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그렇게 발데리안 진영에서는 이 거센 겨울비 속에서도 ‘소수’의 고생을 통해서 대부분의 병력들이 따뜻하게 휴식을 취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된 반면,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는 현재 생지옥을 맛보는 중이었다.
“쿠, 쿠룩! 으으으… 추워… 추워… 불 좀 더 때 봐라. 쿠룩!”
“계속 비가 새서… 답이 없다. 크르릉! 으으으…….”
“털을 말려야 하는데… 큰일이다. 크르릉!”
“그거 기침이냐? 콜록! 콜록!”
쏴아아아아! 후두둑! 후두둑!
전투 중 쏟아붓는 비에 푹 젖은 가르칸의 병사들은 지금 목욕은커녕 몸조차 말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쏟아붓는 이 장대비 앞에선 텐트는 그저 아주 약간 젖는 것을 미뤄 줄 뿐이었고, 그나마도 피운 불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전락해 버렸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체질적으로 추위에 강한 드워프나 자연환경에 익숙한 엘프들뿐, 그 외의 이종족들은 산 채로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큰일입니다, 사령관님, 장군님들. 그… 비에 대한 대비와 대처를 하긴 했지만 역시 계절이… 콜록! 콜록! 계절이다 보니 이게…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젠장! 털에서 물이 안 빠져. 크르르르…….”
“저는 주술도 못 쓰고 있어요. 캥…….”
“후우우…….”
비 오는 소리가 막사를 때리는 동시에 들어온 보고는 썩 좋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원정군이 아무리 물건을 잘 싸 와도 결국은 원정군. 숙식 모두 만족할 만큼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고,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 지독한 겨울비는 실시간으로 병사들의 생명과 기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그럼 비가 그칠 때까지 버티는 건 무리다 이 말인가?”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럴 전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버티다가 괜히 우리 군의 기력이 모두 떨어졌을 때 적군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후우우, 그런가…….”
“게다가 싸우다 죽으면 차라리 명예롭다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당했다면서 본국의 여론까지 더 나빠지게 됩니다. 총리님, 다음 기회를… 보시는 게 어떠실지.”
“…다음 기회라. 그것이 과연 올까?”
이번 전쟁에서 성과가 없으면 결국 다음 선거에서 힘들어질 터였다.
물론 다음 선거는 지더라도 그다음 선거가 있으니 문제없을 수 있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쌓은 공을 모두 포기하자니 아쉬운 그녀였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바라자고 했지만 그녀에겐 또 자신의 부하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입장도 있었다.
“크르르릉… 아니면 차라리 다른 성이나 영지를 공략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 동쪽으로 가서 수도 남부의 다른 성을 치고 거기서 쉬는 거죠.”
“허,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저 성안의 놈들이 우리를 가만히 놔둘까?”
“일단 오늘 전투만 보면 사실상 우리가 이긴 거지 않습니까? 밖에 보시면 인간 놈들의 시체투성이입니다요. 우리 애들 건 거의 없고…….”
“그거야 그렇지만, 지금 이 상태로 또 행군하고 난 다음 전투를 하자는 건가?”
잠시 노이멀 사령관이 생각에 빠진 사이, 장군들끼리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 말린 상황은 쉽게 풀기 어려운 것이고, 특히 기상 이변으로 일어난 이번 일 같은 경우 누가 와도 해결할 방안이 없는 게 사실이었고, 나온 의견도 모두 힘든 일이었다.
“애초에… 우리도 이 정도로 힘든데, 저놈들도 어련하겠습니까? 2만 정도 줄었다곤 하지만 거의 8만이나 되는 병사들이 일제히 한 성에 몰려들어 갔으면 식량이라든가, 또 이 추위와 비에 멀쩡한 게 말이 안 되죠.”
“크르릉, 그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봤는데… 놈들의 성에서 연기가 계속 올라오더군.”
“연기라면?”
“그래, 물을 끓이는 거지. 불을 피우는 게 아니라, 물을! 게다가 그 양이 장난이 아니야. 뭉게뭉게 올라왔다고! 놈들은 최소한 따뜻한 걸 먹고 푹 쉴 수 있지. 지금도 나고 있을 거다. 크르릉!”
