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98화 (198/259)

[198화]

“하지만 백작님, 잊으셨습니까? 그래 봐야 다이나 왕국은 사실상 도시 국가입니다. 영지 하나뿐, 대륙 전체에 마법사들을 보내서 받는 기부금과 마도구, 포션 판매로 그곳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상비군이라고 해 봐야… 각 학부의 마법사들뿐이죠. 대체 거기랑 손잡는다고 해도 정복이… 되겠습니까?”

“하나 우리 가문을 제압만 하면 되지 않는가?”

“가문을 제압한들 가신분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주변 가신들 전부 결국 발데리안 가문의 가족이잖습니까?”

“아니, 그래도…….”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 정도만 해도 알아들어야 할 양반이 갑자기 저돌적으로 나오는 게 뭔가 이상했다.

물론 사람이 언제나 논리적일 순 없지만, 그래도 대귀족 정도라면 이쯤에서 알아먹어야 정상이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발데리안 백작은 집착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거세게 추궁하고 따지면서 화를 내려는 것이 심상치 않은 베오날드였다.

‘뭔 약을 잘못 먹었나? 아니면 누가 마법이나 다른 수작을 부린 건가?’

“말해 보게! 어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일단은 저 정신 좀 차리게 해 볼까?’

어떤 수작인지 정신에 손을 댄 것이 확실치는 않지만 일단 베오날드는 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뭔가?”

“자, 진정하시지요. 우선 한 대 피우시고, 이야기를 하죠. 백작님에게 드리려고 몰래 구한 최고급 담배입니다.”

“이게… 어음… 으으으으음……!”

백작은 계속 화를 내려다가도 베오날드가 내민 케이스에 곱게 싸여서 들어 있는 권련을 보자 주춤거렸다.

거의 상시 담배를 물고 다닐 정도로 헤비스모커인 그로서는 고급 담배의 유혹엔 이길 수 없었으리라. 비록 정신이 조종당했어도 담배의 금단 현상도 그것에 비견될 만큼 막강한 것이니 말이다.

“흐음, 어디… 으으으음… 스으읍…….”

‘정신을 차리면 좋고, 아니면 진정할 수 있겠지.’

“으음… 콜록! 콜록! 아니! 이게 뭔가? 이거 담배가 아니잖아! 콜록! 뭐가 이렇게 독해? 어? 이건? 뭐야, 내가 지금까지…….”

베오날드의 예상이 다행히 들어맞았던 건지 발데리안 백작은 갑자기 진정된 자신의 상태에 어리둥절해했다.

방금 전까지 베오날드를 추궁하면서 거의 죽일 기세로 몰아붙였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분노의 기미조차 없어져 버리고 진정하게 된 것이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그건 사실 담배가 아닙니다. 각성제로 마시는 타입보다 더 빠르게 정신 차리기 위해서 대마초랑 다른 마약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를 섞어서 만든 겁니다.”

다리온과의 전투에서 마시는 타입이 복용 이후 흡수까지 시간이 걸리던 것에 착안해서 만든 신형 각성제로, 담배처럼 피워서 연기를 마셔서 빠르게 효과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혹여나 급할 경우엔 입에 넣고 씹어 먹을 수도 있고, 물약병에 넣어야 하는 각성제보다는 더 가볍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서 개선시킨 것이었다.

“아니, 그런 걸 나에게 썼다고?”

“그래도 진정하셨지 않습니까? 대체 누구에게 뭘 듣고 당하셔서 그 모양이 되신 겁니까?”

“어… 으으음… 그게… 잠시만 기다려 보게. 나도 지금 기억이 혼란스러워서 말이야. 허어참… 끄으으응, 내가 대체 왜 이렇게 되었던 거지?”

“으음…….”

일단 베오날드는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발데리안 백작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최대한 생각을 끌어내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미안하네. 전혀 모르겠네. 후우우… 이 정도까지 성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괜찮습니다, 백작님. 그럼 어쨌든 저는 이야기드린 대로 이곳과 다이나 왕국의 화해의 교두보 역할을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네. 그리하게나. 일단 나가 보게… 후우~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으니 말일세. 그리고 케드론 녀석을 불러 주게.”

