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그리고 가르칸 공화국 진영에서는 신나게 싸우긴 했지만 큰소리친 것과 다르게 첫날 상황이 영 좋지 않자 두 장군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섰는데, 생각 외로 적들이 강하게 저항했으며 심지어 아군의 피해 상황을 산정해 보니 심각한 지경이었다.
본진에 남았던 장군인 플레임호거는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군들을 보면서 혀를 차며 두 장군을 질책했다.
“그러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집을 피운 겐가? 사령관님이 괜히 날 보낸 게 아니라니까~”
“크르르릉! 닥치쇼! 열 받아 죽겠는데!”
“캐애애앵! 대체 뭐지, 그 인간은! 하루 종일 내 뇌전을 받으며 싸웠는데도 무사하다니! 말도 안 돼!”
“쯧쯔쯔…….”
하지만 두 장군 모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건지 플레임호거의 조언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본진을 둘러보면서 한숨을 쉬는데, 상처 입은 전열 부대의 피해가 예상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 너무 아까웠다.
그나마 후열에서 지원 사격을 하던 엘프 궁병대가 멀쩡해서 아군 피해가 이 정도로 적어진 것이었다.
‘사실상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셈이군. 적장이 참… 대단하구먼. 그보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으으으… 아으으으…….”
“우우우우…….”
“이런… 이런 곳에서 죽다니……!”
“아! 진짜 미치겠네. 이렇게 패배할 줄 누가 알았냐고. 마력도! 약도 부족해!”
언뜻 보면 무적으로 보이는 겉모습을 가진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였지만, 이 여러 종족이 뭉친 연합군엔 장점도 있지만 신체적, 종족 문화적 특징이 개별적으로 달라서 이렇게 대패했을 경우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큰 지장이 있었다.
그나마 생명력과 재생력이 강한 편이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 각 종족마다 약의 사용량, 적합한 성분이 모두 달랐고, 애초에 그런 연구도 하지 않았기에 그저 회복 마법이나 정령술, 비싼 포션으로 귀중한 소수 인원의 상처를 돌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왔더라도 결국 적절한 조치를 못한 탓에 그 생명력이 이겨 내지 못하는 상처를 입은 자는 그대로 죽기 일쑤였다.
“자자, 부상자 분류, 필요한 약의 양, 불구가 된 사람은 조치를 받은 뒤에 병동에서 쉬도록. 빨리빨리 움직여.”
“가, 감사합니다.”
“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반면 발데리안군의 사정은 정반대였다.
마탑의 연금학부장, 전설의 연금술사 베오날드가 있었기에 부상의 정도에 따라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어서 부상자들이 중상을 비롯해 심각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체 일부를 상실한 자들에겐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해 주어서 노동력의 손실을 최대한 막아 병영 내의 일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
그렇게 다시 완전히 어두워진 밤. 가르칸의 진영에서는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격렬한 토의가 진행 중이었다.
예상 이상의 피해를 입어 버렸고, 특히 기병대는 절반가량이나 피해를 입는 바람에 각종 작전에 지장이 생길 지경이었다.
본진을 한번 슥 둘러본 플레임호거는 그들이 썩 좋아하지 않을 제안부터 했다.
“일단 물러나는 게 어떤가? 온전할 때 싸워서 적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몸으로 체험했고, 병력이 깎인 지금은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네만…….”
“아뇨!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크르릉! 이런 굴욕을 안고 어떻게! 도망친단 말입니까?”
“얌전히 사령관님의 명령을 따르게. 여기 병사들은 자네의 소유물이 아니야. 위대한 가르칸 공화국에 사는 백성들일세. 승리를 위한 작전이라면 몰라도 패배를 위한 희생양이 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네.”
“…크르르릉!”
당장이라도 뭐라 반박하고 싶은 요테 장군이었지만 오늘 전적이 개판이었는지라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는 그였다.
마찬가지로 페일 장군도 으르렁거리면서 분을 삭일 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 ‘장군’이라는 칭호에 맞는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가르칸 공화국 내에서 싸움을 벌였을 땐 패배라는 걸 거의 맛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령관님에게 패한 이후… 이런 패배라니. 크윽!”
