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자자, 너무 그렇게 놀라고 겁먹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선조… 크흠! 과거 위대한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님은 기술이나 지식에 대해서 아주 큰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검술도 그 일환이었죠. 그래서 권력을 잡으시고는 반역죄를 물어도 여지없는 황실의 비기 검술까지 기어이 얻어 내실 정도였습니다. 이건… 아시지요?”
“아, 우리 쪽에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지. 탐욕스러울 정도로… 집착하셨다고 하더군. 그리고 베노피스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렇죠? 하나 다른 학문이나 이론들은 대부분 ‘문자’로 지식을 남기는 게 가능하지만, ‘검법’ 같은 무예와 마나 호흡법은 수련을 통해서 ‘체득’해야 하며 그 안에는 ‘깨달음’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면 안 되는 과제가 있기에 더더욱 ‘체험’의 전수가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는 건 너는 그… 베오날드 선조님에게서…….”
“예. 황실 검법과 노이멀 가문의 검법이 사라지지 않도록 전수하는 임무를 맡은 자입니다. 애초에 이 흑마법사는 그저… 연기였을 뿐이죠.”
즉석에서 생각해 낸 거지만 거짓말이 아주 술술 나오는 베오날드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선조라는 걸 밝히고, 이 알테리오와 쏙 빼닮았지만 연금술사의 길을 간 기특한 후손을 껴안고 부둥부둥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렇게 둘러대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내 모습으로 그래서야 특수한 성벽을 가진 놈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겠지. 육체는 내가 더 어리니 말이야.’
아무튼 상당히 그럴싸한 베오날드의 대답에 아르젠 학부장은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몇 가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베오날드에게 물었다.
“으음, 그러면 라라 폰 노이멀 대모(大母)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나?”
“콜록! 누, 누구 말입니까?”
“라라 대모님 말일세. 선조 베오날드 님의 딸. 그러니 대모지.”
“아… 그렇죠. 그렇죠.”
귀여운 딸내미에게 대모(大母)라는 호칭이 붙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베오날드는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면서 아르젠의 말을 맞받아쳐 주었다.
그리고 간신히 진정한 그는 마치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대답했다.
“아~ 근데 그분은… 인간을 혐오하시잖습니까? 하하하. 한 번 만나 봤는데… 어휴, 장난 아니더군요. 게다가 요즘 남부에서 난리가 나고 있죠?”
“남부에 난리가 나고 있나?”
‘아… 맞아. 여기서 북부까진 멀지? 게다가 제국과도 경계를 두고 있고…….’
통신 매체가 없으니 대부분의 소식은 별도로 전서구나 전령을 보내지 않는 이상 물류를 전하는 상인이나 음유시인들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하나 그렇다곤 해도 보통은 다이나 왕국 규모라면 주변국에서 뭐 하는지 소식통 정도는 두고 있을 건데, 아마 대부분 자기 연구에 집중하는 풍토 때문에 들려줘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아~ 여기까진 소식이 안 전해졌나 보군요. 예, 그… 대모님께서 지금 가르칸 공화국을 움직여 세상을 불태울 기세로 일하고 계시던데 말이죠. 이미 수많은 저 남쪽 아래 사람들이 모조리 죽었습니다. 게다가 마왕에게 영혼도 파셨다는 이야기까지…….”
“무리도 아니지. 나도 할아버님께 들은 소리지만 대모님이… 정말 무시무시했다더군. 그나마 우리는 ‘노이멀’의 이름을 버리고 속죄하고 있는 모습이라 주제를 알아서 살려 주셨다고 했지.”
‘라라가… 여기 왔었나 보군.’
“아마 그분의 손에… 달켄 다이나 님이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후우우~ 아무튼 달켄 다이나 님이 신마법을……. 그렇다면 더더욱 선조 알테리오 님의 후손인 우리가 자네를 도와야겠군.”
베오날드가 빼돌린 ‘신마법’ 연구 자료가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된 원인은 알테리오가 승인해 준 책임이 가장 컸기에 그 후손인 아르젠 학부장은 선조의 명예와 ‘노이멀’에 대한 속죄를 위해서라도 지금 달켄 다이나의 연구를 막아야만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이 은혜,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닐세. 아무튼… 비록 멀지만 나도 먼 친척을 만나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말이지. 그러면 자네에 대한 건 내가 타일렀고, 목적은 협상했다고 다른 교수들에게 설명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다이나 가문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도록 하죠. 제가 먼저 내놓겠습니다.”
“으음… 알았네.”