“예.”

베오날드는 혼란스러워하는 발데리안 백작을 두고 나온 뒤, 케드론과 시종을 만나 그들을 백작의 방에 보내며 생각했다.

방금 일로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곳에 누군가 수작을 부린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발데리안 백작에게 저렇게 영향을 줄 정도라면 상당한 고위 귀족급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접근해 왔을 거라는 뜻이며 자신에 대해서 아는 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배후는 누가 되었든 간에… 암흑신의 수하인 건 뻔할 뻔 자였다.

‘…놈들이 암약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이야. 으으음…….’

딱히 방심해서 당한 건 아니긴 하지만 신경에 거슬리는 베오날드였다.

뱀과 히드라를 문양으로 사용하는 노이멀 가문의 주특기가 바로 암약인데, 엄연히 자신의 특기 분야로 이렇게 한 방 먹은 셈이니 당연히 거슬릴 수밖에 없는 그는 감히 자신에게 도전장을 던진 그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우선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한다.

“어떻게, 일은 잘되었나요?”

“그럭저럭. 자, 그럼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가 볼까?”

“우리 집이라니요?”

“…아니었나? 아무튼 내 정체는 너만의 비밀인 걸로 해 두자고. 알았지?”

“예예. 저도 딱히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셀리나와 떠들면서 베오날드는 하이디가 영지를 얻은 그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오랜만에 그리폰인 알테리오를 비롯해서 모두가 보고 싶은 그였다.

그렇게 길을 따라서 돌아가니 멀리 익숙한 지형에 있는 그녀의 영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베오날드는 놀라운 것을 본 듯 눈이 커졌다.

“호오……? 음,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전혀요. 지도를 보면 맞는데 말이죠. 역시… 남은 사람들이 유능하긴 한가 보네요.”

“그럼~ 누가 골랐는데?”

“…예전엔 재수 없다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저 그러네요.”

“당연하다고 생각해야지.”

본래 목책으로 둘러쳐진 영지가 어느새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과 동시에 높게 올라간 건물들의 광경이 그에게 보인 것이었다.

거기에 그곳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상인의 행렬이 번영한 도시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베오날드와 셀리나가 없는 사이, 하이디를 비롯해서 남은 이들이 아주 일을 잘한 증거라 볼 수 있었다.

“규모가 더 커졌군. 으음… 열의가 넘쳐서 너무 무리한 게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야. 음, 드디어 다 왔군.”

드디어 도착한 영지의 저택. 살짝 그리움이 솟아난 베오날드가 드디어 셀리나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자 정원의 철창 우리에 묶여 있는 그리폰 알테리오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오오… 알테리오, 오래간만이다.”

삐이이잇!

알테리오는 베오날드를 보자마자 날개를 펴고서 울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반응한 저택의 사용인들과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 사이엔 한참 일하다가 온 세인, 베시아, 하이디가 모두 같이 있었다.

셋은 베오날드를 발견하자마자 속도를 높여 그에게 달려왔다.

“베오날드 님!”

“대체 왜 이렇게 늦으신 거예요?”

“기별도 주시지 않고!”

“아, 내가 늦긴 너무 늦었지. 정말 미안하다. 도저히 빨리 올 수가 없었다. 아마 이야기를 들으면 너희도 이해할 거다. 그렇지? 셀리나.”

“예. 솔직히 엄청난 모험을 했지요.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해요.”

드디어 다시 뭉친 베오날드 일행. 다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오늘 일은 대강 종료해 버리고 베오날드와 셀리나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기로 한다.

사실상 이곳의 주인은 베오날드인 만큼 사용인들을 총동원해서 정성을 다한 음식들과 술을 준비하기로 하고 세인은 오랜만에 메이드로 돌아가서 대접하기로 한다.

