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의 절반인 이 세월. 누군가는 아무런 진보 없이 나날을 보낼지라도 누군가는 번영을 이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실제 한 대륙을 수십 년간 경영해 온 경험 많은 대귀족 베오날드의 손에 쥐여진 발데리안 영지와 다이나 왕국의 풍경은 고작 5년인데, 상전벽해의 변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자, 5년 대비 성장도를 그래프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인구 증가는 2.7배, 식량 생산량은 4배, 무역 이익은 계속 나고 있고, 서쪽 위험 지역 개발은 순조로우며 새롭게 만들어진 영지는 무려 7개, 강의 수로 개발 공사도 완료해서 본래 일주일 걸리던 다이나 왕국과 발데리안 영지까지는 이제 약 하루의 시간이 걸리면 도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군. 안 그러냐?”
“예.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네요. 이게 참… 마법인가요?”
“마법사로서 말하는데, 저거 마법 아닙니다.”
천재의 과업은 범인(凡人)의 눈엔 그저 기적이나 마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5년 만에 이룬 베오날드의 마법. 창문 너머로 펼쳐진 발데리안 영지를 비롯해서 거대한 도시의 풍경과 확 늘어난 사람들, 지금 이 시간에도 거대하게 올라가는 성벽, 이제 강의 수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물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래도 부족합니다. 계속해서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앞으로는 노예제를 축소하고, 토지 개간을 증가시키고, 산적, 범죄자들까지 최대한 사용해서 노동력을 집약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전염병과 질병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비누 공장을 통해 비누를 싸게 많이 공급할 수 있도록 하며 수원 공급은 물론 정화도 시켜서…….”
“아니, 대체 이런 건 어떻게… 하게 된 건가? 너무 별천지 이야기들이라서 이거…….”
‘뭐, 이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하지만 이분은 유례없는 대영지이자, 대도시인 ‘베노피스’를 건설하고 경영하셨던 분이니…….’
가주의 자리를 잡자마자 노이멀 영지에서 떠나서 자신만의 영지를 만들기 위해서 시작한 ‘베노피스 건설’. 수십여 년간 대도시급으로 도시를 성장시키면서 노하우, 지식, 문제점들을 모두 겪어 본 자였다.
괜히 경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게 아니며, 사람들이 경력자를 선호하는 이유가 이런 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남부 방위 라인에 가 있는 병력들에게 식량 및 무기에 대한 지원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받은 새로운 무기랑 갑옷에 대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네.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교전에서 꽤 목숨을 구했다고 하더군. 특히 가장 평이 좋았던 건 다른 게 아니라 냉기 마법이 걸린 부츠와 투구였네. 전장을 뛰고 달리면 결국 더위로 인해서 지치거나 맥이 빠지기 마련인데, 컨디션 유지에 좋았다더군.”
“흐음, 역시 감각적인 것이 잘 먹혔나 보군요.”
“근데 문제가 생긴 게… 어떤 무식한 병사 놈이 위로 차원에서 지급한 맥주를 시원하게 만들겠다고 그 부츠 안에다 맥주를 부어서 발동시켜서 마셨다더군.”
“아… 그건 좀… 아니, 그럼 투구에도 그랬던 겁니까?”
“아니, 투구에는 다행히 하지 않았네. 왜냐면 투구에 하면 그 술 냄새가 난다나? 신발에 하면 알다시피 다른 냄새에 파묻히니…….”
병기 개발자와 실사용자 간의 간극은 500년 뒤에도 여전하구나, 라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이마를 짚으면서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러곤 베오날드는 서류 한구석에 ‘대용량 맥주용 냉장고’라고 써 두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병사들 건 그렇다 치고, ‘마갑주’와 각종 무기들을 받은 기사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반응이 아주 좋았지. 일단 목숨을 보호해 주는 면부터 시작해서 멋도 있고, 전장에서 화려하게 무용을 뽐낼 수 있었으니 말이야. 당연히 인기 폭발이었지.”
“하하핫, 예상대로군요.”
“특히 가르칸 공화국의 주 병력은 이종족. 육체 능력이 남다른 오크나 리자드맨이 주력이라서 상대하기가 매우 힘든데, 그 우위점을 상쇄하고 뛰어넘을 수 있으니 좋았네. 전공도 남다르더군.”
