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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224화 (224/259)

[224화]

“이 겨울에 비라니…….”

다들 무장 뒤에도 안에 옷을 두껍게 입고 있어서 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엄연한 겨울이었다.

가을에 시작된 전쟁이 시간이 끌리고 끌려서 어느새 겨울에 돌입하게 되었고, 추운 바람이 부는 건 일상이었지만 이렇게 비가 올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비.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서서히 기세가 세지더니 장대비가 쏟아붓기 시작했다.

“크르릉? 비, 비다! 어, 어떻게 해?”

“터, 털이 젖고 있어!”

“차, 차가워! 망할! 지금 겨울이잖아? 크르르!”

“이런……!”

휘이이이!

빗속에서의 전투가 체력을 빠르게 뺏어 가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강인한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라면 물론 이 정도 비 가지고 뭘 그럴 수 있겠냐 하지만, 계절의 힘은 얕봐선 안 된다.

특히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에서 수인들 같은 경우 산 채로 털 코트를 입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젖으면 문제가 심각해지며, 변온 체질인 리자드맨 같은 경우는 지금 비를 맞으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엘프, 드워프들 같은 경우는 체력적으로 비에 강하거나 아니면 마법이나 정령술 수단이 있기에 나은 수준이다.

“이건 호기다!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불러라! 후방의 부대는 굳이 열차게 싸울 필요 없고, 포위를 풀고 옆으로 빠져서 성 쪽으로 다가오라고 전해라. 군을 합치는 거다! 그리고 성으로 가면 물을 데우고,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도 전해라!”

그리고 이 점은 베오날드도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었다.

싸늘함을 넘어서 차가운 장대비, 동시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그나마 전쟁 중이라서 모두들 몸이 달아오른 상태고, 사람들끼리 뭉쳐 있어서 덜했지만 싸움이 끝나고 몸이 식기 시작하면 몸 상태가 급격히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수성용으로 준비한 기름을 다 분출하라고 해서 물을 데워라. 준비의 싸움이다! 이 전쟁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상태가 안 좋은 이들을 격리할 영역을 만들고! 빨리!”

“예! 명대로 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직접 성으로 가겠다! 지원 온 부대에게 전달할 물자도 배분해야 하니 말이다!”

전쟁의 지휘는 노이멀 총리가 위였지만 이런 행정적 처리와 실행력은 베오날드가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성이라는 것은 사람이 지붕 아래에서 주둔할 수 있는 곳. 장기간 전쟁을 위해서 대비해 둔 물자, 수성 측 입장이었기에 모든 것이 유리했다.

“…젠장! 왜 하필 비가! 플레임호거 장군을 불러서 대책을!”

“예!”

반대로 노이멀 총리와 가르칸의 군대엔 이 겨울비는 최악의 사태였다.

애초에 원정군.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야전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그들이다.

비에 대한 대비는 나름 했지만 이 정도로 폭풍이 몰아치는 건 상정할 수가 없는 사태였다.

눈이나 폭설이 내리면 내렸지, 이 계절에 비, 그것도 이런 장대비가 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 거기! 멍때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 전투가 끝난 뒤엔 상대도 견제하게 된다. 승기가 곧 우리에게 온다!”

“예!”

‘…여신님이 아예 손 놓고 있던 건 아니군. 그래, 이런 도움이라도 줘야지.’

베오날드는 현재 마갑주를 입은 채로 케드론에게 보고한 뒤, 성으로 돌아와서 서류와 전갈들을 열심히 보내고 분주히 움직이며 여신의 은혜로 내려오는 저 비를 감사히 여겼다.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거대한 자연재해의 앞에선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피해는 단순히 비에 젖는 걸로 끝나지 않게 된다.

우선 온혈 동물이 아닌 리자드맨부터가 다들 체온 조절이 힘들어서 죽어 나가기 시작할 거고, 수인들도 푹 젖은 몸을 말리지 못하면 차가워진 옷을 입은 것처럼 체온을 더 빨리 빼앗기게 되니 얄짤없이 병들고, 체력 소모가 커지게 된다.

‘라라, 너는 이에 대한 대비를 모두 해 왔을까? 훗… 불가능하지.’

여러 종족의 통합 구성은 이상적으로는 서로 약한 부분을 보완하는 시너지를 내서 좋아 보이지만, 이런 사태 해결은 힘들다.

우선 신체적 차이가 있는데, 같은 병에 걸려도 종족이 다르면 써야 하는 약도 다를 거고 치유법도 다르다.

단일 종족인 인간만 해도 체질에 따라 질환이 갈려서 치유법이 무수히 늘어나는데, 여러 종족의 것을 각자 개별적으로 마련한다? 그건 500년이 아니라 1천 년의 시간이 온전히 주어져도 힘든 일이다.

‘그리고 난 이미 그 유리점을 더 폭파시킬 방안을 마련했다.’

오기 전, 기사들과 전투 마법사들에게 지시를 내려놓았다.

