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약 2주 뒤.
신성국, 중앙 대신전.
흔히 교국이라 불리는 신성국의 중심에 위치한 대신전. 화려한 장식과 조각, 스테인드글라스에 장식된 여신의 모습이 가득한 이곳 홀에는 현재 교황을 비롯해 모일 수 있는 모든 사제, 성기사들이 전부 모여서 한참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그들이 바라고 바라던 ‘성전(聖戰)’. 북쪽에서 드디어 사악한 악이 강림하여 내려오고 있는 상황으로, 당연히 나서야 한다고 진작 논의가 되었으나 갑자기 내부에서 다른 의견이 대두해서 진행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문제가 무엇이란 말이오? 바라던 때가 드디어 왔는데! 출진을 미루자고 하니!”
“교황 성하, 물론 사악을 멸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하나 교단의 미래 또한 생각하셔야지 않겠사옵니까? 이대로 가서 제국을 구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입니다만, 그 정성에 실익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좀 더… 아주 조금만 더 미루자고 하는 것이옵니다.”
“그런 것이라면 미리 출동한 다음 적절한 시기에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그러면 너무 속이 보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얼마 전에는 교황 성하께서도 분명…….”
그들의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악신’의 세력과의 싸움이었기에 미쳤다고 반대하는 자는 없었지만, 내부에서는 언제 출진할 것이냐는 것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는 중이었다.
교단의 영향력과 이익을 위해서냐? 아니면 순수한 정의와 신의 뜻을 위해서냐?
이 두 가지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뭐라고 했나?”
“아니, 성하!”
“허허…….”
그리고 교황은 겉으로는 순수하게 정의와 신의 뜻을 위해서인 척하고 있었지만, 내심은 교단의 영향력과 이익을 위하는 쪽에 마음이 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말로는 순수한 정의를 위해 당장이라도 성전을 행하는 것을 지지하는 척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익을 우선시하는 쪽의 말도 들어 주자는 식으로 조율하면서 계속 성전의 진행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어둡고 어두운 밤이야말로 빛이 더욱 환한 법. 떨어진 교단의 위신과 이 신성국의 영광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좀 더 때를 봐야 하는 법이지. 더 큰… 빛과 영광을 위해서… 눈을 감을 수도 있는 법.’
겉으론 인자한 노인의 얼굴을 한 그의 속에서는 구렁이를 삼킨 것 같은 검은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보면서 열띤 논의를 벌이는 성기사와 신관들 사이에 있는 한 여성 신관은 흐뭇한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엔 여러 신관과 성기사들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얼굴 어딘가에 그늘이 존재하는 자들로 이 신성한 홀의 분위기에 살짝 어긋난 느낌이 드는 자들이었다.
“후후후, 저게 여신교 신앙의 정점에 앉아 그것을 대표하는 교황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지 않니?”
“맞습니다, 메데란네 주교님. 완전히 현혹된 것도 모르고 지금 자신은 순수한 여신교의 종자라 생각하고 있겠죠?”
“저렇게 만드는 데 엄청 오랫동안 공을 들였지만 말이죠. 낄낄.”
“게다가 혹시 몰라서 언제든 저희 쪽으로 정신 지배도 할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작업하느라 힘들었죠.”
이 안에서 멀쩡히 신관과 성기사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암흑신교의 사제와 암흑 기사들이었다.
약 500년 전, 베오날드 공작의 멸망 이후 혼란의 시기에 몰래 하나둘씩 이 신성국에 들어오고 또 교단에 잠입한 자들이었다.
잠입한 그들은 세대와 세대를 넘어가면서 그 정체를 더욱 숨기고 암흑신과 마왕을 만족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며 왔고, 드디어 지금 세대의 교황에게 영향을 끼치게 될 정도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노이멀 총리가 실패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메데란네 주교님.”
“난 애초부터 그 입만 산 하프엘프 년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여간 허풍만 가득해 가지곤 우리 협력을 거절하고 고집을 피우니 그 꼴이 나는 게 아니더냐?”
“그리고 그 뒤로 발데리안 영지에 있는 형제들에게서 정기 연락이 끊겼습니다.”