‘양산형 마갑주’. 유적에서 발견된 황제 전용 장난감에서 시작해서 만든 거지만 이젠 어엿이 대(對) 마족 결전 병기로 사용될 병기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전장에서의 반응은 매우 좋아서 베오날드도 만족 중이었다.
일단 발데리안 가문의 상급 기사와 충성심 높은 중급 기사 위주로 먼저 10대가량 배분하고, 여러 무기들까지 줘서 다른 의견이나 데이터를 얻고자 했다.
“근데 문제점이 있지. 그 자네가 준… ‘볼트 슈터’인가랑 ‘볼트 라이플’ 말일세. 영~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군.”
“…네? 어째서요?”
“기사란 모름지기 검과 창을 들고 적진을 돌파해야 하는데, 이 요상한 무기는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이고, 기사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더군.”
“…죄다 배가 불러 터졌군요. 기껏 ‘화약’ 안 쓰고 만들었는데…….”
엄연히 연금술사인 만큼 ‘화약’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는 베오날드였다.
다만 너무나 위험하고 또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이 물질은 사회 구조와 신분 구조를 바꿀 수도 있어서 일부러 사용하지 않고 봉인해 두었을 뿐이었다.
마정석의 경우 다루거나 만들려면 고도의 마법 술식이나 마나에 대한 재능, 이해가 필요했지만 그 ‘화약’은 그냥 단순히 불만 붙이면 펑! 하는 폭발력만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좋아하는 기사도 있었네.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서 말이지.”
“아무튼 받아들여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공성용 대포라든가 그런 쪽으로 개발하기 위한 밑거름이라고 해 두십시오.”
전통적인 기사들의 심리는 아주 잘 이해하는 만큼 베오날드는 그들에게 먹힐 변명을 말해 주고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고, 회의는 이후 2시간가량 더 진행된 뒤 끝이 났다.
어느새 발데리안 백작은 마치 바지 사장 같은 느낌으로 베오날드의 지시와 의견대로 하는 것을 승인하는 기계 꼴이었지만 이미 다리온 왕을 수족처럼 부리는 그에게 거역할 방안도 없고, 결국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은 발데리안 백작가의 이름에 귀속되어 버리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나 보통 이렇게 되면 이제 발데리안 가문의 가신들이나 아니면 친족들이 베오날드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난리를 부리고 항의할 것인데, 그 점은 또 어떻게 해소했냐고 하면 바로 혼약이었다.
베오날드는 예정대로 발데리안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승낙해서 이젠 엄연히 발데리안 가문의 가족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게. 그나저나 자네 처들과의 관계는 괜찮나?”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다만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볼 시간이 줄어드는 게 문제군요.”
그리고 더불어 발데리안 가문과의 정략결혼 이후, 내연 관계에 있던 여성진들과 모두 혼약을 맺은 과감한 베오날드였다.
물론 그가 500년 전의 베오날드라는 것을 아는 셀리나는 제외되었지만 그래도 그녀 또한 동료로서 일해 주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지금 맡은 일이 너무 많은 워커홀릭이라서 잘 만나지 못한다는 점과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이제 이 대륙의 미래가 걸린 것이라서 허투루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망할 여신 같으니……. 그래서 용사 양반은 어디에 있냐고?’
지난 5년, 번영을 이룩하면서 베오날드는 주기적으로 신전 예배에 참석해서 용사님의 행방을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마왕 잡을 그 양반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지원을 해 주고 용사용으로 제작 중인 마도구들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용사를 돕기 위해서 자신을 보낸 거나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대체 왜 용사에 대해 알려 주지 않는지 불안해지는 베오날드였다.
‘설마… 없거나 이미 죽은 건 아니겠지?’
순간 끔찍한 상상을 슬쩍 해 본 베오날드는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상상이 절로 되면서 살 떨리는 느낌과 전율이 전신을 강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마왕을 자신이 잡아야 하나? 이미 다이나 왕국에서 한계를 맛본 베오날드는 지난 5년간 검술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그 재미없는 마왕 측에 붙는 건 말도 안 되고 말이지.’
이래저래 문제점이 많은 인간인 베오날드였지만, 그는 삶과 생명의 가치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다.
