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퇴치 대상이신 분에게… 그런 칭찬을 들어도 영 기쁘지 않군요. 한데… 분노의 마왕님치곤 꽤 드라이하시네요.’
[깊고… 뜨거운 분노일수록… 더욱 고요하게 타오르는 법. 나는 생(生)… 그 자체에 대한 깊은 분노가 타오른다. 나는… 반드시… 깨어날 것이고… 모든 생(生)을 불태울 것이니… 너는 그날을 기다리도록 해라.]
“헉!”
분노의 마왕의 마지막 말과 함께 베오날드는 눈이 떠지면서 의식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하는데,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으며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간 듯 엎드린 채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게 보통 인간, 그것도 암흑신에 대한 신앙이나 흑마법을 익히지 않은 주제에 마왕을 부른 대가인가 싶은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 일단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후우… 후우… 참으로 기묘하게도 얻어걸렸군. 후우우… 후우우…….”
참회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베오날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기도해서 마왕이 튀어나왔다는 건 이곳 교단에 ‘암흑신교’나 ‘마족’이 침투해 있고 이미 그의 손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였고, 오늘 상태가 이상했던 발데리안 백작의 상황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여기 신관들 중에 분노의 마왕의 수하가 있고, 그 영향이 끼치는 곳이라서 다들 이상했던 거군.’
자신을 포함해서 왜 갑자기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민감하게 ‘분노’하게 된 건지 이해하게 된 베오날드였다.
‘분노의 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말 그대로 대륙 규모의 사람들의 분노와 갈등이 필요했고, 남쪽엔 노이멀 총리, 동쪽엔 볼레아 왕국이 있어서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 발데리안 가문만은 안정적이었고, 다이나 왕국과는 대립한다곤 하지만 조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서 이 신전에… 마족이나 암흑신교의 인간이 잠입해 있다는 거군. 하지만 정말… 최악이야.’
본래 원한 관계였던 발데리안 가문과 다이나 왕국의 화해를 이곳 발데리안 영지에서 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민감하게 ‘분노’를 끌어 올리는 그놈들이 있으면 좋지 않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베오날드는 몸이 좀 움직일 만해지는 즉시 일어나고자 했다.
“후우… 오면 좀 평화롭게 지내면서 번영에만 힘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해결해야 하는데, 이거 난감하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앞에 닥친 문제가 점점 심각해 보였다.
일단 ‘여신교’ 교단 내부에서 자정을 못할 정도로 침투당했다는 건 소름 돋는 일로, 이젠 교단이 무조건 적인 아군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변수를 생각해야 할 게 하나 늘어났으며 동시에 교단이 무슨 행동을 하건 간에 마족과 암흑신의 의심을 안 할 수 없는 것만으로도 엄청 피곤해지는 일이다.
‘점점… 큰일이 난다는 느낌이 절로 들어. 대체 이런 상황인데, 용사는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원… 하아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베오날드는 슬슬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힘겹게 일어서서 이곳을 나갔다.
일단 나가자마자 교단이 위험한 건 알았으니 조심하자고 생각하고, 다이나 왕국으로 돌아가서 흑마법사들에게 의뢰해서 다른 파벌 마족의 힘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생각하며 참회실 밖으로 나간다.
“하이디, 돌아가자. 일단 볼일은 다 봤는데…….”
“아, 나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수상한 자는?”
“아무도 오거나 가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좋아. 일단 이 도시를 빠져나가서 이야기하지.”
“예.”
하이디와 대화를 나누며 돌아가는 베오날드는 일단 이 발데리안 성에 있는 동안엔 참고 정신을 집중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서두른다.
그리고 발데리안 성을 떠났을 때에야 베오날드는 하이디에게 교단에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게 된다.
“교단에… 암흑신교가 말입니까?”
“아직 추측이지만 그런 것 같다. 문제는 누가 그 흑막인지를 모른다는 거지. 아무튼 앞으로 발데리안 영지를 갈 땐 정신 집중하고, 적진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조심해라.”
