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그리고 준비를 마친 베오날드는 즉시 다리온 왕이 수배해 준 마차를 타고서 서찰을 전하러 직접 발데리안 영지로 돌아가게 된다.
정찰을 간다고 해 놓고 아주 한 세월 살다가 돌아간 셈이었기에 베오날드는 발데리안 백작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이나 왕국과의 회담이라면 가문의 중대사이니 발데리안 백작도 와 있겠군. 흐으음…….”
“…….”
“왜 그러나, 셀리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귀환하는 길, 대동한 셀리나가 계속 눈치를 보는 것이 신경 쓰인 베오날드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체가 밝혀진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녀는 베오날드가 500년 전의 베오날드인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아뇨.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신기해서 말이죠. 500년 전 사람이 여기에… 그것도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있으니 말이에요.”
“그야 다시 태어나서 아기 때부터 지내면서 학습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애초에… 500년 지난 변화가 안 보이고 말이야. 오히려 저 ‘진리의 성’만 빼고 다 퇴보했던걸?”
“교단 때문에 말이죠. 게다가 나이도 많이 드셨지 않나요?”
“전생이랑 포함하면 족히… 110살 정도 먹긴 했지.”
“히익… 근데 그동안 어떻게 위화감 없이 행동한 거예요?”
나이로만 보면 110살의 어르신이지만, 베오날드는 진중하기도 했지만 때론 쾌활하고 유치할 때도 있어서 주접스럽다는 생각이 슬쩍 들 수도 있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셀리나의 질문에 답해 준다.
“아마~ 정신은 육체를 따라가니 그런 거지. 영혼은 모르지만, 결국 육체와 두뇌는 젊으니까 그 속도나 행동에 따라가는 것 같아. 가령~ 예를 들면 어릴 땐 몸이 가벼워서 막 날아다닐 것처럼 뛰어다닐 수 있지만 서른, 마흔쯤 되면 이제 되도록 몸을 강하게 쓰고 싶지 않아지는… 뭐 그런 거라고 해야 하나?”
“흠흠… 그렇군요.”
“혹시 이것도 뭔가 탐구 과제인가?”
“그럴 리가요.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거죠. 하아~ 여전히 정말 적응 안 되네요. 지금 내 눈앞에 바로 그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있다니…….”
“으음, 직접적으로 질문을 못해서 이제 와서 물어보는 건데, 대체 교단 놈들이 날 어디까지 음해한 건가? 이름을 없앤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솔직히 이런 거 대놓고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말이지.”
아르젠, 다리온 왕을 비롯해서 다른 학부의 점잖은 양반들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보니 서로 폐가 되거나 혹은 비방하는 말이 될 수 있어서 이런 말을 걸지 못하는 반면 셀리나와는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아닌 관계로 오래 지내다 보니 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좀 많이 비방이 붙었어요.”
“그러니까 그걸 좀 자세히 듣고 싶거든. 교단 놈들과도 결국 한바탕(?)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지.”
“음… 그러니까 일단 황제를 꼭두각시 삼아서 제국의 전권을 쥐고, 횡포를 부렸다고…….”
“아, 관점의 차이가 좀 있지만 그건 맞아. 그 멍청이는 건강 유지만 해도 힘들어서 제국 말아먹기 전에 내가 그냥 권력 잡았어. 황실 기사단장이랑 태황후마마의 승인을 받았지.”
“그러니까 사실… 이네요?”
“사실이지. 딴것도 좀 말해 봐. 어차피 가는 동안 시간은 남아도니 말이지.”
시작부터 뭔가 뻘쭘해졌지만 일단 베오날드의 요구에 셀리나는 500년 뒤 지금 전해져 오는 베오날드, 즉 이름 없는 간신에 대해 전해져 오는 것을 하나둘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보자, 사치가 심해서 금물로 된 강을 만들었다든가?”
“아니, 금화로만 강을 만들었어. 금물로 강을 만들려면 강을 열어 둔 곳에 온도 조절도 해야 하고, 금을 녹여서 흘러내리게 하는 등등… 낭비가 얼마나 심한데? 안 그래?”
“그거나 그거나 아닌가요? 그리고 제국의 창고를 자기 자신 것처럼 썼다거나?”
“제국의 창고엔 손을 안 댔어. 그저… 내가 권력을 잡고 세금이라든가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것을… 유지비 제외하고 내 손으로 회수했을 뿐이지.”
