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네가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아르젠. 감히 내 앞에서 ‘노이멀’의 이름을 댈 줄이야.”
“아하하.”
농도 짙은 살기, 그리고 넘실거리는 보랏빛 오러를 뿌려 대는 선조님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아르젠은 당장이라도 땅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앞의 선조님도 무섭지만, 그녀에게 가라고 시킨 분이 더 선조님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시킨 건지. 하아아~ 물론 현생 노이멀 가문의 후예이니 그런 거겠지만…….’
“네놈이 생각 없이 그냥 ‘노이멀’을 자칭하지는 않았을 터. 어디 죽기 전에 알량한 발버둥이나 부려 봐라. 재주를 좀 본 다음엔…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그걸로 책을 만들어 베노피스의 지하에 보관해 주지.”
“그… 발데리안 가문 쪽에 대선조 베오날드 폰 노이멀 님의 유적이 있는 건 아시는지요? ‘둥지’ 말입니다.”
“‘둥지’가 존재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역으로 지정돼서 신전 놈들이 성가시기도 하고, 들어가려고 해도 아버님이 직접 설치한 술식과 각종 함정들이 있으니 쉽게 들어가지 못…….”
“거길 뚫었습니다. 그곳의 정체도 밝혀냈지요.”
“뭐라고?”
아무리 노이멀 총리라고 해도 베오날드 본인이 아닌 이상 그가 비밀리에 꾸린 ‘둥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둥지에 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차기 후계자뿐. 노이멀 총리는 그저 곁다리로 언급한 것을 듣거나 혹은 구속하고 있는 알테리오의 영혼에게서 알아내야 했는데, 알테리오의 영혼은 그녀가 손에 넣었을 땐 이미 사후가 오래되어서 기억의 망각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으며 고문으로 피폐해져서 정보라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니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곳을 어떻게? 게다가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아냈다고? 그곳을 뚫었단 말이냐?”
“예, 뚫었습니다.”
물론 베오날드 본인이 열고 들어간 거지만, 다른 의미로 보면 ‘본인이 뚫었다’고도 할 수 있다.
거짓말이 어려운 아르젠으로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한계.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알의 둥지’. 당시 대륙의 모든 서적과 지식을 모아 두었으며, 베오날드 폰 노이멀 님의 기록과 서책, 유언장 등등이 남겨져 있는 곳입니다.”
“뭐라고? 아… 확실히 그런 둥지가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
어찌나 충격이 큰지 끌어 올렸던 살기가 떨어지고,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는 노이멀 총리였다.
물론 ‘알의 둥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곳에 모든 서적과 지식을 모은 것까진 진실이지만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기록과 서책, 유언장이 있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다.
원래 거짓말이란 진실과 거짓을 섞을수록 더 효과적이었기에 베오날드가 특별히 짜 준 것이었다.
‘아니지, 내가 지금 가서 기록이랑 서책, 유언장을 만들어 놓으면 거짓이 진실이 되는 거 아닌가? 하하하.’
여기 오기 전 신나게 웃으면서 자신에게 말하던 베오날드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아르젠이었다.
물론 중간에 끼인 처지인 아르젠은 기분이 묘했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계획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곳에는 베오날드 님이 직접 남기신 저희 선조 알테리오 폰 노이멀 님을 위한 유언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설사 자신을 배신하더라도 알테리오는 노이멀의 가족임을 부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고?”
“예. 의외로 이건… 찾으라고 놔두신 건지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보이십니까?”
동시에 품에서 베오날드가 직접 눈앞에서 써 준 유언장이라고 할 수 없는 유언장을 내미는 아르젠이었다.
그것을 본 노이멀 총리는 그 유언장을 단숨에 낚아챈 다음 읽어 내려가며 진위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하는데… 필체, 문장, 말버릇, 거기에 찍혀 있는 인장에 있는 ‘마법 술식’까지. 전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 봤지만 진짜였다.
“어… 어떻게 이런 게 남아 있는 거지? 어떻게?”
“심지어 언제든 후손들이 볼 걸 생각하셨는지 보관 술식까지 철저히 되어 있더군요.”
“…그렇구나. 그분은 역시 모든 걸 알고 계셨던 거구나.”
‘이 선조님은 대체 베오날드 선조님을 얼마나 경외시하고 있는 건지. 이게 먹힐 줄이야.’
사람의 선입견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다.
부친인 베오날드를 광신적으로 모시는 노이멀 총리로서는 베오날드가 7일간 세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가 했다는 확신만 있으면 아무런 의심이 없는 것이었다.
하나 그 정도로 믿고 사랑하기에 세상을 불태우려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군. 좋다. 네가 ‘노이멀’의 이름을 자칭하는 것은 합당하다. 하나 그것만을 말하러 이곳에 온 건 아닐 텐데? 본 목적이 뭐지?”
“노이멀의 이름을 돌려받았으니 제겐 당연히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지요. 또… 다른 유산들도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선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좀 더 자세히 알아보니 ‘크멜 가문’에서 파고 있는 유적과 다이나 왕국 근처에도 유적이 하나 더 있는 것까지 알아내었습니다. 부디 선조 베오날드 님이 남기신 재보와 유산을 지키기 위해 가문을 다시 일으켰으면 합니다. 원하시면 가주의 자리도 양보하지요.”
아르젠의 말에 순간 멈칫하는 노이멀 총리. 갑자기 제안을 받은 베노피스의 부흥과 베오날드의 유산 발견에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증오의 기반이 부친 베오날드에 대한 사랑이었기에 그의 유산과 노이멀 가문이라는 가치가 주어지니 살짝 갈등하는 그녀였지만, 사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조금은 재미있는 소리를 했다만…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님이 만드셨던 ‘노이멀 가문’이다. 그것을 파괴한 인류를 모두 멸살하는 것. 아무리 좋은 보물을 만들어 주어도 가치를 모르는 자의 손에 있으면 소용없지. 그러니… 다시 만든다고 해도 이 대륙을 정화하고 나서 할 것이다.”