가능한 한 전열에서 적과 싸우는 건 버티는 선에서만 진행하고, 후방에서 공격하는 부대는 서서히 뒤로 빼면서 성 쪽으로 빠질 준비도 했다.

그리고 전투 마법사들은 후방 쪽 부대로 옮기고, 베오날드는 즉시 그들의 부대로 전달할 물자도 편성해서 별도의 부대를 불러서 수송 작전을 지시한다.

‘자, 라라,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이 거센 겨울비를 이겨 낼 수 있겠느냐?’

저 성벽 너머의 전장에 있는 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하며 베오날드는 서류에 사인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신의 도우심으로 이긴 게 조금은 불편한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전장의 전투도 이제 급변하기 시작했는데, 분명 유리하게 싸우고 있던 가르칸 공화국 군대의 전열이 아주 조금이지만 힘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이 강력한 겨울비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노이멀 총리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비를 맞으면서 전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적 후방 부대가 퇴각하기 시작! 아마도 비를 피하려는 것 같습니다!”

“전열 중장 부대에서 보고드립니다. 리자드맨 병사들이 급격한 체력 소모와 체온 저하를 호소하면서 돌아오고자 하고 있습니다!”

“플레임호거 장군님에게서 온 전언입니다. 비를 피할 시설 구축이 힘들다고 합니다, 사령관님!”

“정령술사 부대장님이 이 비는 당분간 계속 내릴 거라면서 철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보고는 받고 있지만 그녀의 귀를 뚫고 온 소리는 머리까지 들어왔음에도 사고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겨울비라니. 너무나 당혹스러운 현실의 어깃장에 충격이 큰 그녀였다.

모든 것을 준비했고, 최적의 타이밍까지 기다렸다.

가르칸의 권력을 손에 넣고, 계획대로 제국 남부도 손에 넣었고, 전쟁 준비도 철저히 했으며, 인간들에 대한 보복을 위해서 단 하루도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토록 정성을 들여 준비했고, 드디어 좋은 때를 찾고 복수의 칼을 뽑아서 전진했다.

다소 방해가 있었지만 모두 이겨 내고 헤쳐 나왔고, 지금도 그랬다.

우군이 격파되어도 모든 병력을 모았고, 적이 성에 틀어박혔을 땐 공성 병기로 두드리다가 그들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결국 저 멍청한 놈들은 스스로 죽으러 나와서 승리를 쟁취하면 되었는데…….

“…다 되었는데, 여기서 어떻게…….”

그녀의 머릿속엔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가 치솟고 있었다.

얼마나 이날을 학수고대하며 준비했는가? 자그마치 500년, 500년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그것이 50번 반복되는 긴 세월 동안 버티고 노력하고 애써 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여기서 갑자기 비가 내려서 모든 게 망쳐지고 있지 않은가?

‘어쩌지……?’

그러나 멍하니 있는 것도 잠시, 그녀의 정신은 스스로를 깨우고 이 뒤의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나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억센 빗속에서 일단은 물러서야 할지, 그러지 않아야 할지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이 비는 언제 그칠지, 또 언제까지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판단은 일단 한번 물러나는 것이긴 한데…….’

그러면 과연 다시 전쟁을 하러 올 수 있을까? 싶은 그녀였다.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인 그녀는 지도자이긴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다.

엄연히 의회의 이종족 대표들의 선거로 추대되어 앉은 자리였다.

이 전쟁에 실패하면 나라에선 큰 회의가 몰려올 거고, 그녀의 다음 전쟁을 지지할 사람이 없어져 버린다.

‘결국 여기서 승부를 내야 하는 건가? 그러면……!’

철컥!

검을 잡고 한 발 앞으로 나서는 그녀. 이 비가 변수가 된다면 무조건 여기서 승리해야만 한다.

아니, 전투에서 이기진 못해도 최소한 적에게서 빼앗을 것을 빼앗고 최대한 이득을 챙겨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직접 전선에 나가기 위해 부관에게 지휘를 맡기려고 하지만 상대인 베오날드가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사령관님! 적군이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제길! 눈치챘나? 도주하지 못하게 해라! 전력으로 쫓아! 후방에 있는 부대에게도 전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놈들을 쳐부수라고! 모두에게!”

“하, 하지만 그러면 결국 성벽으로 가게 됩니다만…….”

“아니면 후방으로 들어온 적의 부대를… 아!”

자신이 잠시 멍때린 사이에 이미 일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군의 후방을 때리던 적 부대는 격전을 치르면서 왼쪽으로 우회해서 빠져나가고 있었고, 적 병력들은 성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래, 놈들도 이 비로 인해서 전투의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젠장!”

“사령관님, 이대로 전투를 지속하는 건 무리 같습니다. 성벽 쪽으로 가서 싸워 봐야…….”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적들을 처리할 순 있겠지만 적들은 성벽 위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아래 부대에 지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병력 손실만 더 커질 게 분명했다.

하나 분한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이마를 부여잡으며 이를 가는 그녀였다.

“크윽!”

