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음, 그게 좋겠군.’
몇 보 안에 생각을 마친 베오날드는 그들에게 도달하게 된다.
비무장 상태에 예복을 입은 화려한 베오날드의 모습은 장군들뿐만 아니라 양군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베오날드는 우선 형식상 케드론에게 예를 갖추고 그에게 재가를 얻은 다음에 요테 장군 쪽으로 다가간다.
“역시 가르칸의 장군, 밤새도록 싸웠는데도 멀쩡해 보이니 대단하시군요.”
“크르르릉… 네놈이 대장이냐?”
“대리인입니다. 위험한 짐승 앞에 대장을 보일 순 없으니까요.”
뒤에 말을 타고 멋지게 앉아 있는 케드론을 가리키면서 베오날드는 능청을 떨었다.
요테와 페일 장군은 베오날드를 노려보면서 살기를 풀풀 풍겼지만, 베오날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여유 있게 자신이 할 말만 해 대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다는 걸 느낀 요테 장군은 베오날드가 배짱이 두둑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크르르르! 아주 현명하구나! 젠장! 망할 놈 같으니! 그럼 우릴 욕보이러 온 게냐?”
“그건 아니고, 제안 하나 하러 왔습니다.”
“제안? 크르르… 투항하라는 건가?”
“아뇨. 그런 시시한 제안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저희의 제안은 바로 뛰어난 가르칸의 장군님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더 쉬운 말로는 풀어 드린다는 거죠.”
베오날드의 충격적인 말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경악한 채 모두들 그와 케드론을 번갈아 보며 이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베오날드에게 모든 걸 위임한 케드론마저도 다 잡은 가르칸의 장군을 풀어 준다는 것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끄으으응…….’
불안해하는 케드론과 다르게 완전히 의표를 찔린 듯 요테 장군은 버럭거리면서 베오날드의 말에 화를 냈다.
“기회? 풀어 준다고? 하! 기가 막히는군!”
“예. 이번 전투, 솔직히… 많이 억울하지 않으신지요? 이대로 죽기엔 억울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억울하지! 크르르르르! 망할 수작만 아니었더라도! 아니! 망할 플레임호거 영감탱이가 방해만 안 했어도! 달랐을 거야!”
“예, 그렇지요? 저희 또한 그런 가르칸 장군들의 무용을 제대로 상대하고 싶기에 보내 드리고자 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살려 준다니… 이건 찬스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요테, 페일 장군 둘 다 베오날드의 제안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죽음의 문턱에 와 있는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할 바보는 없었다.
두 사람의 기색이 바뀐 것을 눈치챈 베오날드는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 가는 것에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란 없는 게 인지상정. 그들에겐 대가가 필요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딱 두 가지죠.”
“크르릉? 조건?”
“하나는 풀어 드리는 건 두 장군님뿐입니다. 다른 병력들은 저희가 포로로 삼을 겁니다.”
“큿! 별것도 아니군. 무능하고 약한 놈들을 데려가 봐야 소용없지. 크르르릉! 좋다! 다음은?”
“노이멀 총리님께 서찰 하나를 전하면 됩니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요테 장군에게 서찰이 담긴 통을 건네주었고, 받은 즉시 두 장군은 진형을 빠져나갔다.
남은 가르칸 공화국의 병사들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사방은 이미 적군이 포위한 상태였고, 두 장군은 잽싸게 빠져나간 지 오래라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찰을 가지고 간 두 장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동안 베오날드는 케드론을 비롯해서 기사들에게 두 장군을 풀어 준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물론 저 둘을 여기까지 몰아넣었으니 지금 여기서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전투에서 이기는 것보단 역시 전쟁을 이기는 게 더 좋으니 그렇게 했습니다.”
“정말 이걸로… 이길 수 있나?”
“몇 가지 조치만 더하면 말이죠.”
“조치? 뭘 말인가? 거긴… 포로들?”
베오날드는 포로들이 있는 방향을 슥 쳐다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거기서 뭔가 싸늘함과 불길함을 느낀 케드론이었는데, 그가 무슨 짓을 할진 몰라도 결코 평범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는 불안해하면서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듣고 경악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베오날드는 언제나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자였다.
***
이틀 뒤, 가르칸 공화국 본진.
베오날드가 이끄는 군대가 한참 전투하는 동안 본진과 좌군은 파죽지세로 전진해서 치고 올라갔지만, 발데리안 가문은 철저히 저항하면서도 능숙하게 빠져나가며 시간을 끌기 위해 북쪽으로 후퇴를 반복할 뿐이었다.
노이멀 총리는 3만의 군대가 우군 쪽으로 갔다는 전갈에 이미 본진으로 돌아와서 전투 지휘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저 발데리안군을 쳐부술지 고민하며, 부관과 하위 지휘관들과 함께 지도에 표시해 가며 한창 회의 중이었다.
“사, 사령관님! 요테 장군과 페일 장군이 지금 도착했습니다.”
“…지금 그 둘이 여기에?”
“예! 그… 상태를 보니 아마 패전한 것 같습니다.”
“플레임호거 장군이 돌아왔을 때 그건 이미 예감했는데, 둘이 살아 돌아올 줄이야. 그거 다행이군.”
이미 마스터 엔지니어 플레임호거 장군이 먼저 수인들을 제외한 우군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후퇴했을 때 패전 소식은 들었었다.
