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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227화 (227/259)

[227화]

하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아무리 케드론이 백작 후계자라곤 해도 압도적으로 힘으로 짓누르는 게 아니라면 힘든데, 휘하 귀족들과 또 기사들의 높은 언성에 출격을 막는 것은 아예 무리였다.

결국 출진은 허락하되 핵심 전력인 발데리안 백작 직속군은 나가지 않는 선에서 막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들 위에 앉는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나저나 베오날드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건가?”

“예. 그동안 엄청 무리해서인지 푹 자고 있습니다. 오러니 약이니 해도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도 하고… 또 그냥 서류 업무만 하신 것도 아니라, 마갑주 및 연구 업무도 하시니 말이죠.”

“하긴 그럴 만했지.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한숨도 쉬지 않고 업무에 집중했으니. 덕분에 병사들과 기사들 모두 상태가 좋아졌으니… 심지어 말들까지 케어를 해낼 줄은 몰랐지.”

“전쟁이 끝나면 확실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할 것 같군요.”

“그렇지.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경계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결과는 옳았으니 말이야.”

현 상황이 너무나 큰 위기이고, 그의 힘과 수완이 있었기에 베오날드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드러내는 이는 없었지만 내부적으로 상당한 불만이 쌓여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권력을 위협하는 것도 그렇고, 마갑주라고 하는 특별한 힘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발데리안 가문의 위세를 빌려서 이런 일, 저런 일 마구잡이로 명령을 해 대니 마음에 들어 할 자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다 발데리안 가문마저도 삼키려 들면 어떻게 합니까?”

“으음… 나도 그 점이 우려였지만, 사실 그럴 거라면 진작 했을 자였네. 다이나 왕국의 신임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지 않은가? 마음만 먹으면 다이나 왕국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을 자이네. 그리고 그 행위는… 이 제국은 물론이고 인간들을 지키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지. 데려온 전투 마법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한 건지는 자네도 알지 않나?”

“그,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우려가 되더라도 지켜봐 주게나. 내 마갑주를 만든 것도 그렇고, 그는 아마 다른 사명이 있어서 그런 거라는 것을… 날 봐서 믿어 주게.”

베오날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완전히 모르지만 케드론은 그와 어울리면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사리사욕을 챙기는 것이 아닌 무언가 커다란 목적과 사명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마갑주’ 기술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순순히 만들어 준다거나 하지 않았을 거고, 지금 저렇게 목숨을 걸고 쓰러지면서까지 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런 경우엔 도움이 되지 못할지언정 방해해선 안 된다는 걸 아는 케드론은 그를 지켜 주기 위해 오늘도 부하들을 설득해 나간다.

***

그렇게 가르칸의 군대는 물러났고, 추격하는 군대도 진군을 하여 지옥 같은 추격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날씨라는 게 참 묘한 것이, 가르칸이 물러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금세 그치기 시작하는 게 신의 농간이라는 생각이 들 법한 일이었다.

“좋아! 신께서도 우리를 굽어살피신다! 가자! 놈들을 섬멸하자!”

“와아아아아!”

사기가 부쩍 오를 대로 오른 군대는 즉시 성문을 열고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이 지독한 겨울비로 인해 나약해진 가르칸의 적군을 쓸어 담을 생각에 흥분한 기사들과 병사들은 용맹하게 달려 나갔다.

그동안 노이멀 총리는 ‘인간 사냥꾼’팀과 함께 베오날드를 추적, 그는 가장 가까운 하이디의 영지 쪽으로 옮겨져서 저택에 도달한다.

대부분의 병력이 발데리안 성에 있었기에 이 작은 성의 경비를 뚫는 건 일도 아닌 그들은 오늘 밤 일을 결행하기 위해 미리 정탐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도 경비가 삼엄하네요. 역시 중요 인물이라 그런가? 무슨 방어 술식, 경비 술식을 저렇게 많이 새겨 놨데?”