요테 장군의 말에 다른 장군들은 놀란 듯하면서도 몇 명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이미 늦은 밤이라 사방이 어두웠고, 비까지 내리는 터라서 시야는 최악이었지만 놈들의 성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면서 자세히 보면 무언가를 불태우는 연기가 뭉게뭉게 비를 뚫고 올라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우리는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보내는데… 놈들은 지붕 아래에서 몸을 말리고 따뜻한 걸 먹고 푹 쉬고 있겠지요. 그런데… 싸울 수 있겠습니까? 나도 지금 털이 안 말라서 이 모양 이 꼴인데 말이죠. 크르릉!”
요테 장군이 아직도 습기를 머금어서 축 처진 털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나마도 그가 장군이기에 전력의 핵심이라서 엘프 마법사들에게 케어를 받아서 이 정도였지, 일반 수인 병사들은 털이 젖은 채로 지금도 체온을 뺏기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음… 솔직하게 말하겠다. 이대로 물러나면 내 정치적 입지가 곤란해지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내야 하지.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여기서 그대들과 위대한 가르칸의 병사들을 잃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총리님…….”
“하나 우려되는 게 아직 남아 있다. 이 비는 우연이라고 쳐도 우리가 상대하는 저 군대는 예상외로 강했다. 거기에 저쪽도 이 비를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대처하는 저 솜씨. 내가 아는 한 발데리안 가문엔 그런 재능을 가진 자가 없다.”
노이멀 총리는 모든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지금 물러나더라도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일단 이번 전투에서는 자신들이 우위를 차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 레벨 정도 되는 지휘관이 지휘를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다른 장군이 지휘한 우군은 처참하게 깨졌던 일도 있었으니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저 수완, 능력. 그냥 두고 가면 큰 후환이 된다. 특히 오늘 전투에서 보았던 그 마법 갑옷,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 아니더냐?”
“예. 전열의 중장 보병들이 쓸려 나갈 정도였죠. 다행히 숫자가 적어서 전황에 큰 영향까진 끼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지금 물러나면 아마 우리는 수년 이상을 못 움직이게 될 거다.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놈들에게 그 시간을 더 주면 분명 가르칸 공화국에 큰 우환이 되겠지. 그러니 돌아가더라도 그놈을 찾아서 제거해야 한다. 여기에 이의는 있나?”
노이멀 총리의 차분한 설명에 장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금 여기 전력이 가르칸 공화국의 완전한 총 전력은 아니더라도 최정예 강군들을 소집해서 보내온 것인데, 본래라면 이기는 건 당연하고 막히는 일 없이 쭉쭉 나가야 하는 것을 저놈들은 막으면서 이런 변수가 생길 각을 볼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의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놈을 찾지요?”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야겠지. 암살을 하든… 무엇을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 전에 우선 그 ‘적’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겠지. 여기서부턴 전쟁이 아닌… 뒷수단을 써야겠군.”
그렇게 노이멀 총리는 본격적으로 저 발데리안 가문의 실권을 잡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방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노이멀’. 단순히 전쟁만을 위한 카드가 아닌 비장의 카드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전쟁은 이 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더라도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고자 한 노이멀 총리였다.
***
4일 뒤.
조금이라도 쉬려고 했지만 자신이 잠들면 그동안 여러 서류가 쌓이고 일의 진전이 늦어지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한숨도 못 자고, 계속해서 서류에 사인을 하고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관리를 해야 했다.
워낙에 발데리안 영지 옆에 자리 잡고 난 뒤 여신의 인도에 이리저리 일을 하다 보니 제대로 조직 구조를 만들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여전히 인재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투 마법사… 걔네들이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힘든 건 매한가지군.’
각성 효과가 있는 포션을 입으로 물고 마시면서 잔뜩 다크서클이 생긴 얼굴로 베오날드는 서류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
본래의 발데리안 영지보다도 더 많은 병사들이 몰려 있는 바람에 물자 구매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배로 늘어나 버렸고, 계속되는 비로 인해서 필요한 물자가 늘어나다 보니 지시해야 할 일도, 봐줘야 할 일도 계속 늘고 있었다.
“…뭐, 그래도 이 비 덕분에 망해 가던 전장을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상관없나? 하아~ 모두에게도 미안하군. 후우~”
창밖 아래, 비 오는 도시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부인들을 보며 베오날드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오죽하면 일손이 부족해서 지금 대피해 있던 베시아, 세인, 하이디 모두를 불러왔겠는가?
