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80화 (180/259)

[180화]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니 일단 앉게. 그래야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죄, 죄송합니다. 이 황금 탑의 주인이 이토록 젊을 줄 몰라서 순간 놀랐습니다.”

“그런가? 하긴 그런 이들이 많긴 했지.”

‘하, 노이멀 가문의 문양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알테리오랑 똑 닮은 모습이라니… 하하… 하하하하…….’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되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저 모습은 500년 전, 자신이 아들 알테리오에게 바라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대귀족으로서, 제국의 섭정으로서 모든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은 그가 가졌던 꿈. 가주로서 훌륭히 큰 후계자가 자신의 기술과 지혜를 모두 물려받고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거참… 다시 살아나니 이런 것도 보게 되는군.’

자신을 지독히 싫어하고 반항도 심했지만 그래도 재능과 지혜가 있어서 후계자로 싶어 했고, 언젠가 자신을 이해해 주거나 혹은 방향은 달라도 좋은 후계자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은 어긋난 아들인 그 알테리오의 모습을 한 연금술사가 사람들의 위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크게 흐트러진 것이었다.

‘이건 좀… 힘들군.’

“이보게, 왜 그러나? 정신 차리게.”

‘아버지…….’

‘생긴 건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비슷… 아니, 내 감각이 그냥 닮았다고 믿어 버리는 거야. 젠장! 하아!’

가능하면 이 회한의 감정 속에 잠시 모든 걸 맡기고 싶었지만 베오날드는 지금 이 자리가 어떤 곳인지, 자신이 뭘 하러 왔는지 다시금 깨달으며 자신을 다잡고자 했다.

그러곤 크게 심호흡을 해 호흡을 진정시킨 그는 정신을 다잡고 눈앞에 젊은 아들과 한없이 똑같이 생긴 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았다.

“윽… 내 안에 흐르는 마족의 피가……! 이제야 정신을 차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연기와 변명이었지만 흑마법사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는 성향과 또 베오날드가 충격을 먹던 모습이 너무나 리얼했기에 그냥 넘어간 아르젠 학부장은 다시금 자기소개를 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이곳 연금학부의 아르젠 학부장이다.”

“그렇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학부장님. 한데 어쩐 일로 저같이 하잘것없는 자를 이 위대한 황금향에 부르셨는지요?”

“그대가 연금학부의 영역에서 하는 일 때문이지.”

“아~ 역시 그러셨군요. 하지만 저는 연금학부에 피해를 준 일은 없지 않습니까? 딱히 질서를 어지럽힌 것도 아니고, 필요한 물건들의 할당량은 채워 드렸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연금학부의 영역인 만큼 남이 멋대로 다루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자넨 연금술사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하던 것을 멈추고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고 물러날까요?”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지금 그곳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면 거기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희망을 맛본 놈들이 다시 쓰레기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사람은 한번 희망의 맛을 보면 그것을 잊지 못하게 된다.

베오날드가 개선하고 새로이 가꾼 지금 저 영역이 그를 사라지게 하고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하면? 그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그냥 베오날드를 따라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폭동이 일어나서 진땀을 한번 빼야 할 거고, 크게 손상이라도 되면 당분간 그곳에서 생산되는 위험한 제조 과정을 거치는 약품이나 각종 재료들은 꿈도 못 꾸게 되어서 연구에 차질을 빗게 되니 말이다.

“아무튼 요점만 말하지. 무슨 생각으로 거기서 그런 짓을 한 건가? 그리고 뭘 할 생각이었나?”

“무슨 생각으로 했냐면 ‘충분히 고쳐서 쓸 만한데 버려져 있는 물건을 본 느낌’이기도 했고, 뭘 할 생각이었냐면… 으음… 이 자리에선 말하기 곤란하군요. 비밀인 지식이나 계획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이미 어둠학부에서 했던 실수를 또 할 순 없던 베오날드는 한 번 더 조심하기로 한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베오날드는 딱 눈앞에 ‘달켄 다이나’가 죽어도 손잡지 않을 인간이 있는 것도 있었기에 다른 복잡한 수 깔기를 해도 되지 않는 방안을 금방 떠올리곤 제안을 했다.