“아무튼 둘 다 정신 차리고, 일단 한발 물러서세. 알았지? 굴욕은 나중에 갚아도 되…….”
콰아아아아아아앙!
한참 위로의 말을 이어서 하던 플레임호거였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소리에 놀란 세 장군이 막사 밖으로 나가니 어두워진 밤이 불길로 인해서 마치 대낮처럼 밝아져 있었고, 막 아비규환의 장면이 시작되고 있었다.
“으아아아! 불이야! 불이야!”
“빨리 진화해! 마법사들은 빨리 마법으로! 정령술까지 동원해!”
“젠장! 야습인가?”
거대한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한 막사와 임시 창고. 저녁 식사를 하고 누워서 쉬던 가르칸 공화국의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화재를 막는 건 물론이고 기습에 대한 대비까지 같이하고 있었는데, 세 장군은 현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크르르! 이게 무슨 일이야? 야습?”
“허, 화공(火攻)이군. 하지만 경비는 철저히 세웠을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법? 아니야. 우리 측도 마법사와 엘프 정찰대로 야간 방비를 세웠을 텐데… 게다가 경비들도 잘 배치했고…….”
이들과 이야기하기 전 본진을 한 바퀴 돌고 오면서 철저히 점검을 했던 플레임호거 장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기습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당해 버리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경비와 경계 모두 완벽한 대비를 해 두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화공이 시작된 걸까?
플레임호거 장군의 의문과 다르게 그 해답은 바로 하늘에서 제시되어진다.
“허… 저런, 맙소사.”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하늘에서 시뻘건 불덩어리들이 날아와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저게 전설로만 듣던 메테오 마법일까?
플레임호거 장군은 놀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기겁할 따름이었다.
자신도 나름 마스터 엔지니어로서 기계와 전쟁 무기에 대해서 밝은 편이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적이 자신들 본영에 투석기나 대포를 설치했다고? 자네들 말로는 그런 건 끌고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여기 온 지 하루 만에?”
분명 자신도 소양을 가진 부분이었기에 공성 병기 설치 유무라든가 대포의 유무도 이미 확인했었다.
하지만 없다고 했었다.
엘프 정찰병들에게 들은 바는 확실했는데, 하지만 현실은 하늘에서 계속해서 불벼락이 떨어지고 있는 판국이다.
플레임호거는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며 우선은 바쁘게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진영에서는 열심히 불덩어리를 날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대포가 뭐 별거야? 반동을 버틸 수 있고, 설치할 수 있으면 그게 대포지. 계속 쏴! 안 그러냐?”
“동감입니다, 베오날드 님.”
콰아아앙! 콰아앙!
베오날드 진영에서 날리는 대포의 정체는 바로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 ‘볼트 슈터’, ‘볼트 라이플’ 같은 화기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더 크게 키워서 쓰고자 하는 게 인지상정.
둥근 쇠기둥 같은 거대한 철포가 바로 그 작품이었고,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2인 1조로 포신 끝부분을 땅에 붙이고 쏘고 마정석의 마력으로 터뜨려서 화염탄을 쏘는 행동을 반복 중이었다.
“실험 삼아 만들었는데… 이게 도움이 되네. 그리고 저 화염탄, 상당히 우수하던데… 연금학부에서 누가 만든 거랬더라? 햐아~ 경치 죽이는군. 역시… 쉽고 쓰기 좋긴 하다니까.”
하늘을 가득 메우는 불덩이들을 보며 베오날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대포는 베오날드가 개발한 것이 맞지만 이 안에서 발사하는 저 ‘화염탄’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다.
베오날드는 화약의 가능성과 기능성에 대해 알면서도 일부러 깊이 연구하지 않았고 잘 쓰려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바로 힘이란 소수에게 집중되어야 권력으로 유용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에 화약처럼 쉽게 만들 수 있고, 재능이나 능력 없이 그저 사용만 할 줄 알면 남을 해할 수 있는 도구가 유통이 되면 증오의 칼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화약에 대한 연구는 금지 혹은 하지 않은 것이었다.