“그것도 그게 그거잖아요!”
“에이~ 섭정으로 일한 수고비는 받아야지. 보람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나?”
아주 태연하게 당당히 말하는 베오날드의 말에 기가 찬 듯 셀리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엄연히 국가 예산 착복이자 공금 횡령을 비롯한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그냥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범죄를 태연히 자랑스럽게 말하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안 들킨 건가요?”
“그야 황실 기사단장이랑 태황후마마 모두… 정치에는 강해도 숫자엔 약하시거든. 대놓고 조작한 장부를 보여 줘도 몰라. 푸하하하하핫! 그것도 10년 가까이 말이지. 푸하하하하핫!”
“…죽을 만했네요.”
“푸하하하하핫! 죽을 만? 아니지. 사람은 죽을 만해서 죽는 게 아니야. 약해서 죽는 거지.”
움찔!
셀리나는 지금 베오날드의 말을 듣고는 오한이 들어서 움찔거렸다.
정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부분부분 드러나는 차가움과 냉혹함이 담긴 뱀과 같은 싸늘한 눈빛이… 과연 ‘궁극의 뱀’인 히드라를 문양으로 삼는 ‘노이멀 가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었다.
베오날드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을 눈치채고 좀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뭐, 그래도 거짓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가령~ 보자, 투기장을 만들어서 매일같이 죽음의 쇼를 즐겼다든가? 그건 완전 거짓말이지. 내가 인적 자원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데. 게다가 세수를 늘리려면 평민을 한 명이라도 더 늘려야 해서 노예제를 최대한 축소시키려고 애쓴 부분도 있다고~”
“당연히… 그런 비상식적인 건 누가 봐도 허황된 걸 알아서 말할 필요가 없죠. 20만이나 되는 야만족을 산 채로 묻었다거나, 50만이나 되는 반란군을 그냥 개척 사업에 밀어 넣어서 모두 굶겨 죽였다거나.”
“아, 그건 사실이야.”
“…네?”
충격적인 사실에 눈을 크게 뜨는 셀리나였는데, 베오날드는 충격받은 그녀를 위해 아주 친절하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보지 말라고. 나름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니까…….”
“20만의 인간을… 학살한 게 이유가 있다고요?”
“자, 천천히 들어 봐. 내가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놈들과 싸웠고, 당연히 이겼어. 처음엔 나도 그냥 항복만 받거나 아니면 배상금이나 두둑이 뜯어내거나 노예나 잔뜩 받고 끝낼 생각이었어. 그게 정상이고 말이지.”
“그런데요?”
“그런데 항복 회담하는 그날! 그 야만족 새끼 족장이 항복한다면서 나에게 귀한 음식이라면서 뭘 내밀었는지 아냐?”
“…아뇨?”
“15살짜리 여자애를 산 채로 양념 발라서 구운 통구이. 자신도 신에게 제물로 바칠 때나 맛보는 거라면서 특별히 준비했다고… 심지어 사람 형태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나한테 내밀면서 ‘여기 볼때기 살이 가장 제일 맛있습니다.’라고 태연히 말하는데 그걸 둬야겠니?”
베오날드의 말에 셀리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듯 안색이 새파래졌다.
물론 아무리 상상을 한들 실제로 그것을 보고 그 대접을 받은 베오날드보단 기분이 나빠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베오날드는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정신적 상처가 컸던지 아주 생생하게 증언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식인 문화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종교적인 걸로만 착각했지. 근데 좀 더 자세히 알고 보니… 도가 지나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생기면 애들 훔쳐서 잡아먹는 건 예삿일이고, 대놓고 비상식량을 낳는다고 할 정도라. 이건 노예로 쓰려고 잡아가도 막 평민 가정에 아이들 식인 사건 생기고 하면 난리가 날 것 같더라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
“으으으… 저, 정말인가요, 그거?”
“증거도 있어. 워낙 지독한 거라 나도 이건… 후세에 알려야 된다고 생각해서 ‘독니의 둥지’에 그 망할 새끼들 몇 놈 박제하고 유물이랑 기록 다 넣어 뒀어.”
“…맙소사.”
“아무튼 그래서 일단 내부 회의하고, 부하들이랑 귀족들이랑 만장일치로 다 조져 버리자고 해서 겉으로는 항복 받아들이는 척하고 그 망할 야만족들의 모든 본거지를 싹 다 불태워 버리고 놈들은 황무지로 데려가서 파묻었어. 혹시라도 땅에 기어 올라와도 살지 못하게 하는 점도 있지만 그… 내부의 병사들이나 백성들에게 보여 줄 광경은 아니었으니 말이야.”
