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망할 달켄 다이나 영감탱이가 500년간 논 게 아니군. 아니, 그 정도는 예측했어야 했는데!’
옛날엔 그저 독불장군에 자기 연구밖에 신경 쓰지 않는 노인네였는데, 생각보다 정치적 수완이 좋은 것에 베오날드는 그것을 생각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아무튼 일단 지금 저기 어둠학부에서 사고를 쳤고, 이 다이나 왕국의 기둥 중 하나인 학부장 리리켈이 죽었으니 반드시 난리가 날 거고 범인을 찾기 위해서 ‘진리의 성’이 뒤집어질 것이다.
‘이러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일인데…….’
상황이 좋지 않으면 역시 몸을 빼는 게 제일. 사고를 쳐 버린 현 상황에선 더 이상 무언가 하기가 힘들었다.
하나 베오나드는 지금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지금 도망치면 달켄 다이나에게 시간을 너무 주게 되고, 이미 반쯤 선전포고 비슷한 것으로 엿을 먹였기에 그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고로… 가능한 한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 일단은 내 짐부터 회수해야겠군.’
베오날드는 우선 ‘미완성 아공간 보관 배낭’을 가지러 원소학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면서 이 웃기지도 않은 어둠학부의 옷을 벗고, 그는 잽싸게 원소학부에 도착해서 우선 자신의 짐을 챙기기로 했다.
다행히 마차에 놓아두었기에 셀리나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챙길 수 있었다.
‘좋아. 이다음은 그 흑염소 양반을 만나러 가야겠지.’
그다음 빨리 현 상황에 대해 알려야 하기 때문에 그는 원소학부로 올라가 다시 제미니 교수를 만났다.
안에는 식사를 하고 난 건지 빵가루가 묻은 접시와 빈 커피 잔이 있었고, 제미니 교수는 셀리나와 함께 베오날드가 ‘알의 둥지’에서 가져온 마도서를 보면서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술식은… 메히히힛. 어떻게,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아니, 완전 망했다. 요점만 설명하면 달켄 다이나는 살아 있고 리치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리리켈 어둠학부장은 그와 손잡고 있으며 내가 죽였다. 또 사령학부도 달켄 다이나의 편인 것 같고, 그 외 추가로 더 영향을 끼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난 대피하겠다.”
“메히힛?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그건 말할 수 없다. 지금 내 상황에선 셀리나 외에는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지. 아무튼 잘 숨어 있을 거니 걱정 마라. 또… 조만간 변고가 일어날 것 같으니 대비하는 거 잊지 말고. 그럼~!”
할 말만 간결하게 남기고서 베오날드는 즉시 원소학부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동안 소문과 소식이 급히 퍼진 건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서 ‘어둠학부장’과 ‘리리켈’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들려오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는 베오날드는 이미 숨을 곳을 생각해 놓은 지 오래였다.
‘나무를 숨기려면 역시 숲이지.’
고로 연금술사를 숨기려면 당연히 연금학부의 영역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짐작하거나 알아본 건 리리켈과 달켄 다이나 정도밖에 없고, 리리켈은 죽었기에 베오날드가 범인이라는 건 모를 테니 적당히 연금술사 흉내를 내고 있으면 들킬 수가 없다.
‘주의할 건 역시 날 알아볼 레벨의 흑마법사나 사령술사뿐. 좋아, 바로 가자.’
미리 이곳 진리의 성 내부 구조를 알아 두었기에 베오날드는 지체 없이 연금학부 영역으로 향했다.
중앙을 기준으로 남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역시나 그 학부답게 개성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곳으로 향했는데, 기이한 풍경에 그는 또다시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흐음, 이건 또 뭐지?”
연금학부 영역으로 들어간 그는 중앙의 큰 대로를 기준으로 또다시 2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2개의 학부로 나뉜 것처럼 한쪽은 깨끗한 도로와 골목, 작은 탑 형태의 건축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로브와 지팡이를 든 연금술사들이 길거리를 거니는가 하면 반대쪽은 지저분한 골목과 후줄근한 건축물, 거기에 군데군데 온갖 폐기물들이 가득 쌓여 있는 슬럼가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또 기이하군. 음, 하지만 숨으려면… 역시 저쪽이지.’
베오날드는 지체 없이 슬럼가 같은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자극적이면서 지독한 냄새들이 올라오고 곳곳에서 흐르는 폐수, 쌓여 있는 각종 쓰레기와 폐기물, 돌아다니는 인간들은 모두 힘없이 퀭한 눈으로 흐느적대는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숨으러 들어온 것이지만 베오날드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오래 있을 곳은 아니군. 게다가 대체 뭘 하기에 여기는 이런 꼴이지?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너무 후줄근한 동네라 멀쩡한 패션은 눈에 띄기에 베오날드는 냄새나는 걸 참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기분 나쁘지만 아래에 흐르는 더러운 물을 머리카락에 뿌려 완벽하게 위장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이곳의 실정을 파악하고자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슬쩍 보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젠장, 내가 왜 이런 일을……. 마법 실험에 실패했다고 여기에 떨어지다니… 콜록! 콜록!”
