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허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위엄 넘치는 포즈를 잡은 상태로 잠시 전쟁이 중지된 가르칸과 추격군 군대에서 사람이 오길 기다린 베오날드는 그들이 왔음에도 여전히 꼿꼿이 고개를 세운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온 이들 중 하나는 가르칸의 장군 플레임호거였고, 다른 쪽은 본래 남부의 귀족이었고, 영지가 가르칸에 의해 불타 버린 드발렌이라는 50대의 남작이었다.
“전쟁을 중지하라고 진작 전갈을 보냈을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중지하다니! 이대로 저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 건방진!”
“분명 발데리안 백작님의 이름으로 전갈이 보내졌을 텐데, 그것을 무시한다는 건 대귀족의 권위를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 잘 알 텐데?”
“하, 하지만…….”
“더는 긴말하지 않겠다. 전쟁을 중지시켜라. 우리에겐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해결된 일에 더 이상 힘 빼지 마라.”
더 이상 장난이니 위장이니 할 새가 없을 정도로 빠듯한 시간이었기에 베오날드는 이 이상 허튼소리를 하면 그냥 베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노려보았고, 드발렌이라는 귀족은 분명 자신보다 어린 베오날드에게 완전히 기가 눌려 버린 채로 그대로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된다.
뭔가 반항과 원망을 담아서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그의 기세와 위압감에 저항해선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말했기 때문이다.
“아, 알겠습니다.”
“좋아, 말이 통해서 좋군. 안 그랬으면 목을 떨어뜨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쪽 드워프, 네놈이 현재 가르칸 공화국의 부대를 대표하는 자가 확실한가? 우두머리가 아니면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니 말이야.”
“마, 맞습니다. 저는 가르칸의 장군, 플레임호거. 노이멀 총리님의 대리입니다.”
드발렌 남작의 건을 정리하고 난 뒤, 베오날드는 곧장 이곳에 온 드워프인 그가 총리 대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협정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온 협정서를 내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 협정서다. 제안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우리 요구는 이 시점부터 무사 귀환 보장, 향후 15년간 상호 불가침 조약, 3개월 단위의 정기 사절 파견, 남부 영토에서 철수를 비롯해서 소소한 피해 보상금 요구 및 이것저것 딱 이 정도다. 문제 있나? 있어도 받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그… 예.”
“아, 그리고 혹시나 조약을 어길 시에는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는 것도 미리 알려 두지. 저기 저 친구의 증오와 분노를 그대로 돌려받게 될 것이며, 이제 이 대륙에 이종족이라는 말이 더는 필요 없도록 만들어 주지.”
“아아, 알겠습니다.”
플레임호거 장군은 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기세가 어딘가 노이멀 총리와 닮았다는 생각을 머리 한구석으로 하며 베오날드의 제안에 사인을 하고,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조치를 마친 다음 서류는 각각 나누어 가져갔고, 그대로 베오날드는 드발렌 남작에게 협정 서류를 보여 주면서 합의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하나 그는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듯 베오날드를 향해 노성을 터뜨리며 반발했다.
“지금 저들을 보내도 좋은 겁니까? 후환이 커질까 두렵습니다. 못해도 장군 두셋은 더 죽여야…….”
“아니, 어차피 노이멀 총리라는 대어를 잡았는데 더 욕심내서 좋을 게 없지. 오히려 노이멀 총리만 딱 죽고, 장군들은 살아 돌아가는 게 베스트다. 놈들은 돌아가면 이제 치열하게 정치 싸움하기 딱 좋으니 말이야. 가르칸 공화국이 어떻게 정치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않나?”
“음, 하긴 저기는 우리와 다르게 각 종족별 대표끼리 당과 의회를 이루어서 선거로 정치한다고 했으니…….”
“게다가 노이멀 총리에게 후계자가 있단 말도 못 들었고 말이지.”
