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다음 날, 발데리안 영지.
신전의 작업을 행한 뒤 베오날드는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대신관과 함께 발데리안 영지로 가서 자신의 변화, 그리고 노이멀 총리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용사가 되었어도 우선적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은 기본적으로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소리들을 연달아 들은 발데리안 백작과 케드론은 눈과 입이 찢어질 기세로 커졌고, 급히 들어온 아르젠도 기겁하며 쳐다보았다.
“놀랄 일이… 한두 개가 아니군. 그러니까 노이멀 총리는 자네 손에 죽었고… 그리고 자네는 여신의 계시를 받아 용사가 되었다… 그 말인가?”
“예. 거기에 겸사겸사 신전에 있는 잡것들도 정리하고 왔지요. 아무튼 제가 없는 사이에 있던 일부터 알려 주십시오. 시급합니다.”
“아, 알았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발데리안 백작과 사람들이었지만, 그동안 베오날드가 쌓은 신용과 더불어 행한 위업들이 있기에 억지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의 실력도 실력이고, 이젠 ‘용사’라는 그 어떤 귀족의 작위보다도 대단한 것을 얻어 버렸으니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한쪽 팔이 없어진 걸 알았는데, 그게 말끔하게 나아서 온 ‘기적’ 같은 증거까지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과연 추격대를 보냈다는 거군요.”
“우리 본대는… 혹시나 해서 보내지 않았네만…….”
“뭐, 노이멀 총리가 없는 가르칸의 군대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으니 크게 걱정할 거 없습니다. 하나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이나 전투 마법사들이 없으니… 압도적으로 이기지도 못하겠지요. 병력 소모가 적었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가르칸 전선은 이제 끝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가르칸을 지배하며, 주전파를 지휘하는 핵심 인물인 노이멀 총리의 사망이 확정된 것이니 더 이상 가르칸엔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장군들 중 가장 핵심인 노이멀 총리가 사망한 것은 그 어떤 장군의 사망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어쨌든 더 이상 가르칸과 싸우는 건 의미 없는 일. 화평을 맺도록 하지요.”
“화평이라고? 아니, 지금 이 마당에?”
“사실 저희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수도… 위험하지요?”
“으으음… 그건 그렇군.”
“그리고 국가적 전망으로 봐도 우리는 시간만 있으면 가르칸보다 더 크게 번영할 수 있습니다.”
당찬 자신감을 선보이는 베오날드의 패기. 하나 그가 말하니 실현 가능성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데리안 백작과 케드론은 어차피 베오날드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으니 그의 말대로 하기로 하고, 전령을 보내어 가르칸과 휴전을 맺는 걸 상의하기로 한다.
더불어 추격을 하러 출진한 귀족들의 군대에게도 더 이상 쫓지 말고 돌아오라고 지시를 내리고 말이다.
“자~ 그러면 어디… 일에 복귀해 볼까?”
“이번엔 무리하지 마시지요.”
“아, 이젠 걱정 없어. 아주 일을 제대로 하라는 건지 이걸 받았으니 말이야.”
“아… 성검인가요.”
“그렇지. 이거 정말 신기하다니까…….”
베오날드는 현재 다시 업무에 복귀한 상태에서 아르젠과 태연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전처럼 또 과다한 업무로 쓰러질까 걱정하는 그에게 허리에 차고 있는 성검을 보여 주며 그런 걱정을 불식시켰다.
이 원리도 모르고, 아무런 술식도 없는 그저 신기한 힘을 가진 검은 지니고만 있어도 계속 베오날드의 몸에 활기가 솟게 하고, 피로가 사라지는 효과도 있었다.
“한번 분석하고 싶군요.”
“나도 해 봤는데, 알 수 없더군. 그야말로 기적의 종합체야.”
“역시 선조님. 보통은 불경스러운 일을 그냥 해 버리시는군요. 아무튼 그… 라라 선조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죽었지. 아까 내가 발데리안 백작에게 한 이야기를 못 들은 게냐?”
“아, 아닙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여신도 어쩌지 못하고 이럴 운명이었다고 하더군. 아무튼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나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써먹을 생각이다. 용사든 뭐든 말이지.”
성검과 용사의 힘에서 좋은 점을 알아낸 베오날드는 밀린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차분히 하나하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베오날드는 신중히 하나씩 진행하기로 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와 그것을 쫓는 군대에게서 동시에 전령이 들어왔다.
일단 가르칸 공화국 군대에서는 노이멀 총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나니 자연스럽게 협정 의사를 전해 왔고, 쫓는 군대 측에서는 자신들이 공적을 잘 세우고 있는데 왜 방해하느냐는 뉘앙스의 항의였다.
“…그 공적을 세울 장소, 저기 수도에 있으니 전력 낭비하지 마시고 얌전히 돌아오십시오, 라는 결론으로 케드론 님이 적절한 미사여구와 정치적 수사를 잔뜩 집어넣어서 보내 주십시오. 저는 가르칸 놈들과 승부를 보고 오지요.”
“아, 알았네.”
“예. 그리고 처리해 둔 서류들의 집행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라도 어설프게 처리해선 안 됩니다. 저희 상황이 사상누각인지라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더 무시무시해졌군. 용사의 힘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케드론은 베오날드의 기운이나 눈빛이 무시무시하게 예리해진 것을 보고는 이전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분위기나 위치에 맞게 자신의 기척이나 기색을 위장하곤 하는 그였지만, 지금 베오날드는 딸아이의 죽음과 마왕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상황이라서 자기 자신의 본성이 잘 통제되지 않고 새어 나오고 있던 것이었다.