“아니, 이제 굳이 메이드를 안 해도 되지 않나? 엄연히 이 영지의 관료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직접 해 보니 베오날드 님이 얼마나 굉장한지 알게 되었고, 부디 다시 일을 맡아 주시길 바라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하하하핫! 하긴 쉽진 않지. 하지만 그러니 재미있는 거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보람이 더 커지는 법이지.”

“하아~ 아무튼 돌아오셨으니 저는 제 임무로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 그럼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행정 일이 꽤나 고달팠는지, 세인은 현재 메이드 일을 더 행복하게 여기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외에 베시아와 하이디 쪽은 큰 변화 없이 자신들의 일에 만족한다는 듯 웃으며 각자 베오날드가 없는 동안 한 일에 대해서 자랑하기 시작했다.

“올 때 성벽 봤죠? 그거 제가 설계한 건데 어땠나요? 굉장하지 않나요? 새로운 공법을 연구해서 적용해 본 건데… 실험 때는 공격 마법은 물론 하이디 님이 마갑주를 착용한 상태에서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았다니까요.”

“그거 굉장하군.”

“물론 두 번 공격했을 땐… 얄짤없었지만요. 하아~ 대체 마갑주 그건 뭔지…….”

“하하하하!”

이렇게 근황 이야기를 하며 웃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행이었다.

그리고 슬슬 음식과 술이 나올 때쯤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다이나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발데리안 백작에게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색을 살짝 거친 뒤에 달켄 다이나가 벌인 음모와 그것을 막기 위한 한 편의 모험담이 펼쳐졌고, 세인과 베시아는 기겁하는 눈치였지만 하이디는 눈을 빛내면서 흥분했다.

“세상에! 그거 완전히 용사의 행보 그 자체 아닙니까?”

“아… 대충 그렇지? 하지만 두 번은 하고 싶지 않더라. 정말로 죽을 뻔했거든. 가능하면 진짜 용사님에게 맡기고 싶다.”

“베오날드 님이 죽을 뻔할 정도의 위기! 으아아아아… 그야말로 역경이었군요. 더욱 부럽습니다.”

‘…나도 그런 걸 너에게 줄 수 있으면 주고 싶다.’

고생을 직접 한 사람과 듣는 사람의 시야 차이, 거기에 순수 기사 가문 혈통인 하이디가 역경을 동경하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넘어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가 슬슬 무르익고, 서로의 근황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이제 현 상황에 대한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된다.

“그나저나 영지가 상당히 커졌더군. 물론 지침을 주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크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속도를 낮출 수 없는 그런 상태라고 봐야 하거든요.”

“게다가 여기를 노리는 자들이 부쩍 많아져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맞아요. 베오날드 님이 빨리 안 오셔서 어떻게 되었냐면 말이죠.”

견물생심, 가치 있는 것이 그냥 놓여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단기간에 인구를 빌려 와서 성장한 이 ‘하이디의 영지’. 달이 바뀔 때마다 부쩍부쩍 성장하는 성장세는 단숨에 폭발하고 있었고, 심지어 남부에서 도망쳐 오는 피난민들까지 받아들여서 이미 중소 도시의 규모는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렇다 보니… 영지민을 빌려 준 귀족들이 주판을 두들겨 보니까 이젠 자기가 손해인 게 분명하게 되어 버렸고, 여기 하이디 경은 알다시피 결혼 적령기인데도 미혼이다 보니…….”

“다 노리고 있다는 거군.”

“예. 각종 사교 파티 초대 및 맞선이니… 심지어 구애하러 온 귀족가 자제들까지 있었어요. 케드론 님과 발데리안 백작가에서 어느 정도 막아 주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지라.”

아무리 대귀족이라고 하더라도 귀족 사회의 통념과 문화까지 거스를 순 없는 법이다.

관리하는 베오날드가 부재중에 하이디라는 여성 하나만 잡으면 여기 맛있게 잘 만들어진 영지가 그냥 굴러들어 오는데, 노리지 않는 이가 이상할 정도인 상황이니 베오날드는 빠르게 납득하며 혹시라도 더 늦었으면 큰일 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