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하이디 도착 약 30초 전.
베오날드는 살아가면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거의 가져 본 적이 없다.
부친 벨릭스 폰 노이멀의 막장 정책에 키워졌을 때 잠깐 빼고는 그의 삶은 언제나 나아감의 연속이었고,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인생뿐이었다.
그 어떤 시도를 하든 공부를 하든 결국 잘못되어 봐야 죽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고, 아들인 알테리오 폰 노이멀에게 배신을 당해서 죽을 때도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했었다.
‘…뭐야, 이건?’
“결국 인간의 범주… 그것을 초월한 진짜 ‘분노’와 ‘증오’를 모르시는군요.”
열풍이 몰려오는 것 같은 뜨거운 공기와 함께 순식간에 청초하고 가련한 라미엘에게서 붉은 기류 같은 게 폭발하더니 베오날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무서운 동화나 괴물을 바라본 것 같은 원초적인 두려움이 신경을 타고 불탔다.
“으아아아아악!”
그 뒤론 격통에 비명만 질렀고, 어느 순간부터 의식과 기억이 사라진 그였다.
“으음… 여긴? 지옥… 은 아닌 것 같군.”
그 뒤로 눈을 뜬 베오날드는 우선 낯선 천장이 자신의 시야에 보이자 아직 죽어서 저승에 돌아온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어딘가 공허감이 느껴졌다.
뭔가 있어야 할 게 없는 느낌에 베오날드는 흠칫하며 깜짝 놀라서 일어나려고 보니 뭔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런… 참 꽤 큰 대가를 치렀군.”
어찌어찌 일어난 그는 자신의 왼팔이 있는 부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왼팔 하나만 잃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갈증부터 해결하고자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물을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가슴을 타고 몸을 식히는 감각과 함께 살아 있음이 한결 더 체감이 되는 베오날드였다.
“후우우우! 이제 좀 정신이 드는군.”
“어머? 베, 베오날드 님? 일어나셨습니까?”
“세인인가? 뭐, 그래, 일어나긴 했다.”
살아 있음을 체감하는 베오날드에게 나타난 세인은 그가 일어난 것에 깜짝 놀라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사실상 베오날드 일행의 중심이며,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기에 그가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 놀랐던 것이고 그가 깨어나니 기쁨에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베오날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일단 자신이 쓰러진 동안의 근황을 물었다.
“베오날드 님이 쓰러진 이후, 발데리안 영지는 물론이고 다이나 왕국에서도 난리가 났었습니다. 물론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히 일하던 라미엘 대주교를 비롯해서 몇몇 사제들이 대부분이 사라졌다는군요. 또 베오날드 님의 팔은… 발견했을 땐 이미…….”
“그래, 당한 거지. 아무튼 큰일 났군. 일단 일어나야…….”
“하지만 안정을 더 취하셔야…….”
“그래, 아무튼 여기서 누워 있을 새가 없다. 곧바로 나갈 준비를 하지.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말이야. 세인, 너는 하이디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일어난 것을 알려라. 난 발데리안 백작 혹은 케드론 님을 만나러 가지.”
3일간 누워 있던 것도 아까울 지경이다.
갑자기 일어나려고 해서 머리가 살짝 띵한 그였지만 이를 악물고 웃옷을 걸치고서 곧장 발데리안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병상에서 금방 일어난 거라 속도 허하고 빈혈도 일어나려 했지만 우선은 설명하는 게 먼저였다.
“후우… 실례합니다.”
[이 목소리는? 어서 들어오게. 깨어난 건가?]
“예.”
발데리안 백작의 집무실에 도착해 노크를 하고 들어간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발데리안 백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 속에 혼란스러워하는 발데리안 백작에게 베오날드는 차분히 자신이 당한 일과 교단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대주교 라미엘이 마왕의… 부하였다고?”
“예. 근래 이 영지에서 일어난 분쟁과 사건들도 아마 그들과 관련되어 있었을 겁니다. 아무튼… 밝혀져서 물러났으니 다행인 셈인데… 교단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충격에 빠졌었네. 다만 이제 입장상… 교단 내에서 배신자가 나온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고의 원인을 자네에게 돌리고 있지.”