“예! 알겠습니다.”
기운차게 대답하는 하이디의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우려가 아직 큰 베오날드였다.
교단 내에 숨은 적을 찾기가 생각보다 힘들 가능성이 컸다.
교단이라는 조직의 특성상 일단 내향적이며, 겉으로 나오는 자들은 주교나 대주교급 인물 정도나 한정되지 내부에서 수도를 하는 일반 성직자들 사이에 그런 인물이 있으면 밖에선 도무지 알기가 힘들다.
‘가뜩이나 음습하고 비밀스러운 게 교단인데… 심지어 만약 잠입한 게 여성이면 더더욱 알기가 힘들어.’
특히 밖으로 모험이나 순례를 다니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 신전 내에 조용히 숨어 있거나 수양한다고 외부인과 만날 수 없을 테니, 베오날드는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엄청난 위험한 일이라 여기고 진땀 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당장 자고 일어나는 대로 교단에 숨은 자를 찾을 방법을 알아봐야겠군. 신관들을 뒤지기 위해선 상당한 정치 공작과 방법이 필요할 테니… 으으으음… 철저히 준비해야겠어.’
교단을 헤집는 건 대륙을 손에 쥔 권력을 가진 500년 전에도 힘든 일이었던 만큼 베오날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구상하기 시작한다.
천만다행하게도 일단 이전 ‘식량 사태’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 하륀 대주교와 인연을 만들어 둔 덕분에 신전에 출입하는 자체는 어렵지 않기에 차분히 일을 진행하자고 생각했다.
***
3일 뒤, 발데리안 영지 인근 가도.
베오날드는 우선 3일 동안 지하 마법진을 통해 다이나 왕국을 오가면서 흑마법사들에게 상담을 받아 암흑신과 마족의 공격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방안을 토론했다.
하륀 대주교를 만나 그의 협력을 얻는 게 가장 좋지만, 이미 발데리안 성에 영향이 큰 만큼 베오날드는 미리 준비를 하고 가기로 했다.
마차로 신전으로 향하던 베오날드는 발데리안 성 인근에서 마차를 멈추고서 준비를 한 뒤 하이디에게 지시를 내리고 나섰다.
“하이디, 너는 이 마차 안에서 ‘마갑주’를 입고 대기를 하다가 내가 마도구로 신호하면 바로 날아오도록 해라.”
“예!”
“좋아. 그럼 가 볼까?”
베오날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준비를 마친 뒤에 발데리안 영지로 홀로 들어갔다.
전에 들어올 때는 마차 안에만 있어서 보지 못했던 주변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왜 돈을 그따위로 주냐고?”
“돈을 줬으면 된 거지 뭐가 어째?”
“이 자식이?”
퍽! 쿠당탕!
그냥 떠들썩한 도시인 줄 알았는데, 조금만 자세히 보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은 보통 사소한 일로는 거의 싸우지 않고 아무리 못해도 욕만 하고 넘어가지, 폭력을 쓰는 건 정신이 이상하거나 정말로 내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면 잘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긴 매일매일이 수라장이었다.
“야, 이 자식들아! 또 싸우냐?”
“좀 멈춰! 대체 매일같이 왜 이러는 거야?”
“이 새끼들, 다시는 못 싸우게 팔다리를 분질러 버릴까 보다!”
“아아악!”
그리고 치안을 유지하는 병사들과 기사들도 이런 일이 낯설지 않은지 각자 몽둥이를 들고 제압하는데, 폭력의 수위가 상당히 높았다.
결국 영지민은 이 영지의 재산이라서 살인 같은 중죄, 도둑질, 반역죄 같은 게 아니면 적당히 손만 봐 주거나 범죄면 범죄에 따른 법적 처리만 하면 되며 이것이 잘 지켜져야 치안이 굳건해지는데, 하나 지금 기사들과 병사들은 분노에 눈이 돌아서 싸우던 영지민들을 과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으으으… 으어어어어…….”