본래 영지 쪽도 손을 써야 했지만 지금 급한 건 이곳이었기에 다들 여기서 각자 일을 하며 베오날드를 돕고 있었다.
‘…아무튼 3일째가 되었는데 왜 안 떠나는 거지? 이 겨울비에 버틸 재간이 없을 텐데?’
보고에 의하면 비가 내린 지 3일째 된 아직도 놈들은 밖에서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체들이 수백 단위로 진영 바깥으로 버려지기 시작했다는데, 특히 리자드맨의 시체들이 가장 많다고 하는 걸 보면 죄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일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 라라. 병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건 우리 노이멀의 가르침으론 전하지 않았다만?’
인력의 중요성은 분명 자신이 빡세게 가르쳐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병력이 죽어 나가는 걸 그냥 방치한다는 건 분명 뭔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눈치채는 그였다.
‘으으음… 갈 땐 가더라도 역시 우리 내부 상황을 보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 협상을 할 준비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으으음… 윽!’
4일간 한숨도 못 자고 일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면서 두통이 몰려왔다.
아무리 육체를 단련하더라도 두뇌는 결국 두뇌. 피가 흐르고 작용하는 작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약을 통해서 버틴다고 해도 결국 수면과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조금씩 삐걱거리기 마련이었다.
“으음… 확실히 이거, 아무리 나라도 슬슬 힘들어지는군. 머리가 안 굴러가… 조금 자야 하나? 아니지, 안 돼. 지금 자면… 분명 못 일어난다.”
하지만 지금 잠들면 한참 못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지라 베오날드는 기합을 넣고서 다시 일에 집중했다.
지금 눈앞의 서류들에 집중하는 것도 힘든 상태인데, 다른 생각까지 하려니 결국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지금 이 서류들만 끝내고 한숨 자고자 생각한 그가 열심히 펜을 놀리는 사이, 그가 있는 건물 옆으로 수상한 자들 5명이 어둠과 빗소리를 통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침입하기 쉬웠군요.”
빗속에서 로브를 눌러쓴 한 남성이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분명 특징적으론 인간의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존재로, 보통 사람과는 다른 분위기와 또렷한 이목구비로 마치 잘 깎은 조각 같아서 인간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귀를 자르고, 분장 좀 하니 엘프랑 인간을 구분 못하다니 말입니다.”
“그야 인간들도 그렇고 다른 종족들은 우리 하면 긴 귀부터 생각하니까요. 잘라 낸 다음… 이 귀를 달고 머리카락으로 가려 버리니까~ 그냥 인간이죠.”
그들은 모두 인간처럼 생겼지만 특이하게 귀 쪽은 약간 어색한 모양이었는데, 일행이 말한 대로 이 귀는 모조 귀로 인간의 것을 잘라서 방부 처리한 다음 붙여 놓은 것이었다.
거기에 화장, 분장 같은 걸 해서 최대한 인간에 가깝게 위장한 것이 이 엘프들. 노이멀 총리의 직속 부하들 중 하나인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인간에게 원한을 가진 엘프들이었는데, 가족이나 친지가 노예로 잡혀가거나 혹은 고향이 불탔던 원한을 가진 자들로 스스로의 귀를 자르는 의식으로 가입해서 노이멀 총리의 부하로서 일하는 자들이었다.
“이 비가… 우리 군에겐 해로운 일이었지만, 반대로 우리에겐 이득이 되었네요.”
“아, 그래서 뭐라 말하기 묘하지.”
쏴아아아아아!
하늘에서 쏟아붓는 이 차가운 비는 가르칸 공화국 군대에겐 해를 끼쳤지만, 노이멀 총리의 부하인 ‘인간 사냥꾼’들이 침입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어둡고, 시야도 차단하고, 소리도 적어지고, 특히나 그냥도 민첩하고 몸이 가벼워서 소리도 적은 이들이 성벽을 대놓고 타고 올라가도 될 정도였다.
더구나 지금 이 영지 안에는 타 영지의 군대도 섞여 있어서 낯선 얼굴들이 돌아다녀도 위화감이 없었기에 그들에겐 최고의 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