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밤중의 화염으로 불타는 가르칸의 진영은 사실 그 크기에 비해서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고작해야 운용할 수 있는 포는 약 20개. 열심히 쏜다고 해도 그 피해 범위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하나 베오날드는 아주 영악하게도 그 화력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잘 알고 있었고, 이미 낮에 싸울 때 여분의 병력으로 정찰을 하여 상대 본진의 상황이 어떨지 알아본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쳐도 그렇지, 병력이 많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모르는 건가?’
개별적인 질에선 떨어져도 결국 눈과 손이 많으면 준비할 수 있는 게 많은 법. 원래 약한 측에서부터 치열한 싸움 끝에 올라온 베오날드이기에 뱀처럼 암약을 꾸미는 건 능숙했다.
그래서 사전에 상대에 대한 조사도 끝내 놓았고, 아주 효율적으로 상대의 식량 창고와 무기고 쪽을 중심으로 포격해서 진압이 힘들게 한 것이었다.
“이러면 이제… 이겼군요, 선조님.”
“응, 이겼지. 하지만 이제 중요한 건… 얼마나 이기느냐겠지.”
“얼마나… 이기느냐?”
“그래. 여기서부턴 이제 영수증 싸움. 적들에게서 얼마나 뜯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그건 추격하는 기사들과… 저 장군들의 몫이겠지. 과연 저 장군들의 능력은 어떨지 궁금하군.”
진정한 명장의 조건에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패전을 할 경우 얼마나 아군을 수습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한 능력일 것이다.
역사 속에서 각종 천재 지략가들이나 불세출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때론 천재에 의해서 아니면 예상치 못한 변수의 등장으로 패배를 맛보기 마련인데, 그런 상황에서 아군의 희생과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도 대단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지. 가르칸의 ‘장군’이라는 것들은 결국 개인의 무력으로 뽑는 거고, 또 그 군대의 능력을 생각하면 패배엔… 그리 익숙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가르칸 공화국과 전쟁한 적도 극히 드무니……. 더욱 그렇겠죠. 내부에서 자신들끼리 싸운 건 아마 야만인들 특성상… 한 번 지면 ‘내가 졌다!’ 하고 굴복하겠죠.”
“변수라면 역시 노이멀 총리가 그들에게 ‘인간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냐는 건데… 뭐, 그건 지금부터 확인하면 되겠지. 자자, 감상은 그만하고, 우리는 자러 가지. 내일 아침에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말이야.”
아무리 철인이더라도 휴식 없이 일하다간 결국 무너지는 법. 그것을 잘 아는 베오날드였기에 무조건 일정 이상의 휴식과 수면 시간 배분을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밤에는 추격에 들어간 병사들과 기사들이 열심히 수고해 주고 있을 거니 내일 아침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하자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막사로 들어가 푹 쉬기로 한다.
***
어두운 밤이지만 하늘에 새하얀 섬광이 가득해서 전혀 모습을 감출 수 없는 상황. 적들의 추적자들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자신들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온다.
‘기사’들. 오러를 사용하는 인간, 인간 군대에서 수인과 맞먹는 힘과 속도를 자랑하는 자. 뛰어난 무력까지 겸비한 그들은 마치 무시무시한 맹수처럼 달려와 검과 창을 휘두르면서 가르칸 공화국의 부대를 학살하고 있었다.
“캐애앵! 사, 살려 줘!”
“크억! 살려 줘! 하, 항복한다! 항복한다고! 커억!”
“모조리 죽여라. 해가 밝기 전까지는 항복을 받아 주지 말라는 베오날드 님의 명령이시다! 상대가 엘프든 뭐든 어설픈 인정이나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주살해라!”
“예!”
“와아아아아아아!”
기사들은 명령받은 대로 충실하게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를 주륙하기 시작한다.
노예로 잡아다가 몰래 팔면 아주 비싸게 받을 아름다운 엘프나 드워프도 자비 없는 기사들의 검과 창에 쓰러졌고, 수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꿍꿍이를 가질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고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게 역시 발데리안 가문이라는 명문가의 기사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크르르릉! 이런 제기랄! 제기라알!”
“얼른 도망치세. 내 ‘스팀 웨건’이 있으니 자네들은 도망칠 수 있어! 이미 전세는 꺾였네.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서 도망치기 시작했고, 적들은 하늘을 밝게 해서 야습의 디메리트를 없애고 공격해 왔네!”
“이대로 꽁지 빠지게 도망가란 말입니까? 크르릉!”
“그럼 어떻게 하겠나?”
“싸워야지요! 끝까지! 크르르릉! 우리 부족의 긍지가 있는데!”
분노로 점철된 요테 장군의 말에 플레임호거 장군은 두통으로 신음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이미 패배한 거였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전력을 온존하고 무사히 후퇴해서 본대와 합류하여 병력을 유지해야지, 무슨 긍지고 명예를 따지며 싸운단 말인가?