인간보다 훨씬 장수하는 하프엘프의 특성도 있었지만 아마 노이멀 총리는 부친의 복수만을 생각했고, 그 업을 누구에게 물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결혼은커녕 후계자를 선택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왕과 계약을 한 그녀가 가진 진짜 목적을 공유하거나 진심으로 뒤를 맡길 사람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말이다.
“그러니 돌아가면 다시… 총리 선거부터 시작해서 종족별로 뒤죽박죽 싸움에 들어갈 거다. 게다가 지금 저기 있는 놈들 다 전쟁을 하자는 파벌인데, 개같이 깨지고 돌아가면 체면이 설까? 후후후, 뒤처리를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겠나?”
“그렇겠군요.”
“그걸 위해서라도 놈들은 이 협정을 일정 기간은 지켜 나가야 할 거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는 제국의 위기를 넘기고, 더 멀리, 더 크게 복구해 나가서 다시는 놈들이 이 제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 철수하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이제 수도로 가야겠군.’
가르칸의 문제를 해결한 베오날드는 곧바로 기수를 돌려서 다시 발데리안 영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정을 보면서 동시에 본격적으로 제국 수도의 소식을 모아서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한데 일을 진행하던 중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바로 전투 마법사들이 수도 지원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건 무슨 일이지?”
“…발데리안 영지는 그래도 유물도 있고 마갑주를 개발하는 곳도 있기도 하고, 다이나 왕국이랑 가까운 편이라서 다들 싸워서 지키는 것을 납득했지만 수도 원정은 다들 싫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 하긴 그들은 전투 마법사들이긴 하지만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용병이 아니니 말이지.”
물론 용병 일도 하곤 했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는 결국 마탑 출신들답게 마법 연구 쪽에 무게가 실리는 그들이다.
저번 전쟁도 이곳과 다이나 왕국이 가깝다는 점을 포함해서 베오날드의 제안과 보상에 따른 것이지, 제국에 대한 애국심 같은 것이 없는 그들이 본격적인 제국의 싸움에 몸담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일하도록 해야겠군.”
“강요… 안 하시는 겁니까?”
“정말 필요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 친구들이 수고해 준 것도 그렇고, 쉬게 해 줘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거든. 게다가 마법사 인력은 꼭 여기만 있는 게 아니고, 마갑주 생산을 더 하려면 역시 여기서 일해 줘야 하니까.”
“…그렇다는 건?”
“즉, 애초에 갈 필요가 없는… 수도에 가지 않겠다는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여기에서 마갑주 생산을 더 열심히 하라고 교섭할 수 있게 된 거지. 후후후후.”
“아… 심하네요, 선조님.”
“이게 귀족의 모범이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서 유리한 점을 살리고, 이득이 쌓이는 운영을 하는 것. 그러면서 더 부유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귀족의 모범이다.
지금처럼 체면도 세우고, 상대도 좋아하니 뭘 해도 이득인 상황을 만드는 것이 모든 상황 중 최고의 상황이었다.
“물론 연구비와 유물, 자료 제공은 약속대로 할 예정이다. 그건 당연한 거니 말이지.”
“예.”
“아무튼… 전투 마법사들에게는 ‘그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도 원정을 폐지하기로 했다.’라고 그렇게 전해 다오. 더 자세한 말은 하지 말고 말이지.”
“알겠습니다, 선조님.”
“자, 그러면 북쪽 상황은… 어떨지 봐야겠군. 흐으음… 이거 참…….”
보고서를 보면서 베오날드는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원 물자를 보냈음에도 북쪽의 상황은 심각함 그 자체였다.
잘 막고 있긴 했지만 병력의 소모가 너무 크다 보니 이젠 정규 병력만으로 모자라서 연령에 상관없이 중장년, 청소년까지 동원하는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마족들의 공세를 막아 내는 것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한데 이상하군. 교국은 뭐 하고 있지? 백날 북벌 어쩌고 했으면서… 우리가 전쟁할 동안이라면 충분히 지원을 보내야 했을 텐데?”
“아, 그거 이상하군요.”
“뭐, 이유는 대강 알 것 같지만 말이야.”
