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하나 결국 다이나 왕국에서 베오날드의 존재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없었지만, 발데리안 영지에 ‘베오날드’라고 하는 새로운 인물의 존재가 알려지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발데리안 백작가에서 알고 있는 베오날드는 500년 전의 사람이 아닌 그저 동명이인으로 취급하게 되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친인 베오날드에 대한 기억과 사랑이 있던 노이멀 총리에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있었을 줄이야! 어떻게 지금까지 눈치를 못 챈 거지?”
정보를 조사하다가 나온 베오날드라는 인물을 알아채자, 그녀는 ‘노이멀식’ 특유의 보랏빛 오러를 일렁이면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런 바보짓이 따로 없을 정도로 너무 발견이 늦은 것이었다.
이 베오날드라는 새로운 인물, 대두되는 게 늦었을 뿐 이미 5년, 아니 그 이전부터 발데리안 가문 아래에서 암약하고 있던 자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지, 진정하십시오, 총리님.”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게 있는 걸 눈치 못 챈 거지? 하!”
“워낙 바쁘셨고, 게다가… 5년 전에 그놈은 발데리안 가문의 말단이었습니다. 알아차리는 게 이상한 일이지요.”
부관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노이멀 총리의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다른 이름도 아니고, 소중한 아버지와 동명이인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화가 난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선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자부심이 있고, 그 사랑이 증오가 되어서 세계를 불태우는 건데… 그 이름을 쓰는 놈을 눈치를 못 챈 것이 크게 분할 만했다.
“후우… 후우… 좋아, 모자란 건 이제 보충하면 그만이지. 그래서 그놈에 대한 다른 정보는?”
“자세히 알아보니 생각 이상으로 거물인 놈이었습니다. 발데리안 백작의 측근이자, 후계자인 케드론 발데리안의 곁에서 일했고, 거기에… 고대 유적의 전문가라고 해서 여러 유적을 파헤쳤고, 거기에서 얻은 재보나 유물로 다이나 왕국을 구워삶았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유적… 그러면 사실상 그놈이 다이나 왕국과 발데리안 가문의 화해를 주도한 건가?”
“예. 심지어 그 뒤로 화해한 다이나 왕국과 발데리안 가문의 지속적인 연락과 중재를 위해서 두 영토의 경계에 만든 곳에서 놈이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기엔 그… 총리님이 싫어하시는 알테리오 님의 후손도 있는 걸로…….”
“아르젠까지?”
“왜 그러십니까?”
“아, 그렇다면 설마… 흩어졌던 노이멀의 혈족이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러면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빠를… 베오날드 님을 존경하는 사람이 잊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냥 우연히 이름을 이어받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잘 맞춘 듯이 있는 자였기에 나름 추리를 해서 아귀를 맞추는 노이멀 총리였다.
알다시피 노이멀 가문은 본래 부인을 많이 두고,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이 나름의 전통이었다.
벨릭스 폰 노이멀의 경우도 그랬고, 베오날드 폰 노이멀도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부인을 다수 두고서 자손을 많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가문이 그 망할 알테리오의 손에 파괴되었을 때,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지. 내전에서 서로 죽이기도 했지만 그나마 아버님의 아래에선 최대한 사이좋게 지내려고 한 편이었거든.”
“그렇습니까?”
“그게 알테리오 새끼를 중용해서 얻은 장점이었지. 그나마 아버님이 차별 없이 자식들을 능력과 재능으로만 판단해 준 근거였으니 말이야. 시도 때도 없이 아버님의 정책에 반발하기만 하는 놈을… 아버님은 큰 배포로 받아 주었다는 점도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갑자기 생각할 게 많아져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 대부분의 부대에겐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전하고 기습 작전은 모두 취소한다고 전해라.”
노이멀 총리는 부관에게 그리 이야기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한다.
오랫동안 준비해서 순조롭게 풀리던 일이 하나둘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일에 지장이 생기니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안 그래도 가르칸 공화국 본국에서도 의회에서 현재 자신의 침략 행위에 대해 반감을 가진 자들이 넘쳐서 저번 선거도 이기기 힘들었는데, 바깥일마저도 이렇게 꼬여 버리니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다.