분명 ‘장군’으로 임명됐을 때, 노이멀 총리를 비롯해서 군무성에서 제대로 된 지휘 교육을 받았을 터인데 이러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저도 아직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망치는 것은 결국 겁쟁이들뿐! 그리고 들어오는 적의 기사들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페일 장군도 저리 말하지 않습니까? 저 하늘의 빛이 얼마나 오래갈지 몰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게! 나는 나대로 사령관님의 명령을 이행할 테니 말이야!”
참다 참다 결국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난 플레임호거는 막사를 나와서 자신은 별도로 움직이기로 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놈들과 함께 죽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서 왔는데 무시하는 놈들과 어울리기도 싫은 것이었다.
더구나 드워프인 그도 나름 성질이 불같은 종족인데, 이 정도 참아 줬으면 예의는 다한 것이니 그는 저 망할 수인 놈들은 그들끼리 죽으라고 하고 군사들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크르르릉! 물러서지 마라! 다들 집결해라!”
“캐오오오옹! 우린 진 게 아니다! 송곳니와 발톱의 아이들아, 모여라!”
우우우우우!
요테와 페일 장군은 각각 포효를 하며 혼란을 진압하고 군사들을 모아서 전투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진형이 엉망이었지만 장군의 모습을 본 수인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불타는 막사와 진지에 상관 않고 우선 적을 제압하는 것에 열중하기로 한다.
“싸워라! 싸워서 이겨! 놈들을 먹으면 된다! 크르릉!”
“저 빛은 내가 꺼뜨리겠다! 구름이여!”
우르르릉!
막강한 요테 장군이 앞에 나서서 기사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페일 장군은 조금이라도 야간의 종족적 우위를 살리기 위해서 구름을 모으기 시작한다.
하나 마탑의 전투 마법사들은 대(對) 마법전의 전문가들답게 구름을 모으려는 페일 장군의 힘을 견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여우 년이 우리 마법을 방해하려 한다. 에디슨 라이트닝! 자네 차례야. 원소학부의 복수 전공자로서 위력을 보여 주게.”
전투 마법사들의 지휘관이 부르자 거기엔 여느 마법사와는 다른 금속으로 된 지팡이를 든 마법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눈앞의 하늘에 모이는 먹구름을 보면서 그는 숙적을 만난 것 같은 호승심을 불태우며 자신의 지팡이를 하늘로 들며 말했다.
“하하! 반드시 이겨 보이겠습니다. 인간의 열정과 노력, 연구심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니 말이죠!”
우르르릉!
구름이 모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마법사 에디슨 라이트닝. 세계의 언어와 법칙을 연구하는 마법사인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나거나 그저 전수만 받았을 뿐인 ‘야생의 마법’ 페일 장군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지식과 노력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마탑의 비전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캥? 이건……!”
“페일 장군, 왜 그럽니까?”
“망할 마법사 놈들이……! 캐애액!”
으드득!
이를 악물고 하늘의 마법을 컨트롤하려는 페일 장군. 하나 에디슨 라이트닝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마력을 집중한다.
하늘에서 마법의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결국 다시 ‘섬광(라이트)’ 마법들은 정상적으로 발동하였고, 계속해서 치열한 공방을 이어 나가게 된다.
“병사들을 모아서 진을 짜기 시작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적 장군이 있는 걸로 보입니다. 숫자는 약 3천으로 추정! 그리고 기묘하게도 드워프와 엘프를 비롯한 부대는 후퇴하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
플레임호거가 후퇴시킨 부대, 오늘 낮 전투에서의 사상자, 야간 기습으로 치료와 수면을 하기 위해 쉬고 있던 병력과 혼란으로 도망쳐 버린 패잔병들이 빠져 버리고 간신히 수습해서 모은 게 약 3천밖에 되지 않는 요테 장군과 페일 장군의 부대였다.
본래 1만 5천이었던 적 부대는 이제 5분의 1밖에 남지 않은 수준. 일군의 가치가 있는 장군이 둘이나 남아 있게 된 셈이니 하이디는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렇다면 도망치는 자들은 내버려 두고, 지금 저항하려는 자들부터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곳에 적 장군까지 있다면 반드시 처치해야 합니다. 자잘한 인원보다 그게 더 큰 명예와 전공이 될 거니 말입니다!”
“음! 동감입니다. 그리로 가겠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전달하겠습니다.”
두두두두!
패잔병을 추격하던 기사들은 즉시 기수를 돌리고 진형을 정비해서 돌아가기 시작, 야간 기습을 하러 들어오는 발데리안군의 예비 부대와 격전을 벌이는 요테 장군과 페일 장군의 본대 쪽에 지원을 해 나갔다.
아무리 수인들이 인간보다 강하다고 한들 1만이 넘는 숫자가 사방에서 밀어붙이고 있고, 후방에서는 발데리안군의 기사들까지 몰아치니 서서히 지쳐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들은 대부분 낮에 하루 종일 전투에 참여했던 수인들. 거기에 후방 지원을 해 주는 엘프, 드워프 부대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모두 도망쳤으므로 순수 보병대만으로 저항을 하는 상황이었다.