그리고 그 둘이 끝까지 남아서 싸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귀중한 ‘장군’이 허망하게 죽을 것 같았는데, 살아 돌아오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기쁜 일이었다.
“정말 돌아왔군! 그래, 몸은 어떤가?”
“무사합니다, 사령관님.”
“그래, 정말 다행이야. 한데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가? 그대로 싸우다가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그… 그게… 말하자면 좀 깁니다, 사령관님.”
“음, 좋아.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요테 장군과 페일 장군은 무릎을 꿇은 채로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고, 뭔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그녀는 둘을 본영으로 데리고 와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다.
다만 이미 베오날드가 펼친 전략이나 전쟁의 과정에 관해서는 다 들었기에 앞부분은 생략하고 뒤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고, 병력을 남기고 자신들만 빠져나온 것을 알려 준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분명 이 둘은 엄연히 장군인데…….’
“그리고 이 서찰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후우우… 어디 보도록 하지.”
곧바로 서찰을 받아서 열어 본 노이멀 총리.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필채라는 생각이 슬쩍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접고 본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노이멀 가문의 후예인 라라 폰 노이멀 총리에게…….
가문의 영광과 사랑을 위해 싸우는 당신을 위한 선물을, 당신의 장군들을 잡은 곳에 마련해 두었으니 와서 챙겨 가시오. 그리고 한번 부서진 정원은 돌아오지 못하니, 노이멀의 후예라면 새로운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보시오.>
‘…선물? 그리고 정원?’
‘정원’. 노이멀 가문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다.
귀족이 자신의 영지나 세력권을 칭할 때 쓰는 말. 특히 500년 전 부친인 베오날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 말이었다.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말투에다 단어까지 쓴 걸 보니 노이멀 가문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고 여기는 그녀였다.
‘설마… 다른 후예인가? 그렇다면… 직접 가 봐야겠군.’
본래라면 굳이 보러 갈 필요가 없거나 사람을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노이멀에 대해 아는 자의 ‘선물’이라면 혹시라도 뭔가 의미가 있을 수 있기에 그녀는 당장 요테 장군과 페일 장군을 불러서 그들이 패배했던 위치를 물어서 찾아가 보기로 한다.
더불어 혹시 무언가 함정이나 꿍꿍이가 있을 수 있기에 그녀는 본진에서 일하는 장군들과 자신의 직속 부대원들 1천 명을 데리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빨리 다녀오겠네. 그동안 본대를 잘 부탁하네.”
“예, 사령관님. 얼른 다녀오십시오.”
“가자! 이랴!”
전쟁 중 선물이니 뭐니 확인하러 가는 건 시간 낭비였지만 그래도 소중한 ‘노이멀 가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에 그녀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대륙 규모로 인류를 불태우려는 이유가 뭔가?
바로 부친과 노이멀 가문에 대한 사랑과 그 복수를 하기 위함이니, 그녀는 절대로 이 서찰의 내용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달린 그녀와 친위대는 자신들의 우군과 발데리안군이 싸웠던 전장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리 정리했다곤 하지만 전쟁으로 뿌려진 피와 고기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하나 노이멀 총리는 이런 냄새엔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전장을 가로지르며 주변을 살피는데, 그때 친위대원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사, 사령관님! 저, 저기에!”
“음? 뭔가 발견했나?”
“저기 뭔가… 얼음 기둥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얼음 기둥? 이 계절에?”
이제 거의 다 지나가긴 했지만 지금은 가을. 곧 겨울이 오겠지만 아직 얼음이 얼기엔 이른 날씨였다.
기이하게 여기면서 아무튼 친위대원들을 따라서 얼음 기둥이라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친위대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대체 무슨 일이지?”
노이멀 총리는 부하들과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고, ‘얼음 기둥’이 있는 곳까지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가간 다른 친위대원들도 경악하기 시작하는데, ‘얼음 기둥’이 있는 건 둘째 치고 그 안에… 그 안에 있는 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얼음 안에 있는 것은 바로 수인의 시체. 하나 처음엔 다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시체인 줄만 알았던 것인데, 왜냐하면 그 시체는 ‘가죽’이 모두 벗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음 기둥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정원에 꽃들이 가득한 것처럼 잔뜩 피어 있었다.
“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우웨에에에엑! 아니, 미친!”
“이건… 좀 아닌데? 우웁! 우우웁!”
노이멀 총리의 부하로서 가르칸 공화국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참혹한 것을 많이 본 친위대원들도 안색이 파래지거나 누군가는 구토를 하면서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경악은 더 커졌는데, 가죽이 벗겨진 게 경악스러워서 잘 보지 못했지만 안에 있는 수인들의 시체 모두 고통과 절망, 공포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모두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얼음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 인간보다 생명력이 강하고 튼튼한 수인들이기에 가죽이 벗겨져도 인간보다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이런 작품이 나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마치 ‘정원’의 꽃처럼 수백 개나 피어 있는 광기 어린 광경.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는지. 바라본 자들은 경악과 공포에 당분간 잠도 제대로 못 들 정도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건… 노이멀의 방식이군. 하나 누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것보다 더한 것을 보고 자란 노이멀 총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서 이 ‘얼음의 시체꽃’이 핀 정원을 감상하며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지 생각하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