“정기 연락이 끊겼다고? 으으음… 뭐, 거기도 전쟁 상황에 혼란스러울 테니 어쩔 수 없겠지. 전서구든 파발이든… 동원될 여력이 없으니 말이야.”
“그렇겠지요.”
노이멀 총리의 패전 소식은 가르칸 군대 안에 있는 암흑신교 사제들이 알려 주었던 반면 발데리안 방면에서 암약하고 있는 암흑신교 끄나풀들의 연락은 없었지만 지난 500년간 자신들의 암약을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고, 이런 사소한 이슈나 문제는 자주 있던 일이었기에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촌극을 보며 회의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결국 발데리안이 가르칸의 노이멀 총리를 무찌른 상황이라면… 그쪽에서 수도를 지원하게 되면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그 망할 하프엘프 년이 무능하다는 거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조금 더 이 대륙에 분노의 불길이 타들어 갈 뿐이고, 그년이 죽은 걸로 인해서 이제 가르칸도 불태울 수 있게 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문제없지. 아무 문제 없어.”
“그렇군요. 한데… 어떻게 발데리안에서 노이멀 총리를 무찌른 걸까요? 노이멀 총리 쪽에 숨어 있는 형제들에 의하면 자신들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던데…….”
“신경 쓸 거 없다. 패배자의 이유를 분석할 시간에 우리 할 일이나 잘해야…….”
[아, 아뢰옵니다! 여신께서 내리신 용사님이 강림하셨다고 합니다!]
한참 신관들은 신관들끼리, 암흑신관들은 음모의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는 가운데, 회의장에 충격적인 소식이 울려 퍼졌다.
‘용사 강림’. 너 나 할 거 없이 모두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면서 그 이야기를 전하러 온 신관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 신관은 숨을 헐떡이면서 빠르게 달려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차리면서 가져온 서찰을 그에게 내밀었다.
“호오오… 그것참 기이한 소식이로고…….”
“여기 서찰이옵니다, 교황 성하.”
“어디 보세나. 허허허.”
신관이 가져온 전갈을 보기 시작하는 교황. 메데란네 주교를 비롯한 암흑신교의 일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동요하면서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계의 위기 때마다 등장해 온 용사. 암흑신의 숙적이자 여신의 종이자 사도 격인 존재.
암흑신교의 입장에선 마왕과 같은 자였던 것이다.
“올 게 왔군요. 좀 더 있다가 나올 줄 알았는데…….”
“꿀꺽. 주교님…….”
“북부의 위협이 그만큼 크다는 거겠지. 어떤 의미에선 우리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들 긴장하지 마라. 이 세계의 멸망을 추구하는 분노의 마왕님이 있듯이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 땅의 발악일 뿐이다. 그리고 500년 전 우리는 그것에 한 번 방해를 받았지만, 결국엔 멸망으로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지. 그러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헛된 저항일 뿐 그분께서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태연히 말하며 동요하는 암흑신관들을 진정시키는 메데란네 주교였다.
하나 사실 그녀도 살짝 동요하곤 있었는데, 본래 500년 전에 마왕과 결전을 벌일 정도로 대단했던 자라고 들었으니 이곳에서 처리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신의 신탁과 선택을 받은 몸이니 교단에서의 영향력은 매우 클 것이기에 무언가 조치는 분명히 필요했다.
“일단은 진위 여부를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 다들… 그 내려온다는 ‘용사’라는 자가 진짜인지 확인부터 하고, 놈이 어떤 자인지 알아봐야 한다. 알았나? 다들 신성국으로 들어오는 즉시 놈의 인적 사항에 대해 판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메데란네 주교의 말에 조용히 있던 암흑신관들은 각자 흩어져서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교황은 전갈을 보면서 교단엔 상당히 호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허허허, 이거 썩 괜찮은 건수로군. 슬슬 ‘성전’을 선포하는 걸 막는 것도 힘들어지려는 차였는데, 용사라.’
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북쪽으로의 원정을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싶은 교황으로서는 최고의 핑계였다.