“연금학부의 불장난 좋아하는 분이 만든 건데, 워낙 폭발과 화염에 미친 분이라서 진작 다이나 가문에 척살당했습니다. 그 폭발마적인 성향만 줄였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지금 이건 그 남은 연구의 성과물이죠.”
“그렇지. 그게 맞는 거지. 아무튼 지금은 이거저거 가릴 상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본래라면 금기로서 관리했겠지만 지금은 그 금기까지 해방해서 써야 할 상황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마족과 마왕까지 상대해 먹으려면 더더욱 수단, 방법을 가릴 새가 없었다.
그렇게 보통 화약을 쓰는 대포 같으면 이렇게 날리는 게 불가능했겠지만 한쪽은 마력을 격발시키는 덕분에 화약, 기름과 타르를 섞어서 만든 ‘화염탄’은 훌륭하게 날아가서 적진을 불태웠고, 가르칸 공화국의 부대는 우왕좌왕하며 불에 타 죽거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끄우우우우우우! 끼에에에엑! 꾸어어어어어!”
“음, 매캐한 냄새가 나는군. 털 때문인가? 사람이 탈 때랑은 다른데 말이지.”
“사람을… 태워 보셨습니까?”
“옛날엔 자주 했지. 지금은 안 하지만……. 아무튼 슬슬 때가 되었군. 아르젠, 전투 마법사들에게 예정된 준비를, 하이디와 기사, 기병대들에겐 돌격 준비까지.”
“예.”
짧은 말이었지만 무시무시한 대답이 오가면서 베오날드는 슬슬 공격할 때라 생각하며 준비를 시킨다.
야간엔 수인들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기에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철군을 했지만 그렇다고 꼭 야습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었다.
적들의 자신감과 아군의 모습에서 얻은 확신 사이의 맹점을 노린 전략.
생각지 못한 곳을 그에 맞는 도구로 확실히 찔러 들어가는 것만큼 잘 먹히는 전략이 또 없었다.
“전투 마법사 부대, 전부 ‘섬광(라이트)’ 마법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뭐, 기초 중의 기초라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하이디 경이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좋아. 역시 전쟁의 꽃은 기마대지. 모조리 유린하라고 해라. 새벽에 다시 해가 뜨기 전까진 항복도 받아들이지 말고 전부 쫓아서 죽이라고 전해라. 예비 보병대들은 내가 케드론 님과 함께 지휘해서 따라가겠다.”
“예! 그럼 저는 전투 마법사들을 지휘하러… ‘섬광’!”
베오날드의 명령이 떨어진 즉시 아르젠은 하늘을 향해서 마법을 시전, 막대한 마력이 사용되어 밝게 터지는 섬광과 동시에 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발데리안군의 기병대가 야간 출격을 시작한다.
낮엔 보병들과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만 적 기병대에 대한 수비전에 나섰을 뿐, 주간엔 기병대를 운영하지 않아 말들의 체력은 쌩쌩했기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땅을 울리면서 질주하기 시작, 마갑주를 입은 기사들도 사격을 마치자 하나둘 돌아와서 벗고 일반 갑옷을 챙겨 입고는 자신의 말들을 타고 출격을 바라고 있었다.
“부디 우리 가문도 출진을! 명예가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킨 일은 다 했으니 저희도 도우러 가겠습니다.”
‘…아니, 이미 실컷 쏜 걸로 전공을 챙겼는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여간 기사라는 종족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니까…….’
검을 휘두르고 직접 피를 봐야만 명예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기사들이 중심이 되는 무인들은 엄연히 귀족 사회의 일원이었기에 베오날드는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가도록 해라. 단,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하도록. 이번 전쟁은 이 전투가 끝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전장에서만 보면 쐐기였지만 전체 전쟁으로 보면 이제 막 시작한 상황. 가능하면 구성원들의 체력 안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갑주를 입던 기사들에게도 기마대로서 출격 명령을 내려 주는 베오날드였다.
만족스럽게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장은 없는 법이라 생각하며 그들이 떠나는 걸 본 이후 케드론에게 보고를 올리러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