“과연…….”
“그러니 진짜 노이멀 가문을 부활시키고 싶다면 내게 협력하는 게 더 순리가 아니겠느냐?”
“아… 그렇… 지 않죠. 네, 크흠!”
순간적으로 노이멀 총리의 위압감과 압력에 ‘그렇죠.’라고 말할 뻔한 아르젠이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정신줄을 잡았고, 역시 자신은 이런 일에 맞지 않는다는 걸 느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꺼졌던 분노의 불길은 그녀를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시시한 이야기나 하러 오다니……. 지금 당장 널 베고 싶지만, 이 유언장과 ‘노이멀’로서 인정받은 점을 생각하여 오늘은 그냥 보내 주도록 하지.”
“그… 그거 정말 감사합니다.”
“썩 물러나라.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예! 옙!”
아르젠은 혹시나 그녀의 생각이 바뀔까 봐 체면도 잊어버리고 냅다 도망쳤다.
솔직히 지금까지 버틴 것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으로 급히 돌아갔다.
홀로 남은 노이멀 총리는 아르젠이 남기고 간 유언장을 바라보면서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아빠…….’
지금은 없는 사랑하는 아빠의 자취가 오랜만에 그녀의 기분을 좋게 했고, 그녀는 마치 그것이 베오날드의 손인 양 뺨에 비비면서 잠시 행복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하나 그것도 아주 잠시뿐. 행복한 기억 뒤엔 또다시 가혹한 아픈 기억들이 같이 되살아났다.
불타오르고 파괴되는 베노피스, 노이멀 가문에 충성했으면서 자신의 이익만 챙기던 아귀 같은 인간들, 길로틴에 목이 잘려 나간 베오날드의 모습, 활활 타오르는 풍경이 그녀의 눈을 빛나게 했다.
“…그래, 받았으면 우리도 갚아 주면 되는 법. 후후훗, 그러네.”
그러면서 문득 얼마 전에 받은 ‘얼음 정원’의 풍경도 떠올린 그녀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
“선조님! 이거 두 번은 시키지 마십시오!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 그러냐?”
그리고 돌아온 아르젠은 베오날드를 만나자마자 주저앉더니 벌레처럼 기어가서는 그에게 고되었음을 성토하며 난리를 부렸다.
베오날드로서는 그 정도로 자신의 딸이 무서운가 싶어서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사람이란 결국 입장의 차이에 따라 보는 풍경도 다른 법이었다.
“진짜로 살기등등하고, 오러 풀풀 피어오르고, 심지어 검까지 뽑은 상태였다니까요! 진짜 눈 깜짝하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하하, 미안하군.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시키지 않도록 하지. 아무튼 정찰 수고했다.”
“예.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하아아아아~”
‘아무튼 이걸로 살짝 흔들어 보긴 했는데… 무슨 반응이 오려나?’
딸에게 아르젠을 보낸 것은 한번 심리를 흔들어 보기 위한 일이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겨울이 되기에 버티기만 하면 우위에 있었지만, 전선은 이곳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부는 크멜 가문이 전통적인 기사 명문답게 잘 막아 내고 있었지만 북부가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전선이 넓은 데다 가르칸 공화국의 수인이나 이종족 못지않게 강력한 마족들이 밀어닥치니 엄청난 희생이 나고 있어 매일매일이 지옥이라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진짜 그냥 망하게 둘 생각인가? 망할 여신. 하아아…….’
이렇기에 그냥 참고 공성전을 버티는 건 해답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설사 지금 시간을 끌어서 서로 휴전을 맺더라도 장기적으로 위험 요소를 남부에 두고 북부의 마족과 맞서는 것은 엄청난 손해였기에 반드시 어떻게든 이번 전쟁에서 가르칸을 쳐부수고 노이멀 총리를 실각시켜야만 했다.
‘상당히 어려운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원……. 하다못해 전쟁은 용사님에게 맡기고 싶단 말이지. 하아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는 한숨을 쉬는 모션만 취하면서 입을 가렸다.
‘하긴… 이 정도로 힘드니까 그 망할 여신이 나한테 맡긴 거겠지. 내가 적임자니까 지옥에 떨어진 놈을 건져 올려서 써먹은 거고 말이야. 후우우…….’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베오날드는 다시금 기합을 넣고 해야 할 일부터 해 나간다.
그에겐 지금 이곳 전선의 일뿐만 아니라 발데리안 영지와 주변 영지의 행정 작업과 다이나 왕국 쪽에 마련된 농장 및 교역 등등… 다양한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전쟁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공성과 수성의 대치가 이어진다.
하나 베오날드는 편하게 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지금 성벽 위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서 각종 서류에 사인과 내용을 채워 넣는 일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후우~ 이런 마당이니, 속 시원하게 쳐들어와 줬으면 좋겠군.”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베오날드 님이 아니면 이 업무들은 모두 처리하기가 힘든지라…….”
“아닐세. 그냥 해 본 말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업무량을 받으면 스트레스와 과부하로 죽어 마땅했지만, 베오날드는 천생이 행정가 체질인 데다 대륙 전체를 지배한 제국을 수십 년간 경영했던 노하우가 있기에 버텨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겨울이 왔군.”
“저기, 베오날드 님, 저기에…….”
“뭐지?”
어느덧 겨울이 온 것을 알리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베오날드는 서류에 사인을 해 나가는데, 눈앞의 적 진영에서 갑자기 군사들이 튀어나오는 것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고개를 돌리자 그 병사들은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