“젠장! 죽어 버리다니! 어이! 이놈 시체를 성 밖에다 갖다 버려!”
‘이건 정말… 심각하군.’
결국 과한 폭력에 죽어 버린 두 사람의 시체를 기사는 태연하게 갖다 버리라고 지시를 내린다.
병사들은 같이 폭행했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시체를 나르고 움직였지만, 대낮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주변에 있는 영지민들은 웅성거리면서 눈빛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분노의 연쇄. 작은 분쟁으로 결국 사람이 죽고,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또다시 분노와 의심, 그리고 죽은 이들의 가족은 더 큰 분노를 품게 된다.
‘정말 더 늦었으면 큰일이 났을 수도 있었겠군. 아무튼 빨리… 신전에서 암약하는 그놈을 찾아야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더 크게 인지한 베오날드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도착한 신전. 역시 그래도 신전이라 그런지 이 주변은 상당히 침착한 분위기였다.
베오날드는 곧장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간 다음 하륀 대주교를 찾기 위해서 안에서 일하는 신관에게 물어보고 그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신관은 공교롭게도 놀라운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게… 하륀 대주교님은 성자의 칭호를 받으신 뒤로 더 큰일을 하기 위해서 교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랬군……! 설마 하륀 대주교가 자리를 비웠을 줄이야.’
처음엔 상식적이고 신실한 그가 어떻게 당했을까 궁금했던 베오날드였지만, 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면 해답을 풀 필요가 없는 문제가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교대한 그 대주교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거나 혹은 그가 데려온 자들 중에 끄나풀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그 후임분은 오셨는지요?”
“예. 이곳은 대영지라서 중책을 비울 수 없으니 곧바로 왔지요. 후임은 ‘라미엘 대주교’님이십니다.”
“라미엘 대주교라.”
“본래 전투 사제단에 계시던 분인데, 치열한 전투 끝에 고위 마족을 쓰러뜨리고 대주교의 자리에 오르셨지요. 다만 그 상처가 너무 큰 탓에 전투 사제단에서는 은퇴하시고 부상 요양도 하실 겸 하륀 대주교님과 교대하시게 된 겁니다.”
“호오… 그러면 그분을 혹시 뵐 수 있을는지요.”
“예. 아마 가능할 겁니다. 이곳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 인계랑 적응하시는 것만으로도 바쁘시니까요. 베오날드 님이라면 뭐… 중요하신 분이니 만나 뵈는 게 당연하겠지요.”
베오날드가 발데리안 가문과 친근하다는 것을 알기에 신관은 대주교에게 그의 방문을 알리러 향했고, 잠시 뒤 돌아온 그 신관은 대주교 라미엘이 그의 면담 신청을 받아 주었다고 하면서 안내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오시지요.”
“예.”
그대로 신관의 안내를 받은 베오날드는 이전 하륀 대주교가 썼던 그 방에 도착했고, 노크를 한다.
[예, 들어오십시오.]
‘오… 좋은 목소리군.’
안에서 들려온 것은 가느다란 미성. 여성 편력이 깊은 베오날드도 꽤나 호감 가는 목소리였다.
대답을 들은 베오날드는 천천히 문을 열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라미엘 대주교의 모습을 살펴본다.
대주교들이 입는 신관복은 화려했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화염처럼 타오르는 색으로 빛나는 윤기 있는 붉은 머리칼, 거기에 두 눈을 가린 검은 안대였다.
‘…눈이?’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베오날드 님.”
두 눈을 가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오날드가 있는 방향을 착각하지 않고 먼저 허리를 깊이 숙이고 우아하게 인사를 하며 그를 맞이한다.
일단 겉모습만 봐서는 상당히 고요하고 침착한 분위기여서 도저히 ‘전투 사제단’ 같은 곳에 있을 인물 같아 보이지 않는 여사제의 교본 같은 청초한 느낌인 라미엘 대주교를 보며 베오날드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