평소의 베오날드라면 서로 교환하는 식으로 칼같이 경계하면서 했을 테지만, 귀여운 후손에게는 한껏 경계심을 풀어놓고 대응하고 있었다.
‘정원’ 밖에는 무자비한 남자였지만 정원 안에는 한없이 유하고, 게다가 그 지지리 말 안 듣고 배신한 아들의 후손이 연금술까지 하고 있어서 호감도가 극히 상승한 상태이다 보니 정말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같은 기세로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까 버리는 베오날드였다.
“보시면 이 위치의 지하에 딱 봐도 연구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달켄 다이나의 성격은 이미 조사했는데… 예전부터 그 양반은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똥 싸는 것까지 다 할 정도로 마법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는 스타일입니다.”
“호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아냈나?”
“저희 가문에 내려오는 기록에 있더군요. 하하… 아마 선조님이 이런 것까지 대비해 두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선조 베오날드 님은 아주 위대한 분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사실 대비 안 했어. 그 노친네가 나보다 먼저 죽을 줄 알았단 말이야. 내가 살아 있을 적에 죽어서 리치 되면 곧바로 교단이랑 손잡아서 족치려고 하긴 했는데……. 아무튼 선조에 대한 신격화라는 게 참 무서우면서도 도움이 되니 어처구니없군.’
‘아무튼 그분이라면 그렇겠지.’ 식의 막무가내 이론이라 마음에 안 드는 베오날드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르젠의 힘이 필요했고, 어차피 올려치기한 선조가 자기 자신이니 쪽팔림만 참으면 된다 생각하고는 그와 본격적으로 다이나 가문의 저택을 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 어떻게 막아야 하지?”
“어려울 거 없습니다. 그냥 준비하는 그곳에 가서 마정석들과 제가 여기 가지고 있는 마도구를 이용해서 술식의 반응을 충돌시켜서 콰아아아아앙! 하면 끝입니다. 일을 망치기엔 ‘파괴’만큼 쉬운 게 없지요.”
“그러면 내가 할 일은 자네를 달켄 다이나의 공방에 침입시키는 것이군.”
이해가 빨라서 좋은 후손의 명석한 대답에 흐뭇할 지경인 베오날드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본격적으로 달켄 다이나의 연구를 망칠 방안에 대해서 심도 깊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
다이나 가문 저택 지하.
베오날드의 청구서로 인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달켄 다이나는 지하 연구소에 신마법 구현을 위한 마법진의 준비를 하느라 밤낮 없이 술식을 새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나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를 열심히 해도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 달켄 다이나가 천재라곤 해도 연구와 마법에 특화된 자이지, 이런 대규모 마법진 설치나 술식을 새기는 일에 천재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크그그그극! 젠장! 오래 걸릴 건 알았지만 이토록 더딜 줄이야! 그그그그극! 다리온! 작업 속도를 더 올릴 수 없나?]
“그게, 솔직히 말해서 이 신마법의 술식과 공식이 너무 난해하고 힘듭니다. 규모도 방대하고, 들어가는 마력량도 만만치 않은데,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데… 시행착오나 실험 없이 한 번에 새기라고 하시니…….”
[시끄럽다, 다리온! 말할 틈이 있다면 손을 더 움직여라! 그르르르륵! 그 망할 베오날드 놈은 술술 하던데… 젠장!]
‘마도구 제작과 술식 세공으로 이름이 난 전설의 연금술사의 솜씨를 예로 들어 봐야… 에휴~ 일단 가문의 여력을 다 붙였는데도 뭐라고 하시면 사기만 낮아질 텐데…….’
현재 이곳 거대한 지하 공동에는 달켄 다이나와 다리온 다이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가면서 술식을 새기고, 마도구와 마정석을 배치하고 있었다.
‘신마법’의 구현을 위해서 수많은 연산과 술식을 넘어가고, 엄청난 양의 마력이 들어가기에 해야 할 준비가 터무니없이 많아 나름 가문의 여력을 많이 투자했지만 그래도 속도가 지지부진했기에 이 왕국의 시조이자 조상님인 달켄 다이나의 히스테리가 늘어난 것이었다.
“선조님, 속도도 중요하지만 술식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구나 똑같이 새겼다고 해서 항상 옳게 발동하는 것도 아니니 좀 더 여유 기간을 가져야…….”
[안 돼! 그놈이… 그놈이 왔단 말이다. 베오날드 그놈이! ‘리리켈’ 놈을 처리한 게 분명 그놈이야!]