‘후우~ 아버님의 말대로… 모든 걸 상정해도 쉽게 풀리지만은 않는구나.’
‘그래도… 쉽게 풀리지 않아도 준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지고 있단다. 나는 그래서 항상 준비하려고 한단다. 가문을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서 말이지.’
‘아버님…….’
하프엘프인 덕분에 엘프 특유의 뛰어난 기억력을 물려받아 눈을 감으면 마치 그 광경이 그대로 펼쳐지듯 눈앞에 선명한 노이멀 총리. 때로는 슬픔 때문에 이 기억력을 저주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래도 결국 살아 있는 자였고, 500년이나 지나다 보니 부분적으로 기억들이 서서히 망각되어 가긴 했지만 언제, 어디서든 아버님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면 반대로 나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다들 왜…….’
“…….”
선명하게 떠오르는 ‘베노피스’가 불타던 날. 베오날드가 인생을 쏟아부어서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곳이 고작 1세기도 버티지 못하고 성벽과 도시는 파괴되고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죽거나 하며 난리가 나던 그 광경. 특히 노이멀 총리에게는 태어난 땅이자 고향이자 소중한 가족과 살던 삶의 터전인 만큼 그 상실감과 증오는 배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스으으읍… 하아아아아!”
베노피스가 무너지던 날의 광경, 부서지고 갈라져서 사라져 가는 아버지의 유산과 자신의 가족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분노와 증오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이걸로 부족했다. 더, 더 큰 분노와 증오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라야만 했다.
‘분노의 마왕’과 계약한 그녀는 계속해서 그 분노와 증오를 바쳐서 힘을 얻으니 더 끌어 올려야 했다.
“오래간만에 그걸 써 볼까? 후후훗.”
불길하게 웃기 시작한 그녀는 이곳 저택에 마련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자신만의 공간. 인간에 대한 증오를 새기고자 인간의 가죽과 뼈로 만든 벽지와 가구들이 인상 깊은 곳으로,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일면이었다.
그러곤 방구석엔 불길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상자를 연 그녀는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냈다.
“후후훗, 역시 이거지.”
그녀가 꺼낸 것은 새까만 해골. 해골을 검게 옻칠하여 보존을 해 둔 것으로 사방에 마법 술식이 새겨진 띠가 둘러져 있고, 암흑신의 문양들이 해골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해골의 안쪽에는 희미한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바로 영혼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계셨나요? ‘알테리오 오라버니’?”
그러곤 아주 반가우면서 가학적인 미소를 지은 얼굴로 해골을 향해 말을 거는 노이멀 총리. 이 해골은 바로 예전에 ‘다이나 왕국’에 묻혀 있던 죽은 알테리오 폰 노이멀의 것으로 묻혀 있던 시체를 꺼내고, 마왕의 군세에 협력하는 사령술사들에게 부탁하여 영혼을 가둔 것이었다.
[…죽… 여… 다… 오…….]
푸른 불꽃이 일렁이면서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톤은 힘이 없고 고통스러운 듯 쥐어짜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말투였다.
알테리오 폰 노이멀. 베오날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였지만 자신의 이상을 좇아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주로 올라섰으나 결국 분열을 일으켜 노이멀 가문을 파멸시킨 자.
노이멀 총리로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자였기에 그가 편히 죽어 있는 것도 용납 못하여 마왕과 손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시체를 찾고, 영혼을 봉해 버린 것이었다.
“싫어요. 후후훗, 적어도 제가 죽을 때까진 안 돼요.”
[제발… 내가…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
“그런 소리 들으려고 꺼낸 게 아니에요. 에잇.”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노이멀 총리가 품에서 은제 바늘을 꺼내어 텅 빈 해골의 눈 쪽을 통해 푸른 불꽃에 찔러 넣자, 아까 전 힘이 없던 말투와는 전혀 반대로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의 비명이 들려온다.
엄연히 사령술로 영혼을 가두어 죽음을 거부하였기에 신성한 은제 무구에 영체도 피해를 받는 몸. 심지어 각종 주문으로 약화시켜 둔 탓에 이렇게 은제 바늘로만 찔러도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것이었다.