“닥치고 닫고 약재나 잘 저어! 저쪽에 실험체로 가는 것보단 낫지, 안 그래? 젠장! 독하군!”
“그럼 이거 원샷하고 뒤지든가? 콜록! 우린 무덤도 필요 없잖아. 카하하학! 시체는 곧바로 사령학부로 가서 실험 재료행이니 말이야.”
“영혼조차도 어둠학부 놈들이 회수해 간다는 이야기가 있지. 망할!”
이곳은 진리의 성의 어두운 면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지 못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이미 올 때부터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심했는데, 아무리 차별은 할지언정 이렇게 무법으로 관리하는 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지반이 받쳐 줘야 건물이 서는 법인데 말이지.’
물론 아예 차별을 해소하라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건 베오날드도 절대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 자신부터가 애초에 귀족, 성직자, 평민, 노예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의 집권층. 당연히 신분제는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밑바닥이 무너지면 권력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최소한 그 정도는 신경 쓰는 주의였다.
빈민이나 노는 인간을 없애기 위해 각종 국책 사업을 벌이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온갖 정책을 실행하며 늘어난 국익은 정해진 운영비를 제외하고 자기 주머니로 쏙 집어넣을 수 있으니 더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것으로 평생을 꾸려 온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아무리 마법사가 아닌 자들을 차별한다고 해도 일반 노동력은 무시할 수 없고, 노예보다는 먹고사는 것을 우선시할 수 있는 평민들이 그 효율이 훨씬 좋았다.
‘진리니 뭐니에 미쳐 있는 놈들이 속세적인 계산과 정치 공학을 알 리가 없지. 아무튼… 여기 의외로 쓸모 있겠군. 아니지… 오히려 내 홈그라운드이지 않은가?’
이 기회를 놓치면 ‘대연금술사’라는 이름이 울 것이다.
잘만 하면 나무를 숲에 숨기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이 숲을 지배하는 왕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팍! 하고 온 베오날드는 우선 이 영역을 관리하는 놈을 찾아 나섰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핀 결과 연금학부를 반으로 나눈 대로 중앙 지역에 학부 관리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음, 하긴 시약이나 각종 약품을 운반하려면 여기가 적합하긴 하지. 오… 이 마차의 말도 그냥 말이 아니군. 눈이 3개 달린 걸 보면 실패작인가?’
“젠장! 바쁘다, 바빠! 아니, 다리온 님 쪽에서 왜 갑자기 할당량을 늘린 거야?”
“다음 주문은… 사령학부랑 연금학부랑 그러니까…….”
“노예를 그냥 던져 주기만 하면 어쩌라는 거야?”
“빨리빨리 움직여! 어서!”
“얼른 시체나 옮겨!”
그래도 중심부인지라 이 시궁창 같은 연금학부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지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로브를 입은 관리직 마법사들이 노예나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압박을 하고 있었고, 여기저기 마차를 움직이면서 물자를 나르고 있었지만 그리 순탄하게 굴러가는 건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빨리 일 안 해? 라이트닝 볼트 한 번 더 맞고 싶어?”
“젠장! 이대로면 분명 늦는데…….”
“포션 작업 쪽은 어떻게 되는 거야?”
‘으음~ 역시 일머리가 없는 친구들이라 그런가?’
관리하는 마법사들은 효율적으로 일할 줄 전혀 모르는 듯 그저 일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해서 채근하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마법사 외에는 죄다 천시하기에 행정 사무 같은 것을 볼 전문 인력을 양성할 리가 없으며, 그런 인재가 남을 턱이 없으니 결국 파벌이나 서열이 낮은 마법사들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효율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제일 좋은 건 그저 마법과 이 행정을 모두 다룰 줄 아는 놈이 나타나는 거지만… 마나를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으니 불가능이지. 그러면 본격적으로 나서 볼까?’
도주할 때 가지고 온 어둠학부장 리리켈의 옷가지를 다시금 써먹을 기회였다.
옷을 다시 입고 그것도 더럽혀서 마치 이곳에 떨어져 헤매다 들어온 나이 어린 흑마법사를 연기하기로 한다.
“엉? 뭐냐, 너는? 못 보던 놈인데? 그 꼴은…….”
“후후후, 혼돈의 도가니에 휘말린 동지들이여, 이제 안심하며 눈물을 거두라. 내가 이 혼돈을 거두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내일의 여명이 오도록 하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에 씨앗이 싹트는 날이 도래할 때 나의 노래를 부르게…….”
