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다음 날, 베오날드의 진영.
압도적인 전장의 상황을 들은 건지, 아침 해가 밝자마자 마르텡 남작은 직접 백기를 들고 말을 타고 와서 베오날드의 앞에 무릎 꿇게 된다.
병력은 그리 많이 잃지 않았지만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기사들 다수가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어 베오날드의 손에 잡혔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포로가 되었으니 더 이상 저항할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귀인을 몰라뵙고 건방진 행위를 하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님.”
“으음, 좋아. 알아들었으면 그걸로 되었다. 나도 굳이 분쟁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배상금과 포로 몸값 지불만 확실히 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시시한 전쟁 하나가 이렇게 끝나게 된다.
하나 시시하지만 7배에 달하는 병력을 상대로 단 하루 만에 승부를 낸 베오날드의 명성은 발데리안 백작가를 비롯해서 제국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으며, 더 이상 다른 귀족들이 베오날드의 정책에 불만을 가져도 반항하지 못하게 되는 기반이 되기에 이제 사정없이 각종 개혁들을 할 수 있으며 베오날드가 원하는 대로 모조리 뜯어고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위험종 몬스터들의 서식지에서 발견된 구아노 광산을 캐서 농업 개혁을 한다. 그리고 바다로 가는 길을 열어라. 해양이야말로 자원의 보고다. 다이나 왕국과의 교역로를 확대하고 교역장을 더 크게 설치해라. 귀족가의 자제들 중 일이 없는 놈들을 다 보내 달라고 해라. 다이나 왕국의 남는 영토를 개발하면 큰 이익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허어… 정말 기가 막히는군.”
“행정 인력 부족은 당장 해결할 수 없다. 수당은 넉넉히 챙겨 줄 테니 감내해라. 학교를 짓고, 평민들에겐 우선 하위 교육을 시행한다. 최소한 읽고 쓰기, 셈… 그리고 기초적인 학문을 통해서 질을 올려야 한다. 인구는 단숨에 늘어나지 않아도 기반을 만들고 희망을 알게 해야만 더 크게 나아갈 수 있다.”
수십 년간 통일 제국을 번영시켜 왔던 베오날드의 수완이 드디어 100퍼센트로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오게 되자, 다이나 왕국과 발데리안 영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500년 전에 대륙 곳곳을 싹 조사해 둔 덕에 각종 천연자원의 위치도 빠삭했기에 재정이 부족하면 전란 중 폐쇄된 광산과 또 찾아 두기만 하고 개발하지 않은 지하자원이 묻힌 위치를 파헤쳐서 사업을 벌여 충당할 수 있었다.
“…이게 되나? 아들아, 너는 이게… 정상으로 보이니?”
“절대… 절대 아닙니다. 저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다들 왜 그럽니까? 사람을 마치 괴물 보는 것처럼……. 원래 저는 이게 특기이자 재능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리온 왕이시여.”
“두 분의 말씀에 저도 동감을 표하고 싶군요.”
발데리안 가문 부자와 다리온 왕은 도저히 자신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진행하면서 계속 규모가 커지는데도 여전히 여유로운 베오날드의 행정 운용 능력에 기겁하게 된다.
베오날드로서는 지금 이 정도 규모는 노하우와 보고 체계, 적절한 인재만 있으면 누구든 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천재의 생각을 하며 서류들을 촤라라락, 체크해 가며 결재 사인을 해 넣는다.
“아무튼 사악한 마법사의 음모를 막는다든가, 마왕의 수하와 싸우는 것보단 훨씬 쉽고 편한 일이네요. 아아아~ 너무 좋다.”
“…그래서 말이네만, 교단 쪽은 어떻게 해결할 건가? 계속적으로 항의가 들어오던데 말이지.”
“그냥 무시하십시오. 이미 거기는 반쯤 오염된 이교도들의 소굴이니 말입니다.”
“하나 그래도 교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네.”
“그렇죠. 신성 마법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만큼 아예 무시할 순 없죠. 그러면 방법은 2개로 그 교단 내부에 우리 끄나풀을 심든가, 아니면 관심을 돌리는 건데… 앞의 방법은 불가능이죠. 이미 마왕이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 관심을 끈다는 건데? 어떻게 할 건가?”
“미끼를 뿌려야지요.”
교단과 싸우면 곤란하지만 베오날드에겐 교단의 관심을 돌릴 최고의 방법이 있었다.
