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가르칸 군대의 강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베오날드뿐만 아니라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들과 군사 지휘관들도 그것을 감안해서 전략을 짜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하나 기존에 ‘우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혼란스러운 전쟁 상황 중에서 하나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가르칸 군대의 강함만 생각했지 지휘관의 차이에 대해서는 놓친 것이었다.
“좌측 3천을 물리고 예비대로 교체, 후방 궁병대에겐 예비대로 교체되는 지금 집중 사격을 지시. 요테 장군과 페일 장군은 후방으로 보내고, 플레임호거 장군에겐 볼라스 장군과 웨더 장군을 붙여서 적진에 있는 저 갑옷을 노획하도록 노력해라. 그다음엔…….”
본진 가운데서 전황을 지켜보면서 실시간으로 지휘를 내리는 노이멀 총리. 그녀는 500년간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왔던 자다.
그 안에는 각종 정치적 기술, 개인의 무력도 있지만 역시 최고로 중요하게 배웠던 것은 지휘, 전략, 전술의 능력이었다.
‘대규모 전투라 그런가? 아냐. 뭔가 싸움이 힘들군.’
“키엑!”
‘전쟁 세대가 아니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는 감각이 무뎌. 하지만 뭔가 좋은 느낌이 아니야.’
몇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르면서 싸우고 있는 베오날드는 자신들이 약 2배가량 더 병력이 많고 앞뒤로 분명 포위해서 공격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밀어붙인다는 느낌이 없고, 싸움이 계속 힘들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던 베오날드는 전열에서 빠져나온 다음 잠시 물러나서 전황을 크게 보고자 했다.
‘대체 뭐가 문제……!’
조금 후방으로 나와서 뛰어올라서 전장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니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되는 베오날드였다.
가르칸 공화국 군대의 움직임이 이전에 싸웠던 우군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보병, 궁병, 기병, 마법사들의 지원, 하나의 군대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싸우는 광경은 베오날드도 감탄할 정도였다.
“하, 빌어먹게도… 아름답군.”
베오날드의 경우 복잡한 술식이 정리되어 있는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는 적군이지만 지금 너무나 아름답게 움직이면서 싸우고 있었다.
전쟁을 예술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대체 이게 자신과 얼마 전에 싸웠던 그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가 맞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던 베오날드는 정신을 차리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굉장하구나, 라라……. 그래, 약 500년간 이 전쟁을 위해서 넌 엄청 준비했겠지.”
딸아이의 실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베오날드는 더 이상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수 없었고, 안색이 점점 파래지기 시작했다.
적군은 지금 지휘관 한 명이 바뀐 것으로 인해 군의 질이 달라졌고, 이전에 상대했던 우군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 증거로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는 사방이 포위된 상태인데도 전혀 기세에서 밀리지 않고 발데리안 가문과 주변 영지에서 온 모든 병력들을 말 그대로 갈아 마시면서 대응하고 있었다.
‘이게 전략과… 전술의 차이라는 건가?’
베오날드는 직접적인 전투로 이기는 것보다는 계획과 큰 전략, 거기에 다른 요소들을 흔들면서 승리를 취하는 타입으로 싸우기 전에 이기는 상황을 만들거나 정치적으로 우위점이나 협상 포인트를 잡는 스타일이었기에 직접 싸우는 것에선 그리 메리트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 노이멀 총리는 그 반대로, 지금 전술과 군의 운용으로 직접적인 전쟁에서 우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기에 베오날드에게 최악의 상성이었다.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도 분전하고 있지만… 상황이 끔찍하군. 저기도…….’
멀리 있는 하이디의 모습을 찾아보는데, 치열한 격전을 치르면서도 더 이상 이전처럼 힘 있게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그들 단위의 무력 싸움에서는 하이디가 우세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가 치고 나가면 다른 곳에서 지원을 와 주고, 또 장군급인지 무시무시한 기운을 가진 엘프 하나가 다가가서 하이디를 막은 것이었다.
‘게다가 저 전열 뒤에 있는 후방 부대의 질은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좋으니……. 저번 전투 때 저놈들은 후퇴했었지?’
