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지금 상태가? 어떻죠?”
“잠에선 깨셨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푹 쉰다고… 밥이랑 물을 마시고서는 그대로 또 잠드셨어요.”
“너무나 업무가 무거우셨던 거겠죠.”
입구에선 세인과 하이디가 지키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내용으로 보건대 과로로 쓰러진 베오날드는 이미 몇 번 깨어났지만 기왕 쉬는 거 체력을 완충하기 위해 푹 쉬고자 한 것이었다.
아무튼 노이멀 총리로서는 이제 목표까지 한 걸음 남은 상황에서 방해물이 있었기에 제압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저 메이드 쪽은 별거 아니지만… 옆의 여기사는 상당한 기량이 느껴지는군.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은데…….’
“아무튼 손님이 오신 것 같으니 준비해 주시지요. 거기 숨어 계신 분, 모습을 드러내세요. 베오날드 님은 당신이 오실 거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얼른 나오세요.”
‘뭐라고? 아니… 일단 여기선!’
하이디가 귀신같이 숨어 있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눈치챈 것이었다.
순간 놀란 노이멀 총리였지만 여기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노이멀의 이름에 걸맞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눈치가 빠르군. 그보다 내가 올 것을 예상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가르칸 공화국의 지도자이며, 가르칸 원정군을 이끄는 사령관이신 노이멀 총리님이지요. 아무튼 본래라면 이 저택에 발을 딛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사람이지만, 그분이 허락하셨으니 특별히 가능한 일입니다.”
“으음… 상대도 역시 노이멀이라 그런 건가?”
“아무튼 세인, 당신은 손님맞이를… 저는 베오날드 님에게 알리도록 하지요.”
그렇게 세인은 먼저 예를 갖추고서 노이멀 총리의 옆을 지나쳐서 떠났다.
순간 처리해 버릴까 생각한 노이멀 총리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무시무시한 오러를 내뿜는 기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눈앞의 기사가 뿜어내는 오러는 그녀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는데, 과거 통일 제국 황실 기사단에서 쓰이는 것이라는 걸 기억 속에서 겨우겨우 떠올렸다.
“아니, 그… 오러는 대체?”
“당신과 제가 그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요. 그분의 명만 없었으면 지금 당장 전력을 다해서 싸웠을 겁니다. 아무튼 손님 오셨습니다, 베오날드 님.”
[그래, 들어오라고 하게.]
끼익…….
그렇게 문이 열리고, 안에 있는 베오날드의 모습이 드러난다.
막 자다 깬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금방 복식을 잘 갖춰 입고 허리에 검까지 찬 상태로 그녀를 맞이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노이멀 총리는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 건?’
분명 베오가 베오날드라고 칭해서 자신을 속이고 배신한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그의 비굴하던 모습도 알아서 그다지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언가 거대하고 장엄한 위엄이 느껴지고 있었다.
외모는 20대 초반인데, 뿜어내는 기품이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손님도 왔으니 슬슬 가 볼까? 여기서 이야기하기 뭣하니 노이멀 총리, 자리를 이동하도록 하지. 그리고 밖에 있는 친구들도 조용히 불러 주면 좋겠군. 안 그런가?”
“그… 그…….”
본래의 그녀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검을 뽑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분노로 점철된 그녀라면 진작 싸우고 난리가 났겠지만 이 고향 같은 풍경의 저택부터 시작해서 눈앞의 저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와 말에 몸이, 아니… 영혼 레벨에서부터 거역해선 안 된다는 느낌이 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면 밖의 친구들에게 보이기 힘든 문제라면, 조용히 시키도록 하지. 하이디, 제압하고 와라. 죽이진 말고 말이지.”
“하, 하지만…….”
“내 걱정은 할 거 없다. 손님맞이는 혼자서도 가능하다.”
“예, 알겠습니다.”
베오날드는 태연스럽게 하이디에게 명령을 내렸고, 노이멀 총리는 그런 광경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는 금방 당혹스러워하는 부하들의 목소리와 함께 공격과 방어를 치고받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일단 밥이나 한 끼 하도록 할까? 야식을 먹으면 보통은 혼나긴 하지만… 지금은 혼낼 사람이 없으니 문제없겠지. 나는 점심, 저녁도 먹지 못했고 말이야.”
“그… 그…….”
지금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어울리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라 당장이라도 부정해야 했지만,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해서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
노이멀 총리는 은연중에 이 기분이 과거의 풍경과 유사한 것에서 느끼는 ‘향수’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지금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마치 마법이라도 쓴 듯 그녀의 눈앞엔 지금 이 현실과 500년 전의 풍경이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식사는 세인에게 이야기했으니까 기다리지. 초는 내가 피워 주지. 그리고 하이디는 내가 말하는 대로라면 명령을 철저히 지킬 사람이라 걱정 안 해도 되네.”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요?”
“아, 내가 배가 고파서 말이지. 죽어도 배불리 먹고 죽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같은 ‘노이멀’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돼서 반갑기도 하고 말이지.”
“노이멀…….”
“심지어 이거 아르젠 그놈을 알고 나서도 대접하지 않은 거니 감사히 여기도록.”
놀리는 말도 아니고, 진지함이라곤 하나도 없는 가벼운 말투였지만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지는 노이멀 총리는 아무 반박 없이 그의 말에 어울리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이 상황 자체가 기이하고 말도 안 됐고, 자신 이외에 노이멀의 이름을 칭하는 저 무례한 자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몸과 본능이 거부하고 있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주인님.”