다른 신실한 성직자들이 열심히 깨끗하게 살고, 오만 짓을 다 해야 기도를 들어 주시는 ‘여신’님이지만 자신은 직접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단과 사이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야간에 참회실을 이용하는 게 가능했기에 베오날드는 ‘분노’의 권속들이 물러간 그곳을 이용하여 여신에게 기도로 연락을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어지간한 성자(聖者)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저는 늘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을 보낸 것 자체가 특수한 상황이니 말이죠.]
‘아무튼 도움을 하나 주셔야겠습니다. 그… 엉망이 된 교단의 시선을 좀 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신탁 하나만 저기 교단 총본부에 쏴 주시죠. 제가 지정한 장소에 신성한 유물이 나올 거니 가서 찾으라, 라고 말입니다.’
[…지금 나보고 거짓을 말하라는 거냐?]
신에게 지시를 내린 거 자체가 기분이 나쁜 건지 존대하던 어투가 삽시간에 반말로 바뀐다.
이 여신님, 은근 성질이 더러운 것 같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가장 유효하며 좋은 수단이었다.
‘아니면 어디에 나자빠져 계신지 모르는 용사님에게 직접 교단 내부로 들어가서 암약하고 있는 사악한 무리들을 처단하라고 지시 정도는 내려 주십시오. 아니, 하다못해 용사님의 행방이라도 알려 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 보고자 하는데… 안 알려 주시잖습니까? 까놓고 말해서 저 저번에 하마터면 여신님 곁으로 갈 뻔했다고요?’
저번에 그 라미엘이라는 여자에게 당한 이후 베오날드는 더 이상 자신이 직접 무언가 흑막 같은 존재나 마족과 싸우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특기인 행정과 번영을 담당하고 인류를 지키기 위한 일을 하는 반면 그런 특수한 암살 일은 용사에게 맡기자고 열심히 여신에게 말하였지만, 이 여신님은 지독하게 용사의 행방에 대해선 알려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좀 도와 달라는 겁니다. 게다가 어차피 이야기한 위치에 제가 뽀려 놓은 성유물 하나 갖다 놓으면 거짓말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신다면 좋습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그, 하실 때! 꼭 반드시 찾아야 된다고 뉘앙스를 남겨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손에 넣어도 별 탈 없는 걸로 던져둘 거지만요. 그리고… 다음에 가능하다면 용사님의 행방도 좀 알려 주시고요.’
[…ㄱ… 아닙니다.]
이제야 이야기가 통한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일단 한시름을 놓으면서 너스레를 떨었지만, 마지막에 여신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았다는 미적거림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그대로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뜨게 된다.
***
북부, 베노피스.
500년 전, 대륙의 권력을 쥐었던 한 사람이 일생을 바쳐서 건설했던 최고의 영지. 하나 지금은 폐허가 된 채로 수많은 ‘분노’의 악마와 마족들이 돌아다니는 마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본래 이곳의 주인이 거처했던 거대한 저택의 폐허의 중심엔 붉게 빛나는 거대한 수정이 있었고, 주변엔 악마들과 마족들, 거기에 검은 옷을 입은 수상한 인간들 모두 그것에 무릎을 꿇고서 예를 갖춘 채 무언가 계속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보고해라.]
“예. 예정대로 남부에서는 노이멀 총리가 계속해서 ‘분노’를 쌓는 중이며, 동쪽에선 볼레아 놈들이 계속해서 ‘한 제국’과 ‘제국’의 경계를 침략하며 ‘분노’를 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쪽에서 우리 협력 관계였던 다이나 왕국이 배신했습니다. 결국 달켄 다이나의 주문 실패가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거대한 수정 앞에서 가장 거대한 붉은 용인이 서류를 들고서 열심히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바로 이 ‘분노의 마왕’의 권속 악마인 ‘블러드레이징 드래곤’ 계열의 대장인 ‘블러드리버’라는 자로 ‘분노의 마왕’을 따르는 마족과 악마들의 정점에 선 자였다.
보고를 들은 거대한 수정은 붉게 일렁이며 목소리를 다시 내었다.
[어차피 놈은 자신의 연구만이 목표였을 뿐, 사실상 협력자가 아니었지. 하나 그곳에서 ‘사령술사’와 ‘흑마법사’를 합법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라미엘이 질문을 해 왔습니다만, ‘어째서 그 베오날드라고 하는 신의 종을 살려 두신 겁니까?’라고 여쭈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자인데, 왜 내버려 두냐고 말입니다.”