“하이디, 알테리오를 좀 빌리마. 그리고 나 없는 동안… 이전처럼 집을 부탁한다.”
“아, 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이번엔…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걱정 마라. 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다. 이것까지 있으니 말이야.”
“예.”
“가자! 알테리오!”
오랫동안 하이디의 수족으로 일하던 알테리오를 인수받은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호위병과 성기사 소수만 이끌고, 거기에 라라가 습격했던 날 밤 체포했던 ‘인간 사냥꾼’ 암살팀을 챙겨서 가르칸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며칠의 시간을 거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분명히 자신은 전투를 중지하라고 했는데도 아직도 싸우고 있는 가르칸과 귀족들의 군대였다.
“분명히 발데리안의 이름으로 보냈을 텐데? 저놈들, 정신 나갔나?”
챙강!
“와아아아아아!”
분명히 전령을 보내서 두 쪽 다 전투를 중단하라고 일렀을 텐데… 베오날드의 눈에 보이는 것은 치열한 전장이었다.
상황은 현재 백중세. 가르칸의 군대는 그래도 역시 강군이라서인지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도 잘 버티면서 귀족들의 군대에 철저히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싸우는 추격 부대의 병사와 기사들도 모두 사기를 높인 채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베오날드의 눈에 들어왔다.
“한데, 그런 것치고는 엄청 치열하게 잘 싸우는군. 공을 서두른다고 해도 병사들까지 저러진 않을 텐데…….”
“아마 가르칸에 대한 원한이 깊은 남부 귀족의 친족이 있었나 보지요. 그리고 도망쳐 온 남부의 병사들도 합류했고, 그들에게서 가르칸 공화국에 대한 악명이 퍼졌을 거고 말입니다.”
“아, 그 점을 생각 못했군. 하긴 친족을 잃으면… 정말 가슴이 아프기 마련이니까.”
“…예?”
그냥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나 감정이 깊게 배어 있어서 옆에서 설명하던 신전의 성기사는 순간 놀란 듯했지만, 베오날드는 개의치 않고 알테리오를 움직여서 앞으로 나아갔다.
라라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는 저 군대들의 분노가 이해되었지만 지금은 일단 저것을 말려야만 했다.
‘참 씁쓸하군. 내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서 저들이 원한을 해소하는 걸 막아야 하다니…….’
하지만 감정과 일은 별개의 것이었다.
지금 곳곳에 필요한 인력과 병력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싸움으로 소모되어선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이것을 말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중간하게 외침을 하거나 아니면 각 부대에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후우… 스으읍… 어디, 잘될지 모르겠지만…….”
허리에서 성검을 뽑은 베오날드는 그대로 알테리오에서 내려와 땅에 선다.
그리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눈을 감고, 기억을 되돌리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고 있겠지만 이전 라라와 싸울 때, 라라는 자신의 목숨을 모두 불태우면서 ‘노이멀 가문’의 3대 오의를 전부 베오날드에게 사용했었다.
‘라라…….’
본래 베오날드가 익히지 못한 오의. 라라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태우는 동시에 그것의 동작 하나하나, 마력의 흐름 하나하나를 세세히 보여 줬었다.
그리고 라라는 베오날드의 품에서 죽기 전 그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태워 베오날드를 구하는 동시에 그에게 ‘오의’를 전수했던 것이다.
‘아빠… 잘… 보셨… 죠? ‘우로보로스’… 그리고… ‘에키드나’.’
‘당연히 기억하지. 동작 하나하나, 오러의 흐름과 궤도, 운영 모두… 모두 눈과 기억에 새겼단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머릿속엔 그녀가 펼친 ‘오의’의 정수와 과정이 모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얻지 못한 것을 그녀가 아주 알기 쉽게 풀어서 알려 주었다.
그것을 떠올린 베오날드는 눈물이 흘렀지만 그래도 동작을 똑같이 행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동작, 한 동작, 차분히 그녀가 검에 담은 정성을 생각하며 마음을 검에 가득 담아낸다.
‘똑같이 할 수 있다곤 해도 라라와 내 역량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러나 부족한 역량은… 이 검이 해결해 줄 것이다.’
성검(聖劍)의 힘. 신체를 활성화, 재생시키는 건 물론 강화까지 해 주는 이 기적의 보물의 힘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는 베오날드였다.
그렇게 오러를 기억 속 그대로 모으고, 흘려보내고 라라의 움직임은 물론 표정과 눈빛에서 읽어 낸 마음까지 그대로 구현한 베오날드는 검을 하늘로 휘두르며 노이멀 가문의 오의를 펼쳐 내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최종 오의-에키드나’.
콰아아아아아아!
보랏빛 오러의 파동이 거대한 뱀처럼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며 전장의 하늘을 가로질러 질주한다.
엄청난 소리와 바람이 퍼지며 질주하는 오러. 푸른 하늘엔 보랏빛의 파도와 그 잔여 기운들이 마치 상처처럼 남아서 모두를 주목시키게 된다.
멀쩡하던 하늘에 갈라지는 것 같은 보랏빛 흉터를 남긴 힘. 확실히 전쟁을 잠시 중단시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엄청난 힘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신벌이 내려진 건가?”
“휴우우우… 이거 엄청 힘들지만, 아무튼 이걸로 멈췄군.”
덜덜…….
그리고 베오날드는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지만, 성검의 힘과 근성으로 간신히 버티며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기껏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오의를 쓴 게 허사가 되니, 그는 성검의 힘으로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군대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멋진 포즈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