“교단으로선 큰 불명예일 테니까요. 대주교급이 마왕의 끄나풀? 훗… 당장 교단은 물론이고, 교국이 사라져야 마땅한 일일 테니……. 후우~ 할 일이 많군요.”
“그렇겠지. 이런 상황이 되고… 머리가 식고 나니 결국 다이나 왕국과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충분히 성의도 왔으니 말이야. 자네 그 상황도… 심각하고 말이지.”
끄덕.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로 그들이 물러나 준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발데리안 가문과 다이나 왕국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득이었지만, 베오날드가 왼팔을 잃은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하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미소 지으면서 태연히 말했다.
“뭐, 심각한 거까진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팔 정도면 싸게 대가를 치른 거고… 또 연구해 볼 만한 게 생겼네요.”
“…허 참, 하긴 자네는 무인(武人)이 아니었지. 검술을 익히고 있어도 말이지.”
“예. 소양이나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 중 하나 같은 거죠. 하지만 이걸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저는… 역시 제게 맞는 일을 해야 하고, 그걸로 놈들에게 복수할 겁니다.”
“그러게. 나도 도울 수 있는 만큼은 도와주도록 하겠네. 다만… 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건가? 그쪽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하긴요. 정신을 안 차리면 결국… 짓밟아야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그것도 엄연히 제 특기입니다. 아주… 작살을 내 버리겠습니다.”
간만에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베오날드는 교단 문제도 해결할 거라 생각하면서 앞날을 구상하였고, 마왕의 수하 놈들에겐 자신을 이렇게 살려 둔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하며 의욕을 불태웠다.
***
그 뒤로 우려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베오날드의 중재 덕분에 다이나 왕국과 발데리안 가문 간의 화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아직도 감정의 앙금이 남아서 그런지 화해 조인식을 할 때 다리온 왕과 발데리안 백작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뒤엔 이제 베오날드의 지위가 바뀌게 되는데, 다이나 왕국의 재상이자, 후계자인 케드론의 상담역을 맡게 되면서 중재자의 위치를 차지함과 동시에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백작님!”
“그러면 이대로 그 친구를 빼앗기자고? 저기 다이나 왕국에선 재상까지 줬는데? 더 이상 말하지 말게. 저 하이디 경의 영지를 저리 키운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하지만……!”
“좀 더 대국을 읽게!”
반발은 발데리안 백작 선에서 일축해 버리고 강행, 물론 여기에서 말로만 해서 들을 인간만 있는 건 아니었기에 휘하 귀족들 중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군사 활동으로 일어나게 된다.
발데리안 백작 아래에 마르텡 남작이라고 나름 큰 영지를 가지고 영향력도 있는 귀족이 베오날드가 쥔 권력에 반발해서 그를 없애려고 주변 귀족들과 힘을 합쳐 기사 120명과 군사 7천을 일으켜 공격해 오며 베오날드의 실각을 요청하였다.
“…어떻게 하겠나? 이 정도 공세라면 내전으로 상처 입고 싶지 않아서 웬만하면 들어줘야 하는 건데…….”
“뭐, 본보기가 필요하긴 했습니다.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군사는… 진형을 유지할 천 명만 빌려 주십시오.”
“그러게. 그… 너무 많이 죽이진 말게나.”
“알겠습니다.”
귀족 사회적 기준으로 충분히 엄포를 놓은 계산이었지만 칼을 들고 온 것에 베오날드는 칼로 맞서기로 결정, 직접 만든 강철로 된 의수를 차고서 돌아가 빌린 군사를 모았고, 마갑주를 착용한 하이디와 함께 전장에 나서며 자신의 걸작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이걸 써 보겠군.”
그 뒤로 군사를 이끌고 출진한 뒤, 마차에 연결된 컨테이너 안을 지켜보는 베오날드였다.
안에는 높이 약 2.5미터의 육중한 갑주가 있었는데, 화려한 금장 장식과 함께 곳곳에서 마법 회로와 술식이 빛나고 있는 이것은 바로 쓰러지고 일어난 뒤에 완성시킨 베오날드의 전용 마갑주였다.