“그러니 아르젠 학부장님과 단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흐으음… 좋아, 그러도록 하지. 내 집무실로 부르지. 다른 교수님들에겐 제가 일을 다 처리하고 난 뒤에 따로 전갈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베오날드의 제안을 승낙한 아르젠 학부장의 말에 그가 다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생각한 연금학부 교수들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이 끝난 것을 좋아하며 빠져나갔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아르젠 학부장과 단둘이 탑을 내려와 학부장실로 들어갔고, 안에 있는 아주 익숙한 히드라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보곤 슬쩍 감탄한 척을 하며 그에게 물었다.

“오… 이건 노이멀 가문의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아까 그 망토에도 히드라 문양이 새겨져 있었죠. 역시 연금술의 명가인 노이멀 가문의 후예분이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스스로 자부하긴 부끄러운 처지일세. 왜냐면… 선조님의 죄가 있거든.”

“선조님? 아아~ 그 베오날드 님 말씀이십니까?”

“그 이름도 아나? 대단하군. 하지만 그쪽은 연금학부장인 나로서는 오히려 존경해야 할 분이지. 내가 말하는 선조님은 바로 그분보다 한 세대 아래일세.”

“아래라면… 아! 혹시?”

“알테리오 폰 노이멀, 아니 이젠 그냥 알테리오 님이지. 스스로 노이멀의 이름을 버린 노이멀 가문의 어리석은 후예가 내 선조일세. 그래서 나도 그냥 아르젠일 뿐이지.”

“아하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알테리오의 후손이라고 밝히자 깜짝 놀라는 베오날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함이 입에 올라오는데, 자신을 배신한 그놈이 결국 가문의 이름까지 버렸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저 이상 차이로 인해 서로 사이만 안 좋고 ‘가문’에 대해서는 지켜 줄 거라 믿었는데 말이다.

‘후우~ 그 녀석, 나뿐만 아니라 가문까지 싫었을 줄이야. 아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유전인가?’

베오날드 자신도 멀쩡한 노이멀 영지를 버려두고, 베노피스에 새로운 영지를 건설해서 살았던 걸 보면 역시 부모를 싫어하는 정신은 결국 유전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씁쓸해하면서도 결국 그놈 후손은 연금술사가 된 아이러니한 상황을 다시 떠올리니 웃음이 나오게 되는 그였는데, 다시금 아르젠에게서 충격적인 발언이 나왔다.

“알테리오 선조님께선 그분을 배신하시고 난 뒤, 점점 어지러워지는 세상의 모습과 내전으로 모든 것이 멸망해 버린 가문을 보고는 자신에겐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자격도 없을뿐더러 가문의 명예까지 더럽혔다며… 노이멀의 이름과 지위 모든 것을 버리셨네.”

“…그렇군요.”

“그래. 대충… 대대로 내려온 이야기에 의하면 알테리오 선조님은 술로 매일을 보내며 자책하다가 죽는 순간까지도 부친이신 베오날드 선조님에게 죄송하다며 후회했다고 하더군.”

결국 자신을 배신한 아들, 알테리오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게 되는 베오날드였다.

납득이 가는 이야기인 것이 그가 자신을 배신해서 죽이고 난 뒤, 노이멀 가문 내에서 정통성 시비로 일어난 내전과 마탑에서는 유산을 둔 싸움, 국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대귀족들의 주도권 싸움으로 일어난 대륙의 대전쟁, 그것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내가… 내가 다 망쳐 버렸어. 내가 다 망쳐 버렸어요, 아버지……!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엉엉어엉.’

‘…아마 그렇게 울고불고하며 자책했겠지. 이상에 취해서 나아갔지만… 자신이 만든 건 지옥도였으니 말이야.’

아들이 어떤 모습으로 슬퍼했을지 상상하며 베오날드는 그가 느꼈을 절망감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자신의 섭정 통치 아래에서 평화롭던 대륙의 모습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과 시체가 쌓이는 것을 보고 느꼈을 아들의 절망감.