[당연히… 더 큰 ‘분노’를 부르기 위함이지, 라고 전해라. 이곳에서 ‘성맥’을 통해서 마력을 흡수하여 정신은 깨어났지만 내가 다시 이 땅에 강림하기 위해선 더… 더 큰 분노가 필요하다. 노이멀 총리에게 남부의 모든 인명을 단숨에 쓸어버리지 말라는 것도… 볼레아의 놈들에게 총력을 다해서 공격하지 말라는 것도… 원한을 쌓고, 분노와 증오를 쌓기 위함인 것!]
“예. 하나 필멸자인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겠지요. 원한다면 이미 우리 선에서… 이 땅을 모두 불태웠을 텐데 말입니다.”
고고고고고……! 치이이이이!
‘블러드리버’가 끓어오르는 전의를 표하기 위해 붉은 기운을 불태우자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지고, 수분이 증발하여 연기가 피어오른다.
분노의 겁화를 상징하며 피로써 그것을 식히고자 하는 이 ‘블러드레이징 드래곤’의 용인들, 그리고 그 정점인 그는 당장이라도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내려가서 모든 생명을 없앨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생명을… 우습게 아는구나. 인간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더구나 이미 난 이곳에서 한 번 쓰러졌다는 것을 잊었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내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허튼짓해서 일을 더 크게 망치지 말고 내 지시를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마계’로 돌아와서 영원한 고통을 겪게 해 줄 테니 말이다.]
“예, 예! 그렇게 일러두겠습니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던 ‘블러드리버’이지만 결국은 ‘분노의 마왕’의 부하. 그렇기에 절대적인 상하 관계가 있다.
그 말을 하고 난 뒤, 수정에 빛나던 불은 꺼졌다.
연락을 마친 ‘블러드리버’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다른 악마들에게 지시를 내려 부하로 부리거나 협력하는 인간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며, 베오날드의 존재에 대해서 방해하지 말라고 다시금 일러두었다.
마왕의 의도는 500년 전, 세상에 자신을 강림시킬 만큼 거대한 분노를 일으켰던 그 ‘베오날드’라면 결국 어떻게 되든 간에 또다시 자신을 강림시킬 ‘분노’를 세계에 일으킬 것이라 믿은 것이었다.
***
그 뒤, 베오날드의 작전이 아주 잘 먹혀든 것인지 교단은 갑자기 나타난 신탁으로 인해서 성유물 탐색이라고 하는 과업을 행하기 위해 모두가 몰려가면서 자연스럽게 베오날드에 대한 이야기는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거봐요. 제 예상대로 되었지요?”
“맙소사…….”
‘그야 이단 쪽이든 아니든 ‘성유물’ 하면 미치는 게 교단의 정석이지.’
이단 쪽이면 이제 같이 손잡은 마왕, 마족과 악마를 해할 수 있는 성유물일지 몰라서 눈에 불을 켜고 먼저 입수하려고 들 거고, 충성스러운 쪽이면 그쪽은 그쪽대로 내부에 이단이 있는 걸 알든 말든 여신이 직접 찾으라는 ‘성유물’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걸로 한시름을 놓은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개혁의 드라이브를 질주하려는데, 하나 이번엔 또 다른 쪽에서 방해가 들어온다.
“그런데 말일세. 수도에서… 사신이 왔네만, 이건 어떻게 하겠나?”
“음, 무슨 일로 왔죠?”
“필시 저번 전쟁에서 보인… ‘마갑주’ 때문일 걸세.”
“대충 예상되는군요.”
산 넘어 또 산이라고, 간신히 교단의 고개를 돌려놓으니 이번엔 제국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마르텡 남작과의 전쟁에서 선보인 ‘마갑주’의 막강한 위력이 결국은 황실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안 그래도 남부에서 설치는 노이멀 총리와의 긴장 상태 때문에 더 강한 무력이 필요한 그들에게 있어 흥미가 돋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조사를 위해서 황실 기사단장인 레기온 경에다가 크멜 가문의 기사까지 같이 파견 왔네. 허투루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의지가 보이더군.”
“그러면 직접 설명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일정을 잡지요.”
“후우~ 그래 준다니 다행이군. 내가 그 둘을 상대하기는 좀… 많이 힘들어서 말이야.”
발데리안 백작도 나름 정치가 되는 인물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으로, 노련하디노련한 레기온 경과 지혜를 겨루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베오날드에게 맡기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즉시 승낙하여 레기온 경과 크멜 가문의 기사와 만날 날짜를 잡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