이미 생각한 것만으로 용사에 대한 검증과 시험만 해도 족히 수개월의 시간은 끌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음흉한 계획으로 미소가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가 봐도 용사를 찾은 것을 기뻐하는 표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허허, 이거 정말 여신님의 가호가 아닐 수 없군. 오시는 대로… 이곳으로 모시라고 전해라.”
“아, 알겠습니다.”
‘게다가 진짜든 아니든 용사라고 칭할 정도면 어느 정도 무력이 있을 테니, 우리 교단의 검으로써도 이용할 곳이 많으니… 아주 좋군. 아주 좋아. 누가 되었든 젊고 어린 애송이가 올 테니…….’
이렇든 저렇든 정치적으로 써먹기도 좋은 말이 하나 들어온다고 생각한 교황은 즐거워하면서 그가 오길 기대했다.
하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이번 용사는 과거의 전설이나 동화에서처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순진한 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능구렁이 같고, 쉽게 속지 않으면서도 의지는 굳건한 베오날드라는 것. 이런 점에서 보면 ‘여신’은 정말로 최적의 인재를 찾아 용사로 임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며칠 뒤, 신성국으로 향하는 가도.
제국 서쪽 끝에 있는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에서 신성국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제국을 가로질러서 가야 하는 만큼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베오날드는 그 시간을 동원해서 여러 작업을 하면서 마차로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흡! 하앗! 헙!”
특히 그가 중점적으로 하는 것은 역시 검술의 연마. 딸이 남겨 준 ‘노이멀 가문의 오의’를 완전히 숙련하는 것도 하는 것이었지만, 드디어 옛 통일 제국 황실 기사단의 검법도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무력은… 어떻게 되든 간에 필수이니까 말이지. 앞으로 싸울 것들은 그 ‘라미엘’이라는 망할 여자보다 훨씬 강할 테니까……!’
상대는 라라만큼이나 강한 적들과 마왕. 결국 그런 강적과 싸우거나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 이상으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 베오날드였다.
현재 그는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었기에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신성국에 도달하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고, 식사 혹은 수면 시간을 줄여 수련을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역시 무(武)란 어렵군. 하지만 지금은 어렵다고 가릴 때가 아니다.’
마왕 놈을 쳐부수기 위해서, 그리고 라라의 영혼을 돌려받든 아니면 다시 빼앗든 하기 위해서 자신은 힘이 필요했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모두 써야만 했다.
라라의 죽음 이전까지는 사실 내심으론 계약대로 되는 데까지만 하자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 베오날드에겐 순수하게 반드시 마왕을 족쳐야 한다는 신념과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날 증오해라. 그리고 날 뛰어넘으려고 해라! 그것이 너희의 운명이다! 크하하하하하!’
‘또… 그 망할 벨릭스 때가 떠오르는군.’
이토록 열의와 증오, 신념을 모두 모아서 의욕을 불태우며 자신을 단련하다 보니 역시 과거 벨릭스 폰 노이멀 아래에서 후계자 경쟁을 할 때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고, 그리고 결국 승리를 얻었던 그때의 경험.
기간으로 따지면 고작 10여 년 정도였지만, 그 기억은 한 번 죽고 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워낙 강렬했던 기억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아무튼 이번에도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으득!
베오날드는 이를 갈면서 벨릭스 때의 기억과 라라의 기억을 곱씹으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어느덧 가도의 끝에 있는 신성국 수도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신교의 본고장인 종교의 도시 국가. 교황이 지배하는 곳으로 500년 전 베노피스가 멸망한 뒤, 혼란기에 만들어졌다고 들은 곳이었다.
‘하나… 제대로 된 곳은 아니겠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빠질 것 같군.’
제대로 된 곳이었다면 이 ‘성검’도 그렇고, 자신 같은 인간에게 ‘용사’의 지위를 주거나 하지 않았을 여신이었다.
겉보기엔 새하얀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희망찬 종소리와 예배의 음성이 들려오는 신성한 곳이지만 내부로는 얼마나 엉망일지. 발데리안 영지의 신전에 암약해 있던 것처럼 암흑신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계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