교국. 여신교의 중심지이자 교황이 거주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며 성지를 수호하는 나라.
그동안 제국과 여러 곳에 계속해서 북쪽의 마족을 토벌하자면서 난리를 치던 자들이라면 지금 마족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온 이 시점에 역으로 단결해서 올라가 이미 지원을 하고도 남을 상황인데, 조용하니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제국 수도에선 이미 지원을 보냈을 거고… 이거 딱 봐도 무시하고 있는 거군.”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내가 직접 가서 다 뜯어고쳐야지. 끄으으응… 아르젠, 여기는 너에게 맡기마. 대부분의 업무는 세인에게 인계해 놨으니 그녀에게 물어보면 될 거다. 마갑주 생산량 꾸준히 늘려 두고, 내가 입는 거 한 벌 챙겨 가마.”
“아, 예. 그러십시오.”
“자, 그럼… 가 봐야겠군. 후우~ 용사라는 건 꽤나 피곤한 거였군. 젠장, 전생엔 이렇게 자주 출장 갈 일이 없었는데…….”
대륙 전체를 지배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모이는 곳과 권력이 있는 곳만 쥐어 잡고 있으면 그만인지라 자신의 영지, 제국 수도, 직속 가신들의 영지 정도만 왔다 갔다 했던 베오날드였다.
권력이 있으면 어딜 가는 것보다 상대를 오게 해서 자신의 시간을 조율하는 게 가능했었기에 이렇게 직접 어딘가로 떠나는 게 편하진 않았던 베오날드는 그대로 신전으로 향하여 교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
***
제국 수도 북쪽 성벽.
제국의 심장을 방어하는 이 두꺼운 성벽은 현재 피가 마를 날 없이 매일같이 치열한 격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지친 기색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으로 성벽 위에서 저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몰려와 있는 몬스터 떼거리를 바라보았다.
마족의 군세들. 작게는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각종 위험종 몬스터를 포함, ‘분노의 마왕’의 영역에 있는 악마들이 끝없이 계속 내려오는 판국이었다.
“…지원은 온다고 하나?”
“예. 발데리안 쪽에서 가르칸의 군대를 무찔렀다고… 편성해서 온다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거 다행스러운 일이군, 동생.”
그리고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태자 조엔 칼레움은 주변에 다른 형제들을 두고서 전장의 풍경을 보면서 올라오는 보고들을 체크 중이었다.
본래 황태자로선 다른 황자들에게 업무를 보게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 현 상황은 어린아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급박한 것으로 이미 전쟁 도중 죽어 나간 귀족들과 관리, 장교들의 공백이 심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망할 교국은 마족과 암흑신 토벌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 칠 땐 언제고… 지금은 아직 ‘계시’가 내려지지 않았다면서 무시하고 자빠졌으니 말이야. 아무튼 얼마쯤 온다고 하나?”
“못해도 3만에서 5만 사이로 편성해서 보낸다고 합니다.”
“그거 한숨 돌릴 것 같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까? 후우우우…….”
조엔 칼레움은 깊은 한숨을 쉬며 저 멀리 몰려오는 마족들과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나라의 주인으로서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막기만 해서는 결국 싸움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엔 막다 보면 결국 숫자가 줄거나 물러나거나 할 줄 알았는데, 놈들은 끊임없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그렇다 쳐도 하나하나가 소환하기 힘든 악마나 대형 몬스터들은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건지 기이할 지경이었다.
“마음을 굳건히 다지셔야 합니다. 여기가 무너지면 제국은 끝입니다, 전하.”
“알고 있네, 알고 있어. 그러니… 최선을 다할 걸세. 형제님들도 다들 기운 내 주게.”
“예!”
반대로 서로 권력을 빼앗으려 하는 위협만 빼면 혈족만큼 든든한 관계도 또 없는 법. 이기적인 계산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관계로,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찾아오는 역경에 대비하는 그들이었다.
아무리 길고 어두운 밤이라고 해도 분명 새벽은 찾아올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