 우스운 걸 우습다고 하는 거지! 죽어라!”
하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 성벽 위로 올라올 정도로 무력에 자신이 있는 자라는 뜻도 된다.
카르탄 볼레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가 거대한 도끼를 엄청난 속도로 휘두르자 붉은 오러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하는데, 그 압력과 위력에 웬만한 강적과 싸워 온 크멜 가문의 기사들도 움츠러들 정도였다.
“뭐야, 이건?”
“이 정도 오러는… 공작님… 아니, 설마 그 이상이라고?”
“크하하하! 뭣들 하는 거냐? 굼벵이 같으니라고! 가만히 있으면 내 손에 목이 날아갈 거다!”
“제, 제길! 으아아아악!”
거구에 거대한 도끼를 쓴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끌어 올린 오러의 위력으로 성벽 위를 휩쓸기 시작하는 카르탄 볼레아였다.
그의 붉은 오러는 마치 생명력을 불태워서 생기는 불꽃처럼 뜨겁고 화려하게 사방으로 몰아쳤는데, 크멜 가문의 기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흠… 기이한 놈이 나타났구나. 야만적으로 싸우면서 무위라곤 없는 볼레아에 저 정도의 전사가 있을 줄이야.”
“고, 공작님!”
“하나 무기를 휘두르는 모양새도 그렇고, 난리 치는 모습도 그렇고… 딱 봐도 본인이 수련해서 깨달아 얻은 힘은 아니군. 과연… 저 도끼인가?”
한참 성 중앙부에서 군을 지휘하던 크멜 공작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카르탄 볼레아를 보면서 읽어 내듯 판별하기 시작했고, 금방 그가 굉장한 무력을 가진 것은 맞지만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든 거대한 도끼,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 거대한 도끼에서 특히나 많은 오러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도끼 말입니까?”
“그래, 아마 마도구이거나… 유물이겠지. 자세히 보고 오러의 흐름을 느끼면 알게 된다. 한데, 저게 그냥 오러의 힘을 끌어 올려 주는 건 아닌 걸로 보이는데… 아, 그렇군.”
크멜 공작은 예리한 눈썰미로 그가 휘두르는 무기에 대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파악한다.
그가 휘두르는 도끼날에 맺힌 피와 낀 살점이 스윽 하고 도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즉, 저 도끼는 적의 피와 살점을 흡수함으로써 배를 채우고, 대신 싸우는 주인에게 힘을 제공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흐음, 악마의 무기 같은 건가?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났을꼬? 분명 볼레아 왕국은 이미 한참 전에 야만 부족화되었고, 우리가 막고 있는 한 저런 마도구를 얻을 방법이 없을 텐데 말이지.”
“암흑신의 수하들이 제공한 게 아닐는지요?”
“나름 그놈들도 힘에 미친 자들이 많고, ‘분노의 마왕’의 수하들일 텐데 저런 좋은 무구를 그들에게 넘긴다고? 으음…….”
“그러면 발굴이 아닐는지요.”
“발굴할 여력과 지능이 있는 놈들도 아닌데 말이지. 흐으으으음… 대체 어디서 누가 줬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이대로 두면 위험하니 슬슬 내가 나서야겠군.”
중급, 상급 기사들이 다수가 붙었음에도 카르탄 볼레아는 더욱 난폭하게 날뛰면서 크멜 가문의 병사와 기사들의 희생을 더 많이 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성하는 인원과 기사의 공백이 커졌기에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크멜 공작이 직접 검을 잡고 나서려는 찰나, 전령 하나가 급히 성벽 위로 올라와서 그에게 다가와 전갈을 넘겼다.
“공작님! 공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전갈? 어디서? 누구한테 온 거냐? 지금은 그쪽보다 이쪽이…….”
“발데리안 가문의 베오날드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전갈뿐만이 아니라 공작님에게… 공작님에게 반드시 전해 드릴 선물이 있다고 합니다. 매우 유용할 거라고…….”
“선물? 그 베오날드 놈이?”
무시하고 전장으로 뛰어들려던 크멜 공작은 베오날드라는 말에 민감히 반응했고, 그가 보낸 전갈과 선물이 신경 쓰인 그는 일단 다른 기사들에게 지원을 맡기고 급히 전령을 따라 성벽을 내려가서 ‘선물’을 확인하고자 했고, 내려가니 커다란 상자를 실은 마차가 여러 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건… 뭔가? 군량? 무기? 물자인 건가?”
“아뇨. 그런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크멜 가문에 직접 오지 못해서 죄송하다면서… 공작님과 핵심 기사분들에게 소소한 도움이 되고자 보낸 물건입니다. 그… 소문으로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가르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기사 전용의 마도구, ‘마갑주’와 ‘마갑주 전용 무구’ 총 5벌. 이제 상자를 열어 주셔도 됩니다!”
전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인부들과 이 물건을 전하기 위해 호위했던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들에게 상자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이 신속하게 상자를 봉인 해제하자 안에선 크멜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녹색과 검정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마갑주 5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오…….”
“자세한 내용과 사용 방법은 여기 편지에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하나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기에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서 갑옷처럼 입으시고 시동 키를 꽂은 다음 오러를 흘려 보내면 작동할 거고… 그다음은 현 세대 최고의 무인인 크멜 공작님이라면 능히 쉽게 다루실 거라고 합니다.”
“하! 좋은 평가를 내려 줬군. 좋아, 그 친구의 성의를 받도록 하지.”
일단 크멜 공작도 소문으로 베오날드가 신기한 것을 만들어서 전쟁에서 이긴 것을 알기에 기이하게 생각하면서도 냅다 마갑주를 착용했다.
그리고 전령이 말한 대로 시동 키를 꽂은 다음 오러를 흘려 보내자, 육중함이 느껴졌던 갑주는 점점 가볍게 움직이면서 그를 보조했고, 동시에 맨몸보다도 훨씬 가볍고 쉽게 움직여지며 자신이 살짝 흘려 사용하는 오러보다 더 많은 오러의 힘이 자신의 몸과 갑옷 주변을 도는 것을 느낀다.
‘오오… 그렇군. 그 친구가 아주 재미있는 걸 만들었어.’
[공작님! 여기! 무구! 검을 챙겨 가십시오. 일반 검은 마갑주를 입은 상태에서 쓰시기 힘들 겁니다!]
[알았네. 바로 가져가도록 하지. 허허! 이거 아주 즐겁겠군!]
철컥!
그리하여 마갑주 전용 사이즈의 검을 받은 크멜 공작은 그것을 들고 바로 뛰어오르는데,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듯 순식간에 성벽의 높이보다 훨씬 높게 뛰어올라 마치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주변에 있던 병사와 기사들은 모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고, 크멜 공작 본인 또한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이 증폭 능력에 기겁했다.
‘허! 기가 막히는군. 세상에… 그저 성벽 위로 올라가려 했는데, 이 정도까지 날아오를 줄이야.’
[크하하하하하핫!]
‘아무튼… 그 친구가 아주 재미있는 걸 줬으니 잘 써 주지.’
깜짝 놀란 크멜 공작이었지만 내려가면서 성벽 위에서 여전히 난동을 부리는 카르탄 볼레아를 발견하자 금방 진정하고는 우선 저 무뢰배부터 제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거대한 마갑주 전용 검에 오러를 실은 다음 허공을 발로 차서 착지 위치를 조정하며 그대로 카르탄 볼레아를 향해 낙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