케드론과 하이디의 것을 만들 때의 시행착오를 토대로, 골렘 전문 연금술사인 아르젠과 술식 개선을 담당하는 다리온 왕과 술식 세공 전문 연금술사인 자신까지 포함, 총 3인의 천재가 전문적으로 달라붙고, ‘진리의 성’의 주요 마법사들까지 도와 가며 완성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최적화된 술식 회로, 외부 소재뿐만 아니라 내부 소재까지 유연성과 마력 흐름을 인체와 거의 유사하게 만들어 새겼으며 등에 멘 마력 배터리는 단순히 마정석을 보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마정석을 규격화해서 다듬어서 더 효율적으로 오랫동안 기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관련 무기들도 개발이 진행되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는데, ‘오러’나 ‘검기’를 사용하는 원리로 검날 부분에 절삭력을 쇠나 칼날이 아닌 마력의 검날을 만들 수 있는 ‘오러 슬래셔’부터 시작해서 마력을 집중해서 쏘는 ‘마력포’뿐만 아니라 ‘볼트 슈터’를 대형화한 ‘볼트 라이플’ 등등… 마갑주 스케일로 만든 각종 무기들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자, 뭐부터 실험해 볼까나? 후후후, 아주 기대가 되는군.”
“베오날드 님! 곧 전장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알았다. 슬슬 준비하도록 하지.”
전령의 대답에 응하며 베오날드는 곧바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르텡 남작의 군대 7천과 베오날드의 군대 1천이 만난 곳은 평야였다.
마르텡 남작을 비롯해서 휘하 귀족과 기사들은 자신들 쪽 전령이 가져온 정보를 보고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엔 그들은 1천 명만 오기에 그냥 항복하는 줄 알았는데 또 전령이 가지고 온 서찰엔 그냥 대놓고 붙어 보자고 도발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놈이 제정신인가? 하!”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군요.”
“주변에서 띄워 주니 분수를 모르는가 보지요.”
“으음, 하나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놈은 다이나 왕국과 인연이 있는 만큼 혹여나 마법사들을 데리고 왔을지 모릅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7천 대 1천 명이오. 계략이 있다고 한들 결국 이 평원에서의 싸움은 순수한 병력 싸움. 설사 대마법사를 데려왔다고 해도 빠르게 기병들로 접근해 버리면 손도 못 쓰겠지. 애초에 그 정도 전국을 뒤흔들 정도의 마법사라면 진작 알리면서 엄포를 놓았을 거 아니오?”
베오날드가 신무기(?)의 테스트를 하기 위함이라는 속셈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들은 여러 억측만을 내놓으면서 주군인 마르텡 남작의 눈을 가리게 된다.
더불어 병력 차로만 보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전장에서 전공을 세우기 위해 너도나도 상대의 눈을 흐리면서 치장하고 자신이 나가야 한다면서 혼돈의 도가니가 된다.
“허허허, 다들 열의가 뜨거우니 감사할 따름이오. 하나 이번 전장은 내 아들인 볼라스에게 맡길 생각이오. 아, 그리고 놈들에게 답장도 보내야겠지.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자고 말이지. 하하하하핫!”
결국엔 지휘관은 마르텡 남작. 딱 봐도 쉬운 전장이니 후계자이자 아들에게 전공을 주기 위해 그에게 선봉을 맡기기로 한다.
그러면서 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었고, 약 한 시간 뒤 답장이 도착함과 동시에 양군이 대치하였다.
이쪽 지휘관은 베오날드. 마갑주를 입은 채로 그 거인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서찰을 받아 보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역시 인간끼리 싸우는 게 편하다니까……. 정신병자인 마족보다 훨씬 낫지.”
“7천을 이끌고 왔는데… 1천 명에게서 도망치면 그것도 불명예스러우니 말이죠.”
“사실 한 3천 정도 빌려 올까 했지만… 너무 쉽게 항복하면 재미없으니까 아주 우습게 보이도록 1천을 데려온 거지. 하이디, 나는 나가서 싸울 거니 오늘은 네게 진영을 맡기마. 잘 지킬 수 있지?”
“예, 베오날드 님! 저희 깃발을 걸고 싸우는 첫 전투! 당연히 그 전공은 베오날드 님께서 쟁취하셔야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이때까진 남의 군대에서 끼어서 싸운 격이었지?’
전생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베오날드는 그동안 자신의 군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된다.
베오날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화려하게 대비하자고 생각하면서 하이디에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천을 하나 가져다 달라고 일러둔 뒤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