엘프, 드워프들로 이루어진 후방 지원 부대. 마법, 정령술, 드워프들의 공학으로 만들어진 여러 전쟁 기계들이 또 적절히 지원하고 있어서 절대 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베오날드가 처음 보는 것들도 많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금속으로 뒤덮인 마차 같은 것으로 연기와 불을 뿜어내면서 병사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으음, 이거… 안 좋아.”
이번 적들은 강하다. 정말 강하다.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끼어 있고, 병력이 2배나 있음에도 이 정도로 밀릴 줄 몰랐다.
게다가 개인의 무력이 강하기만 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한 적들의 장군은 지금 최고의 검이었다.
아무튼 이대로 두면 패배는 예정된 상황. 너무나 큰 전술적 역량과 군사력 차이로 인해서 병력 소모가 더 심해지면 가진 것도 잃을 판이었기에 그는 당장 싸움을 멈추고 병력을 물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러난들 뾰족한 수가 없을 텐데? 시간은 저들의 편.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결국 승리는 없어. 최대한 역량을 모은 이 총력전에서도 이기지 못하는 판국인데, 틈을 만들고 의심의 크기를 키운다고 해도… 이러면… 손쓸 게 없군.’
마갑주에 온갖 준비를 했음에도 이 정도 차이라면 더 이상 베오날드로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사태였다.
남은 방법은 이제 최대한 병력을 온존하기 위해서 후퇴하여 성으로 돌아가 버티면서 병력을 쪼개서 수도에 지원을 보내고 그 대단하신 용사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아니면 내가… 직접 목숨을 걸고 정체를 밝혀야 하는 건가? 아니, 의미 없겠지. 오히려 저 아이만 아프게 할 뿐이야. 하아아아~ 일단은 물러나야겠군. 제길! 망할 여신 같으니!’
베오날드는 이 패배 상황에 대한 수습을 설득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명목상 지휘관은 케드론이었기에 그를 설득해서 군을 물리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베오날드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신에 대해 원망의 말을 뱉으며 케드론에게 향하는데,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바람 같은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여신이 놀고만 있는 건 아님을 깨닫고 서서히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
노이멀 총리로서는 전투가 매우 순조로운 상황이었고, 진작 이랬어야 한다는 당연함에 만족 중이었다.
이것을 위해 500년간 철저히 준비했고, 힘들고 머리 아프고 암 걸릴 것 같은 다종족 의회제 국가에서 정치를 하고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군제 개편을 비롯한 각종 개혁을 진행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눈앞에서 불타 버렸던 베노피스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불태우기 위해서 말이다.
‘…제아무리 발악해 봐야 내 손안이지. 하지만 저 커다란 갑주는 쓸모 있어 보이는군.’
전황은 순조로운 상태였지만 그녀의 본래 예상보다 살짝 저항이 거셌는데, 그 원인으로는 마탑의 전투 마법사들도 있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이었다.
플레임호거 장군에게서 보고를 받고 제대로 본 것은 지금 전투 중이었는데,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상당히 쓸 만해 보였던 것이다.
‘이기면 저걸 노획해서 해석한 다음 써먹어 봐야겠군. 수도 얼마 안 되는데, 저것들이 압도적으로 강한 우리 전열을 막아 주면서 커버하고 있고, 거기에 장군들까지 상대하고 있으니…….’
본진에서 지휘에 힘쓰는 플레임호거 장군과 베오날드의 지시로 외면당한 요테와 페일 장군을 제외한 두 장군을 맡은 기사들을 보는데, 두 장군들이 밀리는 형세였다.
볼라스 장군과 웨더 장군 모두 싸움에 능한 자들인데 말이다.
물론 그 둘을 억제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자신이 군을 지휘해서 운용하고 있기에 군 대 군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노리는 게 느껴지니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전해 뒀는데… 다른 군대를 움직이면 그만이다.’
상대의 계획을 눈치챈 이상 지원 부대를 보내고, 장군을 노리는 자들이 있는 전선을 조임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전황이 거의 넘어온 것 같군요. 지금 놈들의 후방 쪽에서 어수선한 움직임이 보입니다, 사령관님.”
“알고 있다. 하나 방심은 금물이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성급히 하다간 의표를 찔릴 수 있다. 전열 부대보고 후방으로 빠지고 교대하라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내겐 더 큰 목적이 있다. 모든 것을 불태워야 하는 목적이…….’