물론 어느 정도 충돌이 일어날 건 예상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더 나은 세상, 자신이 가진 이상을 펼치기 위한 고통과 아픔 정도로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나온 것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혼란과 파괴의 광경이었고, 자신이 바란 이상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은 결국 이 세상에 파멸을 몰고 온 악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오롯이… 그 아이 책임만은 아니겠지. 내 탓도 있었어. 후계자로 하지 않았어야 했다든가… 후우우…….’

“그래서 나는 노이멀의 혈통이긴 하지만 노이멀이라 칭할 수 없는 처지일세. 거기에 지금 실제로 라라 폰 노이멀 님이라고 살아 계신 분도 있고, 또 대륙에 찾아보면 다른 분들도 있고 하니… 노이멀 가문 사람이라고 떠들어 봐야 죽음을 자초하는 거겠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또 왜 그러나?”

“아! 죄송합니다. 그… 하하하, 또 이거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군요.”

“하여간… 자네 이야기나 하게.”

“예. 제 본 목적은… 달켄 다이나를 막는 겁니다.”

“뭐?”

아르젠 학부장은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게 되고, 베오날드는 차분히 달켄 다이나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과 그가 꾸미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젠 학부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자신은 그저 쓰레기 영역을 멋대로 개발하고 다루던 놈에게서 목적을 듣고 우려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예상치 못한 레벨의 이야기가 나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달켄… 다이나라니, 죽은 지가 언제인데……. 아니, 잠깐만. 그래서 최근에 갑자기 우리 연금학부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언가 짐작이 되는 듯 눈을 번뜩이는 아르젠 학부장이었다.

“알다시피 우리 연금학부는 시약, 마정석 제련, 마도구 제조를 주로 하고 심지어 나는 골렘 제작 전문인데, 그 주문이 사라지고 갑자기 마정석 및 각종 소재만 가공해 달라는 의뢰가 많이 들어왔으니 말이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이상하긴 했지만 비용 지불은 확실히 했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런 일이 있을 줄은? 흐으으음…….”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기 시작하는 아르젠 학부장. 베오날드가 말한 것, 거기에 다이나 가문이 ‘신마법’을 연구한다는 것도 노이멀 가문의 선조들에게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 그렇다곤 해도 진위 여부는 확실히 가려야만 했다.

‘골렘 제작? 오오… 그거 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군.’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증거도 없이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는 일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나 증거는 없습니다. 정황적인 증거로 알아보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걸 얻으려면 더욱 상당한 시간과 또 이 ‘진리의 성’에 커다란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겠지요.”

“하나 선조 베오날드 님이 막고자 했던 일이라면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지. 노이멀의 이름이 버려졌지만 그래도 그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니…….”

말이 잘 통하는 대견한 후손을 보면서 베오날드는 감탄했다.

자신이 베오날드임을 확인하지 않고도 이렇게 믿어 주는 걸 보면 촉이 좋은 점이라든가, 이해력이 좋은 것도 자신의 후손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는 마치 손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아르젠을 보면서 말했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아르젠 학부장님. 이 베오, 학부장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음? 갑자기 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자네도 그 정도로 달켄 다이나가 싫었나?”

“그야 저도… 노이멀 가문의 사람이니 말이죠. 그리고 흑마법사도 사실 위장일 뿐 전혀 아닙니다.”

“…뭐라고?”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천천히 검을 뽑은 베오날드는 차분하게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에게만 전수하는 검법을 펼쳤다.

알테리오에게도 전했던 것이고, 또 그 녀석이 아무리 가문의 이름을 버렸다곤 할지라도 또 다른 합당한 ‘노이멀’의 후예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후세에 전했을 것이다.

“그건? 사, 살무사?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심지어 그건… 후계자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건데!”

베오날드의 생각대로 베오날드가 익힌 검술을 알아본 아르젠 학부장은 크게 당황하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일단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인증했지만 문제는 이제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검술을 어떻게 익혔느냐에 대한 증명을 해야 하는 것. 하나 이 설득만 이루어지면 귀여우면서 든든한 후손을 아군으로 들일 수 있었기에 베오날드는 의욕적으로 설득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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