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어떻게 된 일이지? 질 나쁜 장난? 아니면 환상? 분명 아버님은 500년 전에 죽었을 텐데? 어떻게…….’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오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가도록 할까?”
“…아뇨. 그… 러니까 대체 어떻게…….”
채앵!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베오날드는 먼저 움직여 검을 휘둘렀고, 노이멀 총리는 그것을 받아 내는 데 급급했다.
500년의 시간을 넘어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님이 눈앞에 존재하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분이 지금 자신에게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른다는 점이 더 큰 충격을 가져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물러나면서 눈앞의 남자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윽.”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난… 그럴 시간을 줄 생각이 없다. 지금 여기는 그저 싸워야 할 노이멀이 둘뿐이니 말이지!”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보랏빛 오러가 끌어 올려지고, 베오날드의 검이 찌르던 중 기괴하게 비틀어진다.
살무사. 노이멀 총리에게도 익숙한 검이었기에 순간 당황했지만 막아 내는 건 쉬웠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에 반격하며 자신도 똑같이 그에 맞서고자 한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두 마리의 뱀의 형상을 띤 오러가 격돌하고, 허공에 터져 폭발한다.
일단 역량 자체는 역시나 500년이나 수련해 온 노이멀 총리 측이 압도적. 애초에 그녀는 상급을 넘어서 검의 절대자라 불리는 ‘마스터’의 경지에 닿은 검객이었기에 아직도 상급 언저리에 있는 베오날드의 검 놀림은 그저 하찮은 재주 같은 것이었다.
‘이 검… 살기(殺氣)가 없어.’
그러면서도 기이한 것은 저런 싸늘한 모습을 하면서도 검엔 살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냉혹하게 말하면서 검에 살기를 담지 않다니. 대체 왜 살의를 담지 않은 검을 휘두르며 그런 태도를 하는 건지 몰랐던 그녀는 막아 내고, 반격의 타이밍을 잡아서 공격을 가하려 했으나 순간 멈칫하며 검을 비껴 내고서 굴러 회피한다.
‘…아! 설마… 아버님도 날 아시는 건가?’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
분명 기회였음에도 물러난 그녀에게 책망하는 듯한 말을 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은 베오날드였다.
아무튼 그녀가 자신에 대해 눈치챈 것을 안 베오날드는 이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지 고민 중이었다.
사실 그도 500년의 시간이 지나서 만난 딸과의 재회에 대해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용사든 뭐든 자신의 손 밖에서 처리되길 원했는데, 우려하던 일이 기어이 터진 터라서 그는 겉으론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지금까지도 매우 난감해하고 있었다.
‘젠장할……!’
저택에서부터 태연했던 건 사실 고도의 블러프. 애초에 지금까지 행한 것은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우선 자신이 그녀에게 단숨에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서 태연한 체했던 거고, 여기 들어온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모습을 보이거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사실 여기까지 오는 것만 생각하고 다음 계획은 짜 두지 않은 것이었다.
‘애초에…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렇게 된 마당이니 그냥 다 밝히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대로 싸워 이겨야 하는 건가. 베오날드는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 가혹한 정쟁, 전쟁, 귀족들의 암투 속에서도 가족만큼은 사랑했던 이 남자에게 딸아이를 직접 참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여신에게 제발 용사님이든 뭐든 좋으니 딸과 연관되는 것만큼은 막길 바랐지만 자비 없이 그녀는 자신의 곁까지 왔고, 자신에 대해 눈치까지 채 버렸다.
‘…어쩔 수 없었어. 정체를 밝히고 이야기를 하면… 더 최악이니 말이지.’
정체를 밝히게 되면 자신이 ‘여신’의 명을 받고 온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마왕과 계약한 저 아이로선 결국 칼을 겨눠야 하는 처지라는 걸 알게 되고, 이번엔 자기 손으로 부친의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상처 입게 된다.
가족에 대해선 무른 베오날드로서는 도저히 그 상처를 또 입히고 싶지 않았기에 살기 위해 은연중 자신의 정체를 알리면서도 대화할 분위기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알게 되면 누구든 간에 더 큰 고통밖에 오지 않는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오식(五式)-사이드와인더’.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오식(五式)-사이드와인더’.
오직 할 수 있는 건 말없이 검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뿐. 베오날드의 살의 없는 검에 노이멀 총리는 그에 맞춰서 마찬가지로 살의 없는 검으로 노이멀식 검법을 구사해서 검과 검을 맞대고 서로의 눈빛만 마주치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아버님인 걸 알겠어. 생각해 보면… 500년 전 아버님은 늘 검을 동경하셨지만 서투셨어. 상급 기사급이 되신 건 알겠지만… 결국 맞지 않는 옷을 입으신 것 같군.’
‘정말로 내가 나인 것을 은연중 밝히지 않았더라면 진작 토막 났을 거야.’
싸우는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오날드는 처음에 살기를 풍기지 않고 첫수를 내민 것으로, 자칫 살기를 넣었다가 급 반격당해서 즉사당해도 할 말이 없는 역량 차이였던 것이다.
마왕과 계약하고, 가르칸 장군들 중 정점에 오를 정도인 딸아이의 재능을 우습게 보지 않은 덕분에 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쩌지?’
‘아버님은… 여기서 내게 뭘 말씀하고 싶으신 걸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할 수 없어.’
‘아버님…….’
채앵!