“하지만 어둠학부에서는 아무리 봐도 자신들끼리의 짓이라고 하던데……. 한 달이나 조사를 한 결과가 그렇다고 하니 뭐라고 합니까?”
[그게 어처구니없는 거다! 그 멍청한 놈들! 끄르르르르륵! 한 달이라는 시간을 정치 싸움하느라 그대로 버려?]
어둠학부장 리리켈의 죽음은 이곳에도 알려지긴 했지만 결국 어둠학부 내부의 다툼과 암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보고였다.
하나 어둠학부로서는 다른 학파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보단 그래도 멋지게 다른 어둠학부 사람에게 암투에서 죽은 게 명예로운 일이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더 이상의 수색을 멈춘 것이었다.
[그놈들이 멍청한 거지! 끄르르르륵! 그 리리켈이, 엄연히 중급 마족과 대등하게 ‘융합’을 한 그 ‘리리켈’이 어둠학파에게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크아악! 어처구니없이 죽으려면 차라리 다른 요소가 있어야 해! 그르르륵! 그리고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놈은 이 ‘진리의 성’에는 없어! 그래! 그 베오날드 놈을 빼면 말이지!]
달켄 다이나의 눈에는 딱 봐도 베오날드의 짓으로 보였지만, 반대로 다리온에겐 그저 과할 정도로 베오날드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렇게 일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 직접 찾으러 가야 하는 게 아닌지에 대해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달켄에게 제안을 건네 보았다.
“으음, 정 그렇다면 차라리 작업 인력을 조금 줄여서 그… 베오날드 님을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수작을 부리려면 이 진리의 성 안에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간교하게 숨어 있는 뱀을! 그르르륵! …정직하게 일해 온 네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르르륵! …더구나 상대가 진짜 그 베오날드라면 더더욱 발견하기 쉽지 않을 거다!]
“아니, 그래도…….”
[…토 달지 말고 내 말대로 해라. 방비를 하고 싶다면 이 저택 내를 철저히 방비해라. 어차피 그 뱀 같은 놈은 우리 쪽으로 올 테니 말이다! 어설픈 방법으로 놈을 잡으려 하는 건 시간 낭비, 여력 낭비에 불과해! 그 간교한 뱀은… 예전에 우리가 상대했던 ‘라라’를 능가한다!]
“라라 폰 노이멀 님이라면… 후우~ 알겠습니다. 저택의 방비를 늘리도록 하지요. 사령학부와 어둠학부에서 지원을 더 받도록 하지요.”
라라 폰 노이멀의 이름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말하는 달켄 다이나의 모습에 다리온은 더 이상 반박을 못하고 그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켄의 말대로 이미 이곳은 ‘라라 폰 노이멀’이라고 하는 ‘노이멀 가문’ 사람에게 털려서 가주였던 달켄 다이나의 목숨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뛰어난 선조님이 직접 당한 경우를 말해 버리니 다리온으로서는 더 반박할 방법이 없었기에 군말 없이 물러난 것이다.
[이제 다 왔어… 좀 더, 조금만 더… 크그르르르극그극! 조금만 더 하면!]
본래 특기도 아니었던 사령 마법까지 배워서 추잡스럽게 생을 연장해 가며 연구한 이유도 오직 이 비원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신마법’, 세상에 거미줄처럼 짜여 있는 진리에 손을 댈 수 있는 방법. 이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 물론 시행착오 속에서 다소 희생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이루어 낼 결과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하찮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으음, 선조님의 연구가 위대한 것이라는 건 알지만… 가끔은 회의가 오는군. 후우우우~ 가뜩이나 힘든데 말이야.”
다리온 다이나는 이 다이나 왕국의 왕이었기에 ‘진리의 성’ 내의 업무와 주변국과의 외교 등등… 해야 할 실무 법안도 쌓여 있는 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숨을 푹 쉬고, 힘든 몸을 이끌고 올라오면서 쌓여 있는 서류들을 처리하며 내려갔고, 저택의 방비와 할 일들을 처리하며 내려가던 중 충격적인 소식 하나를 들었다.
“연금학부에서… 납품이 늦어진다고? 오오… 이건 안 돼!”
현재 다이나 가문에서는 오직 달켄 다이나의 연구를 완성시키기 위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그것을 위해선 아직도 많은 양의 마도구와 마정석들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정석은 외부에서 어떻게든 돈을 주고 구한다고 쳐도 마도구는 품질도 중요했기에 무조건 이곳 연금학부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납품이 밀린다고 하니 벌써부터 달켄 다이나의 히스테리가 작렬할 것을 생각한 다리온은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