“2부대, 빠져라! 요테 장군, 페일 장군이다! 우리가 상대할 자들이 아니다!”
“크르르릉! 네 이놈들! 비겁하다!”
“일군에 버금가는 장군이 잔챙이에게 집착하는 건 안 비겁합니까?”
“크르르르릉! 네놈의 뼈를 씹어 먹어 주마아아아!”
그리고 혼자서 일군의 전력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장군의 존재들은 철저히 그 능력을 살리지 못하게 훈련된 발데리안군이 위험종 몬스터를 잡는 노하우를 통해서 투창과 화살, 기름을 뿌리고 횃불로 불을 놓아서 마구잡이로 저항하며 최소한의 희생만 내고 있었다.
그나마 페일 장군이 뭔가 할 법했지만 그녀 또한 전투 마법사들이 후방에서 철저히 견제하는 터라 제 위력을 내기 힘들었다.
“캐애애앵! 내… 내 뇌전이… 이렇게나!”
“크르르르!”
완벽하게 고립되어 버린 두 장군들. 그리고 수인 부대들이 죽어 나가는 처절한 전투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렀고, 사투는 계속해서 이어지며 어느새 새벽이 찾아와 서서히 날이 밝아 온다.
그리고 어느새 아침이 되었고, 발데리안군 본영에서는 약 6시간가량 느긋하게 푹 잔 베오날드가 케드론의 것까지 커피를 타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하아아아암~ 잘 잤다.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자, 받으십시오. 커피입니다. 머리가 좀 멍하면 깨기 좋을 겁니다.”
“음, 오… 따스해서 좋군. 하지만 엄연히 전쟁 중인데… 너무 한가로운 게 아닌가? 앞에서 아직도 싸우는 소리가 나는데 말이야.”
“지금은 서둘러도 그리 다를 건 없습니다. 컨디션은 무엇보다 소중하죠. 게다가… 병사들도 이제 막 깨어나서 준비를 시작했으니 시간이 좀 남아 있습니다.”
“빨리 움직여! 밤새 싸운 부대와 교대해야 한다!”
“식량은 입에 물고 뛰어!”
“푹 잤으니 이제 일해야지. 안 그런가? 어서 빨리 움직여라!”
느긋한 베오날드와 다르게 본진은 이제 기상한 병사들이 움직이느라 매우 분주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야말로 귀족의 특권을 즐겨야 한다는 주의인 베오날드는 커피를 마저 마신 다음, 케드론과 같이 갑옷을 벗고 예복으로 복장을 맞추고는 말을 타고서 느긋하게 전장으로 나선다.
“…아니, 나는 이렇게 입는 게 불편하네만?”
“도련님이 그렇게 안 입으시면 제가 못 입어서 말이죠. 자자, 최대한 멋있게, 내가 세계의 지배자라는 느낌으로 당당하게 계셔 주시길 바랍니다. 영지의 지배자가 되실 분이니 연습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아카데미 시절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노력해 보겠네.”
케드론은 베오날드에게 휘둘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의 뜻대로 해서 잘 안 된 일이 하나도 없었기에 따르기로 한다.
그래서 얼굴을 굳히고 잔뜩 위압감을 주는 느낌으로 표정을 짓는 케드론을 데리고 전장에 도착한 베오날드는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교대하러 왔습니다.”
“아, 베오날드 님, 일단 완전히 포위해서 몰아넣었습니다. 적의 남은 병력은 채 300여 명도 되지 않습니다. 장군 둘도 상당히 지친 상태이고 말이죠. 하나 역시… 죽기 직전의 짐승이 발악한다는 느낌이라.”
“알겠습니다. 저희가 해결하도록 하지요.”
“예.”
병사에게 상황을 보고받은 베오날드와 케드론은 그대로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서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새… 아니, 낮까지 포함해서 하루 종일 싸워서 엉망이 된 가르칸 공화국 수인들의 잔당은 피와 땀투성이가 된 채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망할 놈들! 자! 어서 죽이러 와라!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 주마! 크르르르!”
“여기 가르칸의 장군이 둘이 있다! 명예를 원한다면 어서 달려와라! 뭣들 하는 거냐? 너희가 그러고도 수컷이냐!”
‘…으음, 다른 병사들은 다 전의가 꺾였는데, 저 둘만 아직 눈빛에 독기가 있군.’
베오날드는 포위된 곳에 있는 가르칸의 병사들과 장군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했다.
병사들은 다들 지치고 힘겨워하는 상태. 전투 중인 것도 잊고 소강상태에 빠지니 꾸벅꾸벅 조는 자들도 있을 정도다.
멀쩡한 것은 오직 두 장군뿐인 상황. 베오날드는 발악하는 이 두 짐승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그들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