“…어둠학부에서 파견된 놈인가? 너희는 저기 동쪽의 도축장으로 가. 어둠학부에서는 악마와의 계약을 위한 제물로 고기랑 피를 가장 많이 쓰니까……. 그래도 너희는 악마 소환이라도 해서 부려 먹으면 되니 편하겠네.”
‘행정이 주먹구구식인 줄 알았지만 이 정도로 낙후됐을 줄이야. 마법사 이외엔 서류로 쓸 양피지도 아깝다는 건가?’
보통은 종이나 양피지를 쓰는데 여긴 나무판으로 기록을 하고 있고, 조직엔 체계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하긴 자기 연구나 시험, 승급을 망친 마법사들이 벌이나 받으러 온 거라 생각하고 있고, 다들 자기 학부라는 파벌 위주로 움직이니 협조성도 떨어지고 그저 자기 학부에 필요한 물자나 우선적으로 차지하고 보내기 위해 움직이는 게 다였기에 베오날드를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하긴 노예는 애초에 낙인이나 술법을 걸고 들어오니 그게 아니라면 상인뿐. 그것도 아니라면 결국 같은 이 진리의 성에 사는 마법사라고 소거법으로 결론이 나 버리는군.’
애드리브였지만 정말 위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또 어둠학부 특유의 알아먹기 어렵고 과장된 말투를 잘 구현한 덕분에 베오날드는 아무 의심 없이 어둠학부에서 굴러들어 온 마법사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어둠학부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도축장으로 가서 보는데, 그곳의 상황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끔찍하군.”
앞에서도 제대로 된 업무 분담이나 분류가 없었는데 여기라고 무언가 있을까?
그냥 마구잡이로 갖고 오는 짐승 사체, 살아 있는 짐승, 혹은 다 죽어 가는 사람이나 시체를 흑마법사들과 사령술사가 서로 자신들 학부에서 원하는 것만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막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위생은 1도 신경 안 쓰고, 효율적이지도 않고… 후우우우~ 원시인 새끼들도 이거보단 낫겠다.’
“고기가 모자라면… 역시 이놈들을 죽여서 채워야 하나?”
“그러는 게 좋겠지? 낄낄.”
특히나 보통 인간들이라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경험이 누적되어서 뭔가 개선시키기라도 하는데, 여기는 그런 경험이 누적될 새도 없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경험을 쌓은 노예까지 도축해 버려서 발전이 없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런 막장일수록 베오날드의 개선이 더욱 빛나게 될 테니 그는 몸을 잠시 푼 다음 우선은 이 도축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이곳에서 일하는 저 떨거지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들부터 모으기로 했다.
‘우선은 역시 마법으로 격차를 보여 주는 게 좋겠지.’
마법사들의 서열은 결국 ‘마도구’로 정해지는 법. 베오날드는 ‘미완성 아공간 보관 배낭’에서 주문이 새겨진 스크롤을 몰래 꺼낸 다음 순식간에 찢어 버리며 하늘로 손을 들어 올려 포즈를 잡고서 마치 자신이 영창한 듯 주문을 외쳤다.
“적색의 마여, 나에게 힘을 빌려 어둠을 빛내다오! 드레드 라이트 세이버!”
붉은빛으로 된 마법의 검날이 하늘로 빛나며 지나가 아주 잠시 검은 먹구름을 걷어 냈다.
갑작스럽게 시전된 강렬한 마법과 베오날드의 외침에 이 도축장에 있는 자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으며, 누가 봐도 어둠학파 같은 모습과 과장된 포즈가 베오날드를 흑마법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피와 살, 영혼을 거두는 자들이여! 들어라. 이대로 지옥에 깃든 마족들처럼 자기 자신의 배만 불리기 위해서 나서는 꼴이라니! 스스로의 긍지를 버려 짐승으로 다가가는 것인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길에서 잠시 벗어나더라도 우린 지혜와 마나의 가호, 심연과의 계약을 통해 나아가려는 자들이니라. 내가 너희의 길을 돌아서게 할 테니 순순히 나를 따라라.”
“…뭐야, 저거? 웬 놈이래?”
“하지만 아까 쓴 마법의 위력을 보면 상당한 마법사 같은데… 물론 어둠학파겠지?”
“오오오오오! 보았는가? 드디어 심연에 갇힌 우리를 구원한 자가 왔노라!”
“우리의 세계는 드디어 변화를 부른 것이었다!”
“…아마 파벌 싸움에 밀려서 온 양반인 것 같지? 모습은 우리랑 같지만 기품이라든가 당당한 자세가 남다르니…….”
일하던 사령술사와 흑마법사들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베오날드의 정체를 추측했고, 그가 먼저 쓴 고위 마법의 모습 때문에 다들 그의 정체를 척척 짜 맞추고는 알아서 그에게 굴복했다.
베오날드는 쉽다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이곳 도축장을 장악, 본격적으로 개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