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그리고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가 하나로 합쳐져 올라온다는 소식은 베오날드군에도 전해졌고, 그들은 즉각 후퇴를 시작,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피난길에 올랐다.
특히 무서운 건 4만 5천가량의 가르칸 공화국 군대는 다른 영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서운 속도로 진격한다는 점이었는데, 그래서 넉넉하게 하루가량의 거리를 벌리고 있던 베오날드군은 놀랍게도 쫓기는 형세가 된 것이었다.
“발데리안 성을 노리는 것 같군.”
“성으로 직진한다는 겁니까?”
“그래. 아무래도 가르칸은 이제 결전 모드로 들어간 것 같군.”
“그럼 수성전으로?”
“그래야겠지. 성벽의 유리점을 살리는 게 좋으니 말이야. 게다가 거기 성 구조는 내가 더 잘 알지.”
발데리안 성의 튼튼함과 구조는 베오날드 자신이 직접 만든 만큼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수성하기에 더욱 유리했고, 오래전부터 전쟁 준비를 튼튼히 해 왔기에 알맞은 상태였다.
더불어 거주 영역의 부족함은 다이나 왕국의 영역을 잠시 공유할 수 있으므로 충분히 대비가 된 상황. 수성전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나저나… 가르칸은 공성전을 어떻게 하려나? 역시 드워프들이 나서려나?’
다만 그도 체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해선 어쩔 수 없었기에 그 점을 관건으로 대비하자고 생각하며 군을 이끌고 성으로 돌아갔다.
***
그 뒤, 진군하는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는 약 일주일이 걸려서야 발데리안 성 앞에 도착하게 된다.
본래 진격 속도라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보급로 확보가 중요했기에 그들의 행군은 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뛰어난 가르칸의 병사들은 특히나 더 많은 양을 먹고 마셔야 했기에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성도 결국 배부르고 등 따스워야 주장할 수 있는 법. 만약 굶주리게 되면 오크, 리자드맨 같은 야만족 출신들은 지체 없이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오… 꽤 제대로이지 않은가?”
성벽 위에서 베오날드는 케드론과 함께 앉아서 멀리서 진을 친 적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영을 꾸리긴 했는데, 보통 공성전을 하는 측들보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걸 보면 마갑주들로 운용하는 원거리 무기를 경계한 듯싶었다.
그리고 진영에서는 목조 건축물 같은 게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아주 작은 인간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기에 무엇일지는 뻔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워프들이 공성 무기를 만드는 것 같네요. 으음… 만들어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닌걸요?”
“드워프이니 말이지.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이대로 수성을 할 건가?”
“예. 성벽의 유리점은 살려야 하니 말이죠. 그리고… 이게 본래의 전쟁 아니겠습니까?”
야만족과 싸우는 야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귀족 간의 세력 싸움은 사실 공성전과 수성전의 반복이었다.
애초에 ‘기사’라고 하는 초월적인 인간의 숫자나 병력이 지고 들어가는 쪽은 얌전히 식량을 쌓아 둔 수성으로 버티고, 공성하는 쪽은 자기 병력의 손실을 감내하고 쳐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느냐 하는 싸움. 베오날드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일상 같은 것이다.
“음, 아무튼 이제부터… 꽤 오랫동안 싸워야 할 겁니다. 적들은 어떻게 해서든 여길 넘어와서 발데리안 가문을 파멸시키려 들 테니 말이죠.”
“여기가 최후의 보루인가… 하긴 제국 수도도 지금 난리이니…….”
“드디어 그곳들에 난리가 났습니까?”
“그렇다네. 소식이 전해져 온 걸 보니 북쪽에서 마족들이 쳐들어왔다는군. 엄청 대량으로 말이지. 게다가 늘 그렇듯 볼레아에서 야만족들이 크멜 가문을 향해서 쳐들어오고 말이야. 자네가 미리 보내 놓으라던 물자와 식량이 엄청 큰 도움이 되고 있다더군.”