검광과 검광이 교차하는 사이사이, 생각의 시간이 있는 동안 노이멀 총리는 말 없는 부친의 뜻을 헤아리고자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원리고 경우인지 모르지만 부친인 베오날드 폰 노이멀은 지금 눈앞에 존재하고 있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있던 일들이 마치 딱 한 조각만 남은 퍼즐이 맞춰진 것처럼 모두 이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아르젠이 복권된 것도 그렇고… 그 기괴한 갑옷에 마도구, 거기에 이 유적까지 모두 아버님이 직접 하신 거구나. 그러면 납득이 되지. 그 누구도 아닌…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직접 하는 건데…….’
‘점점… 힘들어지는군. 난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컨디션으로 싸우고 있는 건데도……! 하지만 눈빛이… 슬슬 눈치챈 것 같군, 라라…….’
‘500년 만에 만난 아버님이… 지금 내 앞에. 하지만…….’
검과 검이 교차하는 사이로 빛의 방울이 번쩍이며 떨어져 땅을 적신다.
누구의 눈물일까? 아니면 치열한 격전으로 나오는 땀일까?
베오날드의 것일까? 아니면 노이멀… 아니, 라라 폰 노이멀의 것일까?
“크윽…….”
“큭!”
부친을 너무나 사랑해서 세상을 증오로 물들여 버리려는 딸과 그런 딸이라도 가족이기에 사랑하는 부친의 싸움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된다.
하나 그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칠식(七式)-붐슬랭’!
검을 주고받고,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말 없는 대화가 조금씩 오가기 시작한 것이다.
체력을 소모하고, 땀을 흘리고, 서로에게 살의 없는 검을 휘두르면서 새어 나오는 감정은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 얽힌 오러와 눈빛은 이미 대화를 대신하기 시작했고, 둘은 싸움의 형상을 갖춘 재회를 이미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아.’
‘네가 왜 이랬던 건지 알 것 같구나, 라라.’
“하아… 하아… 하아…….”
“후우… 후우… 후우우우…….”
살의가 없는 검무에 점점 지쳐 갔지만, 두 사람은 멈출 수 없었다.
눈빛과 오러, 검으로 주고받는 대화로 서로를 느끼는 둘은 이미 재회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검을 놓고, 서로를 끌어안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슬픈 재회 속에서도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대화로 서로의 뜻을 이해하고자 한다.
노이멀 부녀. 암약을 위해선 이해하는 바가 깊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자 계속 파헤치는 것이었다.
‘…갑자기 돌아온 날 원망하지 않는 거니?’
‘제가 아버님을 원망할 리 없잖아요.’
‘이런 곳에서 말없이 검을 휘두르는데도?’
‘제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제가 더 잘 알고 있어요. 아버님은 그걸 막으러 오신 거군요.’
‘너는 잘못되지 않았단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채애애앵!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없지만 서로의 뜻을 전하고, 혹은 서로의 뜻을 알아차린다.
검과 오러의 빛이 지나는 사이사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으로… 대화만큼 전달할 수 없었지만 두 부녀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중요한 감정은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너와 이렇게 싸우고 싶지 않았단다.’
‘…저도 알았다면 그랬을 거예요, 아버님… 아니, 아빠.’
“하아… 하아…….”
“후우…….”
그리고 서로의 기력과 체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었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뜻을 전하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라 둘 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기까지 오면 사실 둘 다 서로 검을 놓고서 손을 잡고 이야기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하나 그것은 허락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을 이미 똑똑한 두 사람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어떻게 될지 결론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마왕과 계약한 저는… 절 막으러 온 아빠를… 죽여야 하는 거죠?’
‘그래, 나는 애초에… 널 막고… 죽여야 하고 말이지.’
스륵…….
귀족으로서, 남들의 위에 군림하여 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하게 된 그들은 해후는커녕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다.
마왕과 계약하여 수많은 죄악을 범한 타락한 딸, 그것을 막기 위해 여신과 계약하여 기억을 가진 채로 다시 생을 얻은 부친. 가능하면 서로가 서로를 만나서 이걸 깨닫는 일이 없었어야 하는데…….
깨달아 버린 베오날드와 라라, 두 사람은 둘 다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이지. 그런데 인생에 한 번도 하기 힘든 선택을…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심지어 한 번 결과를 본 것을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알테리오 도련님은 도가 지나칩니다. 저걸 그대로 두실 겁니까? 베오날드 님!’
500년 전, 아들인 알테리오가 자신과 너무나 엇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가신과 부하들, 다른 형제들이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베오날드는 자신도 부친을 싫어했던 적이 있었고, 자식이란 부친을 거부하면서 자라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 제안들을 모조리 묵살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베노피스’와 노이멀 가문의 멸망으로 치렀다.
‘난 모든 것을 아버님을 위해서 시작했는데… 아버님이 여길 막는다니…….’
‘모두… 모두 불태워 버리겠어. 인간들은 모두… 모두!’
그리고 반대로 라라 폰 노이멀은 사랑하는 아버님과 아름다웠던 고향, 가문을 사라지게 한 인간들을 모두 멸망시킬 생각으로 절치부심하며, 마왕과 계약해서 수많은 악업을 행하며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 자리에 올랐고 이 자리까지 왔다.
한데 그런 자신을 막는 게 그 사랑하는 아버님이라니. 아이러니의 극치인 상황에서 그녀는 검을 부여잡고 휘두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