“게다가 인력도 많고, 겁나 무섭게 그 전장에서 입었던 갑옷을 입은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사령관님.”

“돌파하려면 애 좀 먹겠는걸요? 사령관님?”

“…어, 그래. 듣고 있다.”

말은 듣고 있었지만 노이멀 총리는 베오날드가 머무는 하이디 영지의 저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이 공사 자체는 베시아에게 맡겼지만 설계와 디자인은 베오날드가 전담했는데, 당연하지만 베오날드가 직접 만들었으니 그 양식과 디자인 모두 과거 ‘베노피스’를 만들던 시절의 모습이 확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베노피스… 느낌. 아버님이 만든 것과… 닮았는데?’

화풍만 보고도 작가를 유추해 낼 수 있듯이 이 저택의 건축 양식과 구조를 보니 저절로 베노피스에 있던 베오날드가 만든 건축물들이 떠오르는 그녀였다.

그걸 보니 멈칫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와서 금방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리고서 침입 루트를 짜기 시작하는데… 건물 구조도를 직접 그려 보니 더욱 가슴이 아려 온다.

‘이거… 아무리 봐도 아버님의 디자인인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구현할 수 있는 거지?’

복수귀가 될 정도로 아버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딸이기에 노이멀 총리는 저택의 구조나 만든 방식, 인테리어 디자인이 ‘노이멀가’와 같다는 것을 알아채곤 연속으로 놀랐다.

그러면서 인지 부조화가 오며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하는데, 아버지인 베오날드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500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눈앞에 그것들이 마치 시간을 넘어온 듯 보이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만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사령관님?”

“아니, 아니야. 잠깐 피로가 몰려온 것 같다.”

“잠시 쉬시지요.”

“그래. 잠시… 잠시만 쉬도록 하지.”

그녀는 그대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붙였다.

확실히 예상외의 패전과 심려로 인해 피로가 많이 쌓인 듯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든 그녀의 꿈속에선 늘 그렇듯… 불타는 베노피스의 광경과 죽은 아버님의 처형식 장면이 계속 오버랩이 된다.

“으음… 으윽… 으으윽!”

불타는 베노피스와 함께 목이 떨어지는 베오날드의 모습, 여기저기 잡혀가 노예 생활을 했던 괴로운 과거들이 계속해서 오버랩되면서 반복된다.

꿈조차 편하게 꾸지 못하는 이 저주, 분노의 마왕과 계약한 대가였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증오와 분노를 주입하고서 계속 세상을 불태우게 만드는 대가. 이 계약을 맺고 난 이후 그녀는 단 하루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으음……?”

그 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달도 뜨지 않은 깊고 어두운 밤이 되어서였다.

눈을 뜬 그녀는 부하들이 건네준 간이 식량과 물을 마시면서 기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어두운 하늘을 보면서 잠입하기 딱 좋은 때라 생각하고는 부하들과 함께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디 들어갈 틈은 찾았나?”

“예. 술식이나 이런 건 다 잘되어 있지만, 역시 대부분 사령관님이 알려 주셨던 것들의 연장선입니다. 보시지요.”

“음… 이거 다 베노피스에서 봤던 거군. 구조나 패턴이 유사해.”

“그리고 주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놈들은 안에 그리폰 한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리폰? 아, 확실히 보고에 그리폰을 타는 기사에 대한 내용이 있었지. 그런 건 내겐 방해되지 않는다.”

“직접 들어가실 겁니까?”

놀란 듯 이야기하는 부하의 말에 노이멀 총리는 당연하다는 듯 단호히 말하며 자신의 무구와 침투 장비를 점검했다.

이 안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만큼 들어가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대장이며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인 귀하신 몸이었으니 들어간다는 게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이번 적은 노이멀인 만큼 내가 직접 처단할 것이다. 너희는 도주 루트 및 감시를 맡아 주길 바란다. 걱정 마라. 쉽게 당하지 않는다.”