“그거 다행이면서도… 다행이 아니군요.”
계획이 성공한 건 좋았지만 그래도 수도가 공격받은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적은 마족들. 끊임없이 몰려오는 재앙인 그들은 인류를 불태우기 위해 쉬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이곳이 버티더라도 그곳이 무너지면 세계가 끝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이곳의 전쟁을 끝내고 구해야만 했다.
‘대체… 용사 양반은 어디서 뭘 하는 걸까? 이 정도 위기면 슬슬 등판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참 내.’
베오날드는 더럽게 꼬여 가는 현 상황을 생각하며 빨리 세상을 구할 용사님이 오길 바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전엔 단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여신을 찾게 되니 아이러니한 그는 ‘어떻게든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수성전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날, 본격적으로 가르칸 공화국의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드워프들이 만든 투석기를 시작으로, 화약을 쓰는 그들은 대포까지 꺼내서 본격적인 공성 전략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제 마스터 엔지니어인 플레임호거 장군의 가치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하나 포부터 사격 준비! 훈련한 대로 시간 차를 두고 쏴라! 투석기도 신호에 맞춰라!”
“옙!”
콰아아아앙! 투우우우웅!
일제히 발사된 투석기와 대포의 사격. 언뜻 보면 대충 만든 것 같지만 소재의 탄력과 위력을 정밀하게 계산해서 만든 것이며 위력까지 잘 알고 있기에 대포나 투석기라 생각되지 않을 적중률이 나오고 있었다.
“허… 뭐야, 이거?”
“으아아! 흔들린다!”
그동안 어떤 적을 만나도 거의 당황하지 않았던 베오날드가 놀랄 정도로 일제히 쏘아진 화포는 총 24문, 투석기 36개가 모두 성벽의 한 점을 두드려 탄착군을 형성했고, 일제히 쏜 게 아니라 시간 차를 두고 했기에 한 곳을 연속으로 두들겨 대는 꼴이었다.
“이러면 부서질… 어? 살았군.”
베오날드는 상대의 공세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위력이 있고 사격의 정확성이 높아서 순간 당황했고, 성벽이 부서질 거라 생각했지만 천만다행하게도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아예 부딪치지 않은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푸른 마법진들 여러 개가 겹쳐서 성벽에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휴우~ 전투 마법사들이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혹시 몰라서 미리 언질을 해 놨는데…….”
“아르젠! 아주 잘했어!”
“이 성벽을 직접 만드셔서 신뢰하시는 건 알겠지만, 상대편에도 그걸 아는 분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십시오.”
“…그렇군. 맞아. 라라가 저기에 있었지. 아… 그러고 보면 여기 만드는 거, 그 아이한테 자랑을 하기도 했었지.”
라라는 특히나 베오날드를 가장 좋아하던 아이라서 그런지 일하는 중에도 종종 찾아왔고, 그 아이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곤 했었다.
그리고 때론 일하는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많이 보여 주었는데, 라라는 베오날드가 하는 것이면 뭐든 좋아했고 질려 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이니만큼 자신의 창조물을 어떻게 부술지 잘 알고 있으리라.
“…서글프군. 아…….”
저 멀리 아래, 익숙한 머리칼이 흩날리는 게 보인다.
진영을 돌아다니면서 점검을 하는 라라였다.
이전에 막사에서도 보았고, 정체를 속이고서 자주 대화하곤 했지만 또 막상 이렇게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드는 베오날드였다.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되어 간다.
아무리 질이 좋아도 공성전을 직접적으로 하기엔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가르칸 측은 계속 공성 무기를 활용해서 성벽을 두드리면서 공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베오날드 측은 그 공격을 전투 마법사들과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통해서 받아치는 걸로 응수하면서 시간은 하루, 이틀 계속 지나가게 된다.
“지겹군.”
“…뭘 새삼. 이게 전쟁인데 말이지요.”