500년 전, 알테리오의 배신으로 베오날드가 죽고 난 뒤 베노피스가 불타고, 무너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모두가 행복한 웃음을 짓던 도시가 베오날드가 죽고 난 뒤 서로 그 영광을 가지겠다고 싸우고, 서로의 것을 빼앗고 죽고 죽이면서 베오날드가 평생을 가꾸며 일구어 온 것을 파괴하던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거기에 어리던 그녀는 결국 고향을 파괴한 인간들의 전리품이 되어서 노예로 팔려 나가 수많은 굴욕과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일단 모친의 피를 받은 하프엘프라서 미모도 뛰어났고, 베오날드의 딸이라는 가치까지 있으니 베오날드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에 의해 잔혹한 고문부터 성적인 굴욕까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당할 수 있는 치욕은 모두 당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이날을 위해서, 이 복수심을 불태우기 위해서 그녀는 성 노예든 고문당하든 그 무엇이든 간에… 굴욕을 씹고, 가문을 부순 원흉들에게 아양까지 떨어 가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러면서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키우고,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인간들을 모두 불태워 버릴 거라고 곱씹었다.
‘하프엘프로 태어난 게… 이럴 땐 정말 다행이지.’
만약 그녀가 인간의 후손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겠지만, ‘하프엘프’로 태어나 긴 생을 얻은 것이 축복이자 불행의 단초였다.
그래서 그녀는 겉으로는 노예로서 아양 떨면서 주인에게 환심을 사면서도 내심으론 언젠가…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계속 복수심을 불태웠다.
자신은 수명이 길어서 시간이 있기에…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하고 말이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프엘프와의 로맨스 같은 걸 꿈꾸고, 친절하게 대해 준 멍청한 인간 덕분에… 살았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또 신전과 귀족들이 고의적으로 ‘노이멀 가문’에 대한 기록과 언급을 차단해 버리자 그녀는 일반적인 하프엘프 노예 취급을 받았고, 오랫동안 몇몇 가문에 팔리고 팔리면서 겉으로는 우호적인 태세를 취하는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며 애정을 준 젊은 귀족 남성이 있었다.
‘걱정 마시오. 나는 다른 인간들처럼 당신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
‘…기다리다 보니… 멍청한 놈이 걸리기 마련이었지.’
그리고 그 귀족 남성은 노이멀 총리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불신을 가졌는지 전혀 눈치를 못 챈 채, 그녀에게 매우 상냥히 대해 주면서 교육과 처우 개선… 가신과 같은 위치에 앉게 해 주었고, 기회를 얻은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교육을 받은 다음 그 기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어… 어째서…….’
그렇게 수십 년, 마음씨 좋은 인간에 의해 기회를 얻은 그녀는 고진감래하며 노예로 있던 다른 이종족들을 규합하고 현 제국 남부를 손에 넣은 정략혼인과 육욕을 미끼로 세력을 키워서 독립, 현 가르칸 공화국 영역에 숨어 있던 이종족들과 대회의를 걸쳐서 가르칸 공화국을 건국하고, 세력을 모아 지금에 이르렀다.
‘드디어 내 소망이 실현되어 간다. 이 세계의 인간들을 모두 멸한다. 지금 저렇게 죽어 가는 걸로는 부족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취도 남기지 않을 것이야.’
싸움 속에서 이제 승리가 보이고, 북쪽에서 마족들의 움직임도 들었다.
완벽한 승리. 이 군대만 물리치면 이제 인류의 멸망은 확정적인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저 앞으로 남은 일은 마치 숨어드는 벌레를 잡는 일 같은 유희뿐이다.
숙원을 이루는 날. 이렇다 보니 감동이라도 한 건지 그녀의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흐르기 시작한다.
“으음?”
하나 그녀의 표정은 승리를 확신했어도 지휘를 하느라 여전히 냉철함 그 자체였고, 자세히 보니 그 눈물은 눈물이라기엔 너무나 차가운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둘 늘어나면서 이제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비?”
투둑… 투둑…….
점점 늘어나는 그것은… 차갑디차가운 비.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그 무엇보다 지독하다는 ‘겨울비’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먹구름이 자욱이 몰려와 있었고, 거기에서 내리는 물줄기는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이라도 온 듯 차가운 겨울비가 전장을 때리기 시작하자, 노이멀 총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게 된다.
저편에 있는 베오날드가 미소 짓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