“예. 그럼 바로… 침입 작전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들이 조사한 저택 내의 구조에 대해 다시금 확인하는 노이멀 총리. 약 한 시간가량의 브리핑을 끝으로 본격적으로 침입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어두운 밤, 풀 밟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돌입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매우 정확했다.

이 ‘인간 사냥꾼’ 팀원들은 전원 최소 10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며 노이멀 총리급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원한이 깊어서 공부와 수련을 가혹하게 한 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뛰어난 마법 술식과 경비를 갖춘들 쉽게 뚫릴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노이멀 총리에게 익숙한 마법 술식도 있어서 더욱 쉬웠다.

‘좋아,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 너희는 주변을 살펴라.’

‘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내 실력을 믿도록 해라.’

가장 먼저 들어온 노이멀 총리는 그대로 정원에 흐르는 마력과 곳곳에 새겨진 술식들을 파악하면서 민첩하게 몸을 날려 건물의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안의 풍경을 살피면서 또 한 번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창밖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이것들 설마 전부 다… 베노피스의 유물들? 다 어디서 구한 거지?’

저택 밖의 물건과 장식들 같은 건 대부분 과거 자료를 이용해서 참조하거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쳐도 안에 있는 물건들이나 그림 같은 오래된 유물들은 다시 만들거나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구석의 벽면에 걸려 있는 오래된 그림으로, 옛 베노피스의 전경이 그려진 ‘풍경화’였다.

‘이건… ‘베노피스의 풍경’, 심지어 500년 전 화가 ‘쟝 폰 레르 남작’의 사인과 인장? 심지어 진품이라고? 뭐야, 여기? 대체 그놈은?’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베오날드도 결국 500년 전의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났기에 은연중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베오날드도 인간이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둥지’들을 찾고, 옛 물건을 찾게 되면 반가워했고, 이 저택 같은 걸 만들 때 은연중에 과거 베노피스의 잔재를 많이 넣어 두곤 했다.

‘이것도… 이것도… 저것도… 모두 500년 전, 베노피스 시기에 있던 물건들?’

여신의 농간에 따라 지상에 내려오긴 했지만 그리움이 은연중에 있었고, 나름 조용히 해소하고자 하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게 저택을 500년 전 풍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꾸미다 보면 그 꼼꼼함과 세심함으로 제대로 하는 베오날드였기에 500년을 살아온 노이멀 총리도 위화감을 못 느낄 정도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베오 그놈이… 나를 노리고 일부러 만든 함정인가? 내가 올 걸 예상해서?’

깊게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내부의 풍경이 너무나… 너무나 그녀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꾸며진 것도 당연히 베오날드가 꾸민 거니 그가 좋아하는 풍으로 되어 있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같이 좋아하던 사랑스러운 딸인 그녀의 심상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어떻게 이런 게 존재하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마법에 걸린 건가? 하지만 마력은 아무것도… 내가 가진 마도구에도… 게다가 이 소장품은 알고 보니 아버님의…….’

[사령관님, 약 15보 거리에서 순찰하는 자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서 움직이십시오.]

‘……!’

혼란에 빠진 그녀의 정신을 깨운 것은 바로 밖에서 주변을 정찰하던 부하의 마법.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일단은 해야 할 일부터 하기 위해 이 추억의 공간을 돌파하면서 기억한 대로의 루트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소름 돋는 현실을 느끼는 게, 이 저택의 공간은 정말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 그녀에게 계속 혼동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이 정도면 내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닌가? 어떻게 계단의 장식에서부터 하나하나까지 전부… 베노피스의 것을? 심지어… 아버님의 소장품을?’

베노피스의 양식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살던 그녀가 본 미술품까지 하나둘 끼어 있으니 이젠 경이를 넘어서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끼는 그녀였다.

아무래도 상대는 자신 이상으로 베노피스에 대한 미련이 깊은 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녀는 계단을 올라 조심스럽게 베오날드가 머무는 곳으로 추정되는 방의 근처까지 도착했고, 입구에 두 사람이 무장을 한 채로 지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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