“아아… 열 받네요. 정말 열 받아. 일은 더럽게 안 풀리고, 아버님의 이름과 똑같은 요상한 놈이 나타나질 않나.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알아요? 다 알테리오 오라버니 때문이잖아요.”
[으아악!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쿡! 쿡! 쿡! 쿡!
살아 있는 육체였다면 고통의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스스로 감각을 끊든 의식을 잃든 해서 잠시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이 영체(靈體)는 그런 한계를 벗어난 상태.
은제 바늘에 찔리는 격통은 일절의 가감도 없이 알테리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다만 너무나 약해진 영혼이라서 그런지 찌르면 찌를수록 점점 푸른 불꽃이 희미해지는 게 문제였기에 그녀는 바늘을 찌르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후후훗, 가여운 오라버니, 고작 수십 년간 후회하고 죽은 걸로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고 생각했죠? 죽어서 신의 곁이든 지옥이든 가서 벌을 받으면 된다는 안일한 결말을 제가 용납할 줄 알았어요?”
[…어억… 끄어어억…….]
“아무튼 오랜만에 그 꼬락서니랑 목소리를 들으니까 속이 풀리면서 마음이 다잡히네요.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놀아 드리고 싶지만… 그러다간 진짜 죽어서 해방되실지 모르니 여기까지만 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상자 속에 곱게 알테리오의 해골을 집어넣어 두는 노이멀 총리였다.
분노와 증오를 통해서 흐트러진 정신을 바싹 충전한 그녀는 다시금 밖으로 나와서 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했고, 조사해 온 내용을 모조리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발데리안 백작가를 먼저 쳐부숴야 한다는 거군. 어떤 수단을 쓴 건지 몰라도 예상 이상으로 번영이 이루어졌어. 그 가짜 베오날드의 짓인가? 노이멀의 후예라는 설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겠어.”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군을 재편성한다. 그리고 볼레아와 베노피스에 전갈을 준비시켜라. 우리가 발데리안 백작가를 치는 동안, 다른 곳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막아야 하니 말이다.”
“그 신병기인 마도구 대처는…….”
“하지 않는다. 그따위 잔재주, 전력으로 쳐부숴 주지. 우리도 전력으로 간다. 모든 밑작업이 끝나고, 추수를 끝낸 뒤 병력을 재편성하는 즉시 진군에 나서겠다.”
그렇게 노이멀 총리의 판단에 의해서 발데리안 백작가를 쳐부수기 위한 전쟁이 결정된다.
사실 마왕의 부활을 위한 ‘분노와 증오’를 모은다는 것 때문에 인간들이나 괴롭히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녀였는데, 전략적으로 진군할 명분도 생겼으니 좋게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 맞아. 하나 더…….”
“아, 예.”
“준비하는 동안 우리가 점령한 지역과 영역에 일부러 살려 둔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라고 전해라. 먹어도 좋고, 가공해서 비상식량을 만들어도 좋고, 즐겨도 좋고, 제물로 삼아도 좋다. 모조리 죽이라고 전해라.”
진군해서 발데리안 백작가를 노릴 총력전을 한다면 그 전에 후방의 위협도 없애야 하니, 이곳 바니로 백작가와 그 영향 내에 있는 모든 영지의 인간을 죽여서 절멸시킬 생각인 노이멀 총리였다.
“모조리라면… 여기도 말입니까?”
“달리 뭐가 더 있겠느냐? 저택까지 모조리! 드워프 공병대를 이용해서든 저택과 도시의 흔적까지 깡그리 없애 버려라.”
“알겠습니다.”
분노와 증오를 불태우는 노이멀 총리의 명령에 바니로 백작가엔 지옥도가 펼쳐진다.
기본적으로 폭정을 펼쳤지만 그래도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손속을 두었다면, 이제는 정말 무자비하게 인간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군이 움직여서 그야말로 학살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말 그대로 바니로 백작가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도시와 마을은 모조리 불타고, 강이 피로 물들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신의 육욕만을 채우기 위해서 가문과 영지를 팔아넘긴 바니로 백작은 이날 사랑하는 부인의 손에 죽어 생나체로 백작가 저택 꼭대기에 꽂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