“그래, 레시피는 내가 말한 대로 했겠지? 그리고 행여나 허튼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누구 명인데 거역하겠습니까? 물론 그럴 생각은 가득 있었지만요.”
태연한 베오날드와 다르게 세인은 여전히 노이멀 총리를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생각과 감정은 오직 베오날드에 대한 것뿐이라서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말이다.
“하하, 들었지? 그러니 걱정 없이 먹어도 된다. 뭐, 정 걱정스러우면 지금 내 것과 바꾸는 방법도 있지.”
“바꾸지요.”
“그렇지. 그래야 노이멀이지.”
태연히 웃으면서 제안하는 베오날드의 말에 노이멀 총리는 일단 그의 제안대로 음식을 바꾸기로 했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경계심은 노이멀의 미덕인 만큼 베오날드는 오히려 그것을 반기며 즐거운 듯 직접 그녀의 옆까지 다가와서 요리를 바꾸어 주었다.
그럼에도 뭔가 미심쩍어하는 그녀를 위해서인지 베오날드는 먼저 요리를 한술 뜨면서 말했다.
“자자, 걱정 말고 들게. 노이멀의 이름을 걸고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고 맹세하지.”
“예, 그럼… 어머, 이거?”
“베노피스 시절의 요리지. 물론 재료가 달라서 맛은 좀 다르겠지만, 최대한 재현해 보려고 노력한 거다.”
‘아…….’
겉모양은 평범한 파이와 소스와 고기를 얹은 빵, 화려한 통구이, 샐러드 등등으로 구성된 다채로운 요리들이었지만 베오날드의 설명과 더불어 먹어 보니 확실히 베노피스 시절에 먹었던 맛이 떠오르는 노이멀 총리였다.
한 입, 두 입 먹으며 과거를 떠올리는 그녀였고, 베오날드는 진심으로 배를 채우고자 마구잡이로 먹기 시작했다.
“아무튼 기탄없이 들게. 나도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체면치레 안 하고 먹는 거니 말이야.”
“일단… 그러지요.”
“그러고 난 다음 식사가 끝나고 승부를 보자고. 노이멀로서, 단둘이.”
“…예. 아!”
자신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해 버린 것에 깜짝 놀란 노이멀 총리. 뭔가 화를 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인데 저 얼굴을 보니 화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하지만 식사는 너무나 맛있으면서도 자꾸만 몸의 기운이 누그러지려 하는 이 기분이 그녀는 너무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근한 기분, 그리고 저 묘한 시선,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의 연속. 지금은 500년 뒤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계속! 몰아쳐 오는 혼란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이 빠질 지경이었다.
“후우~ 배부르군. 역시 식사는 아주 중요하지. 먹는 맛에 산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야. 하하하, 어때, 맛있었나?”
“…그럭저럭.”
“역시 입맛이 좀 변했나 보군. 그래, 그럴 수 있지. 자… 아무튼 이제 진짜 할 일을 하러 가지. 따라오지. 좋은 싸움터를 알고 있으니 말이야.”
식사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노이멀 총리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오랜 비가 그치고 난 뒤라서 땅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달도 어두워서 앞을 보기 힘들었지만 두 사람은 고요히 걷는다.
베오날드와 동행해서 그런지 도시 내의 경비병들과 기사들의 검문도 쉽게 넘어갔고, 하이디의 영지를 나온 둘은 베오날드가 이곳에서 발견한 본래 금역이었던 ‘알의 둥지’로 향했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거기만 한 곳이 없어서 말이지. 그래서 밥도 먹었고 말이야.”
“아, 예. 문제… 문제는 없다.”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계속 존댓말을 할 뻔한 것을 급히 수정하면서도 그녀는 무경계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금이면 몰래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따라가고 있는 자신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상해. 내가 원래 이런 엘프였나?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분위기에 취해 버린 건가? 아니면… 설마?’
어쩌면 스스로 계속 드러나는 무언가의 해답을 억지로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그래, 답은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갑자기 이렇게 나약해져 있는 이유,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이유. 단순히 500년 전의 베노피스의 풍경과 유물 속에서 향수에 취했다고 해도 이루어질 리 없었다.
‘뭔지 몰라도 저 사람에게서… 아버님의 느낌이… 들고 있어. 그럴 리 없는데…….’
“자, 도착했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군. 발걸음이 빨라서 그런지 말이야.”
“여긴…….”
“‘알의 둥지’, 노이멀 가문에 내려진 유산. 어딘지는 너도 잘 알지 않나?”
“…둥지. 아…….”
베오날드의 말과 함께 아버님이 남겼던 유적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 그녀였다.
노이멀 가문의 미래로 만든 것으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의 뒤를 따르면서 유적을 자연스럽게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유적의 시설을 자연스럽게 가동시키고, 함정을 해제한 베오날드는 그녀를 인도하여 지하로 더 깊숙이 내려갔고, 내부가 텅 빈 커다란 방에 도착했다.
“여기는…….”
“둥지의 여유 공간이지. 더 많은 서적과 더 많은 재보를 놔두기 위해서 확장해서 만들어 둔 곳이야. 아마도… 자, 그러면 이제 노이멀의 식대로 대화를 해 봐야겠군. 긴말, 군말 다 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러나?”
“그…….”
스릉…….
하나 노이멀 총리가 무어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베오날드가 먼저 검을 뽑아서 겨누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스위치를 껐다 켜듯 바뀌는 눈빛을 본 뒤에야 노이멀 총리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깨닫게 되었다.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건 ‘아버님’이라는 것을……. 베오날드의 이름을 사칭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베오날드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마찬가지로 검을 뽑고 앞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