이런 점이 베오날드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꾸는 ‘정원’의 백성들과 가족에 대해선 자비롭고 좋은 귀족이자 아버지가 되려고 하지만, 그 밖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정원’을 위협하면 학살자가 되든 마왕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극단적인 타입. 그것이 베오날드였다.
“뭐, 그래도 자랑할 일은 아니긴 하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 아래 백성과 가신들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럼 50만… 반란군 이야기는요?”
“아, 그거? 어느 해에… 대륙에 기록적인 흉년이 들었었지. 그해의 봄, 초여름 때인데… 비가 하나도 안 오기 시작해서 심상치 않았던 나는 곡물을 아끼기 위해 전 대륙에 금주령을 비롯해서 식량난에 대한 대비를 지시했는데, 알다시피 세상에 모든 귀족들이 내 말을 처 듣는 놈만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아…….”
“자기 영지에 내정 간섭이니 뭐니 하는 놈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금주령은 솔직히 내가 선포했지만 지킨다는 생각을 안 했고…….”
이 시대에 ‘술’은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삶의 활력소나 마찬가지였다.
힘든 하루의 괴로움을 씻어 내고 잘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금주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놈들이 많은 판국이었다.
그나마 베오날드는 자신의 영지와 가신들의 영지, 황실은 통제가 가능했지만 그 외의 다른 귀족의 땅까지 저렇게 강제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당연히 흉년이 세게 와서 식량난이 터졌지. 그나마 황실과 내 영지와 가신들의 영지는 사전에 대비해서 사안이 나았지만 말을 안 들은 새끼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겠지?”
“아… 식량 지원 요청이 왔겠네요.”
“그렇지. 하지만 일단 괘씸하기도 했고, 그리고 더 문제는 늘 그렇듯… 그해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다음 해도 생각해야 하고, 백성들의 기력과 힘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싶었지. 그리고… 어리석은 자의 통치는 어리석음으로 끝을 맺어야 후세에 교훈도 되고 말이지.”
철저히 자신의 ‘정원’ 중심인 베오날드. 일단 섭정으로서 할 조언과 조치는 사전에 했으니 그 말을 듣지 않아 생긴 대가는 그들 스스로 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그냥 그대로 했으면 전쟁이 났을 테니… 다른 방안의 미끼가 필요했지.”
“미끼요?”
“그래, 미끼지. 도저히 안 되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미끼로 던졌어. 그리고 실행하면 식량을 지원한다는 식으로 계약을 했지. 안 그랬으면 그 50만과 내전을 벌여야 했을 거니까 당연한 선택이지. 또 이러면 내 부하들이나 백성들에게도 할 말은 있고 말이야.”
“아아…….”
“다만 문제라면 이제… 우리가 준 식량을 과연 그 어리석은 놈들이 제대로 배분했을 거냐는 거지.”
금주령 내리고 식량난에 대비하라는 베오날드의 말을 들어 처먹지 않은 그 귀족들이 지원받은 식량을 곱게 백성들을 위해서 풀까? 그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개간 사업은 사업대로 이루어져야 하니 쫄쫄 굶은 그 귀족의 영지 백성들은 식량을 미끼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 나갔고, 그 숫자만 50만에 이른 것이었다.
“아아아…….”
“물론 우리로선 남의 영지 일이니까 참견하기도 힘들었고, 또 난 관심도 없지만 시간도 없었어. 마탑의 일도 병행하고, 또 우리 코도 석 자였거든. 아무튼… 그래, 내가 50만을 죽였지만 대신 내 정원과 통일 제국은 지켰다. 나는 그걸로 충분해.”
“그… 그러니까… 저…….”
“굳이 억지로 위로를 짜내려 할 필요 없다. 결국 사람에겐 언제나 선택의 순간은 생기는 법이고, 나는 공작으로서… 그리고 제국의 섭정으로서 더 높은 자리에 있기에 더 무거운 선택이 강요된 것뿐이니까. 지금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다른 수단이 없으니까…….”
묵묵하게 답하는 베오날드의 모습에서 셀리나는 그제야 그에게서 한때 이 대륙을 지배했던 자의 품격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만약 그의 상황이었다면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무거운 책임과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정원’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섬뜩한 공포감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