“뭔가 다른 수단을 쓰는 건 어떤가? 가령 보급로를 급습한다든가 말이지.”
“으음,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놈들이 그 정도 대비는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괜히 나간 병력들이 둘러싸여서 잡아먹힐 가능성이 크지요.”
“그럼 다른 영지의 부대와 협공하는 건? 사방에서 공격하는 전략은?”
“장군 여섯이 모두 모여 있는 가르칸 최정예군을 상대로 말입니까?”
그 말이 나오자 순간 말문이 막히는 케드론이었다.
베오날드의 말대로 지금 저 군에는 가르칸 공화국에 단 12명밖에 없는 장군이 무려 6명이나 모여 있었다.
군사 숫자는 적어도 그들의 무용이 뛰어난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밖에 나가서 그냥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게 전에 그 둘을 죽였어야지!”
“그래 봐야 가르칸에 남은 장군들을 부르면 그만이죠. 아무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 생각이 있으니 말이죠.”
“하아~ 부디 그러길 바라겠네.”
“그리고 저쪽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유를 가져도 됩니다. 저희는 홈그라운드지만 저쪽은 엄연히 원정군이니 저기도 난감할 겁니다. 뭐… 아직 카드를 내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요.”
지금 정체를 확실히 아는 적의 장군은 딱 4명. 저 공성 무기들을 통솔하는 플레임호거 장군, 요테 장군, 페일 장군, 그리고 사령관인 라라 폰 노이멀이었다. 그 외 2명의 장군들이 더 있기에 변수는 아직 남아 있는 상황. 베오날드는 그 카드를 보기 전에 먼저 움직이지 않고 신중히 가기로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나 조치를 취해 두지요. 백작님에게 이야기할 건 있어야 하니 말이죠.”
“그거… 참 다행이군.”
그렇게 말하며 케드론을 안심시킨 베오날드는 적진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들도 물론 제국 수도가 공격받는다는 위급함이 있었지만, 이런 때일수록 쫄지 말고 더 대범해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가르칸군 진영.
베오날드의 예상대로 며칠 내내 공성 병기로만 두드리는 작전은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기사라든가 마갑주보다는 적들이 가진 ‘전투 마법사’들의 변수가 엄청 컸는데, 마탑에서 이 정도로 발데리안 가문에 협력해 주는 건 노이멀 총리로서도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지? 다이나 왕국이 저렇게까지 열심히 싸워 줄 의리가 있던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내가 달켄 다이나를 죽인 게 들통이 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아니지. 그 인간이라면 혹시…….’
본래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이미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뚫린 채로 열띤 격전을 펼치고 있어야 하는데, 성벽은 아직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다이나 왕국의 마법사들이 이렇게나 열성적으로 싸워 주는 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 게다가 공세를 더 강하게 하려고 해도 가지고 온 물자나 상황의 문제가 있었기에 변수를 주기가 매우 힘들었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풀려고 해 봐도… 어차피 인간들을 절멸시키러 온 우리에게 협력할 놈들은 없겠지. 아니면 우회해서 다른 영지부터 쳐부숴 볼까? 아냐. 놈들은 이미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기가 막히게도 청야 작전을 실행했어. 계속 대영주의 영지로 도망칠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한다?’
“사령관님, 적에게서 사신이 왔습니다.”
“…사신이라고? 하, 어이가 없군. 서로 이야기할 게 있을 관계가 아닐 텐데? 돌려보내라.”
“그게… 자신을 ‘아르젠 폰 노이멀’이라고 소개해서…….”
“아르젠 그놈이? 당장 들라고 해라!”
설마 그놈이 이 발데리안 가문 전선에 있단 말인가?
심지어 자신을 향해서 감히 ‘폰 노이멀’을 자칭하다니. 당장 오늘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노이멀 사령관은 눈에 불을 켜고, 허리에서 검을 뽑으며 들어오라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