“비가 이렇게 갑자기 내린 것은 도저히… 어쩔 수 없잖습니까? 총리님. 또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습니다.”

“그래, 우선… 우선은 현 사태부터 수습해야… 한다!”

부관이 그녀를 위로하면서 현 상황을 지적했고, 그녀도 이렇게 500년간 쌓은 공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다시 머리를 굴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이 비를 피하는 것이 먼저였고, 추위와 피해를 막는 것부터 생각하며 플레임호거 장군을 불러서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 최선이었지만 쉽게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그녀였다.

하나 반대로 발데리안군 측은…….

“자자!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귀족분과 기사분들은 각 부대별로 기침, 감기 증상 및 발열을 확인해서 보내 주십시오. 겨울비는 적군의 위협보다도 더 지독합니다. 또 전염병이 퍼지게 되면 너 나 할 거 없이 큰일 나기 때문에 서둘러 주십시오. 자자, 움직이십시오. 이곳의 저택과 상회의 창고들을 빌렸으니… 신속히! 젖은 옷은 얼른 갈아입히시고! 어서 빨리 움직입시다!”

“오, 역시 굉장하군.”

“케드론 님도 어서 가서 거들어 주십시오. 진짜 손이 부족합니다.”

베오날드는 이미 발데리안 영지에 전갈을 보내어 즉시 타 영지에서 온 부대까지 머물 수 있는 영역과 건물을 확보해 둔 상황. 증상에 따른 환자 분류 및 씻고 난 뒤 입을 의복 마련 등등… 모든 서포트가 철저히 준비되었고 실행되고 있었다.

특히 대단한 것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건물을 확보하기 위해 상회들을 설득하고 피해 보상을 약속해서 그들이 가진 창고 내에 있는 물건을 그냥 밖으로 버리게 만들고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한 점이었다.

보통이라면 보상을 약속해도 부담이 되기 마련인데, 베오날드에겐 어차피 막강한 자금력이 있기에 시원하게 설득해 버린 것이었다.

“와, 이거 뭐야? 목욕탕? 게다가 물이 뜨거워!”

“베오날드 님께서 마련해 주셨대… 대체 기름을 얼마나 모아 두신 거지?”

“본래 수성전 한다고 엄청 비축해 두셨다고 하니까… 와, 따뜻하다. 그냥 여기서 자고 싶다.”

수성할 때를 대비해서 기름을 모아 두는 것은 고금동서 기본 중의 기본. 끓는 기름을 붓는 것부터 시작해서 불화살 만들기, 각종 무기와 장비류 관리 등등… 쓸 곳이 무한하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당연히 지금 이 지독한 겨울비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귀족들의 저택에 있는 목욕탕까지 개방시켜서 일반 병사들 모두를 씻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개방시킨 거래? 보통 귀족 양반은 우리 같은 놈들이 발만 디뎌도 싫어하실 텐데…….”

“그것도 베오날드 님이 해결하셨다더라. 참 대단도 하셔…….”

물론 불만을 가지는 발데리안 영지에 저택을 가진 귀족들도 있었지만, 병사들을 하나라도 더 살려야 저 노이멀 총리를 막을 수 있다는 명분 아래에 모조리 묵살되었고, 발데리안 백작도 승낙했기에 동원이 가능했다.

“15분 뒤에 나가야 한대… 사람들 엄청 많대…….”

“젠장… 그건 좀 아쉽군.”

“이렇게 해 주시는 거 자체가 어디냐. 우리 같은 일개 병사들에게……. 솔직히 우리 평소에도 이 정도로 안 씻잖아. 애초에 이런 목욕탕 자체가… 사치지.”

“그건 맞아. 이게 어디냐… 후우우…….”

심지어 병사들에게도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교대로 목욕과 샤워까지 할 수 있게 목욕탕까지 꾸려 놓을 정도로 사후 처리가 완벽한 덕분에 비록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은 사상자 다 합쳐서 약 2만 5천가량으로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병력 관리와 정비를 철저히 한 덕분에 이 겨울비로 인한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고, 일부 병력만 병으로 격리시켜 둘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 너희들 모두… 하루에 잠은 3시간씩밖에 못 자게 되었다. 미안하다. 하하하하! 하지만 나는 한 시간만 잔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럼 어쩔 수 없죠. 하아아… 이제 죽었다. 우리는…….”

“멋대로 죽지 마라. 대신 각성제랑 포션은 무한정 지급할 테니… 하하하! 일단 일해라! 조금이라도 더! 일해!”

“전장에서 죽을걸…….”

물론 이런 조치들을 취하는 데는 베오날드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실컷 일하고 돌아온 전투 마법사들 포함 기사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일해야 했지만 간신히 잡은 승기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인류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베오날드는 점점 짙어지는 자신의 다크서클을 보며, 정신을 다잡고 계속 서류를 처리하고 전갈을 보내어 업무를 처리해 나간다.

그 깐깐하고 쪼잔한 여신이 내려 준 찬스를 절대로 헛되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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