인간은 죽음이 정해진 한정된 삶을 살기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기에 그는 할 수 있는데도 사령술이나 흑마법에 손대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연금술로 연명 치료 정도만 했을 뿐 영원한 삶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비록 역사와 시대의 흐름 속에 사라질 유산이라 할지라도 베오날드는 생(生)을 한정적으로 즐기길 원했다.
최선을 다해서 살고, 정원을 가꿔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죽자는 귀족 집안식 마인드. 만약 영생을 산다면 지금처럼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의 ‘생’만큼은 더럽히고 싶지 않아 했으며, 인간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진 않았기에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근데 정말로 진짜! 만약에 나보고 마왕 잡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마족들도 만만치 않은데…….’
불길한 생각에 닿은 베오날드는 마음에 불편한 말뚝이 박힌 듯 찜찜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음 일을 하러 향한다.
***
바니로 백작가 저택.
본래 제국 남부의 주인이라고 불리며, 비옥한 황금빛 곡창 지대를 수호해서 명망이 높았던 대귀족 바니로 백작가. 무투파인 다른 대귀족에 비해서 임팩트는 적었지만 그래도 제국 황실과 손을 잡아서 쉽사리 공격당하지 않을 만큼의 군대, 선정을 베풀어서 귀족들에게도 평판이 좋아서 번영했던 가문이었다.
하나 그것은 이제 모두 과거의 이야기일 뿐. 이곳의 주인인 바니로 백작은 현재 노이멀 총리의 계략에 빠져 저택 뒤에 마련된 탑에서 일절 나오지 않고 하루 종일 주색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노이멀 총리로 그녀는 마왕의 부활을 위해 오늘도 폭정을 펼치며 인간들의 증오와 분노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음, 이제 그냥 단순하게 고문하고 고통을 주는 걸로는 무리려나?”
“뭐든 ‘적당히’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하면 마음이 꺾여서 분노와 증오도 품지 못하게 되어 버리니 말이죠.”
“아버님이었으면 아주 잘하셨을 텐데……. 나는 이런 거 은근 체질에 맞지 않거든.”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디저트 삼아서 우아하게 커피를 즐기는 노이멀 총리는 어떻게 하면 인류에게 더 큰 분노와 증오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부관과 토론하고 있었다.
단순히 잡아서 죽이고, 고문하고 공포를 주는 것만으로는 효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해서 그동안 여러 정책을 시행해 왔다.
“으음,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해. 가족을 죽이고 풀어 주고 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임팩트가 약하다니까~”
“그것만 한 게 아니죠. 연인을 갈라놓거나, 재산을 빼앗거나 등등… 금기란 금기는 다 하셨잖습니까?”
“‘분노의 마왕’님이 부활해야 하니 말이지. 그건 그렇고, 용사의 행방은 아직인가?”
“아직 조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 나는 마족들처럼 매너가 있는 게 아니니까… 이번엔 방해 못하도록 사전에 찾아서 처리해야지.”
누구에게 교육을 받은 덕분인지 철두철미하게 방해 요소들을 체크하며 배제하는 것도 잊지 않는 노이멀 총리였다.
그녀로선 ‘분노의 마왕’을 부활시키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은 역시 ‘용사’. 방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압도적인 무위로 또다시 봉인을 하게 되면 큰일이기에 미리 여러 곳에 돈을 뿌려 가면서 행방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다이나 왕국의 근황에 대해선 들으셨는지요?”
“거기? 아니, 달켄 다이나가 사라진 지금 신경 쓸 게 없고… 아, 이후 발데리안 가문과 화해를 했다고 했었지? 그 뒤로는 우리가 도발하는 전선에서 지원 병력을 더 보냈다는 정도뿐…….”
지난 5년, 노이멀 총리는 인류 멸망을 위해서 여기에서 각종 공작하는 거 외에도 계속 총리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가르칸 공화국으로 돌아가서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엄연히 공화국이기에 선거제로 운영되는 가르칸 공화국의 선거 주기는 5년으로, 엘프의 피가 섞인 그녀로서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기에 중간에 돌아가서 여당을 추스르고, 선거 전략도 짜고 또 의회 선거와 정치까지 해야 했기에 지난 5년간 바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결국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총리직 정권 연장에 성공했고, 여당의 재집권도 성공했기에 노이멀 총리는 계속해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부관이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를 건넸다.
“예. 그리고… 그 전선 도발을 진행하던 부대에서 기묘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인간들 측에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