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이렇게 만약 그대로 놔두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달켄 다이나’의 마음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흐음… 솔직히 그대로 믿기엔 너무 허황된 소리지만, 말하는 사람이 베오날드 공작님이면 신뢰성이 너무 크군요. 으음…….”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그 노친네, 집착이 워낙 심해서 말이지.”
“그건 동감입니다. 진짜 지독한 노친네였죠. 아, 저도 이래 봬도 200살이 넘었습니다. 이거랑 잘못 계약한 것 때문에 말이죠.”
“이거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몸 옆에 붙어 있는 ‘리리’에게 핀잔을 주면서 투덜대는 ‘켈’이었고, 그런 그의 콧등을 툭 두드리며 항의하는 ‘리리’였다.
베오날드로서는 그가 달켄 다이나와 면식이 있다면 더욱 설득하기 쉬웠으니, ‘리리켈’의 의사를 분명하게 묻기 위해서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같이 달켄 다이나, 그 노친네의 야망을 막을 건가?”
“음, 돕는 게 정설이겠지만… 그 뒤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시다시피 달켄 영감탱이의 일은 그렇다 치고, 저희는 다이나 왕국의 체제엔 불만이 없어서 말이죠.”
“그건 나도 좋아! 좋아!”
“아니, 딱히 이 왕국의 체제를 뒤엎거나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일 하기도 바쁜 처지라서 말이지. 지옥에서 나오는 대가로 나도 일을 하는 처지거든.”
“여신이라는 마족과 계약을 하신 셈이군요. 음, 그렇다면 딱히 돕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이번 건에 한해서만 협조하도록 하지요.”
결국 달켄 다이나의 연구가 위험한 것임을 안 리리켈은 베오날드의 제안을 승낙하게 되었다.
거부하진 않아도 방관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좋은 결과였기에 베오날드는 안도하면서 그에게 연락할 방법을 묻고, 자신은 원소학부에 있을 거라 대답한 다음 곧바로 다음 장소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럼 나는… 또 다른 학부에도 이 사실을 전하러 가야 하니…….”
“그러실 거 없습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러 모으지요. 아, 원소학부의 제미니는 빼겠습니다. 그럼 여기 잠시 계십시오.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러게.”
리리켈은 그렇게 일어서더니 ‘리리’의 부분에서 작은 박쥐를 만들어 내어서 어디론가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마시라고 베오날드에게 차를 타서 별도로 준비해 주었다.
몸의 반신인 마족 부분이 손에 불을 피워서 빠르게 물을 데워서 준비하는데, 그 모습이 참 기이한 베오날드였다.
“그나저나 그 몸, 확실히 연구해 보고 싶긴 하군. 보통은 마족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마족을 완전히 굴복시켜서 지배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용케 균형을 유지하고 있군.”
“하하, 제가 좀 특이한 경우라서 말입니다. 역시 마탑의 기둥이 되려면 다른 학파의 학문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야 하는군요.”
“나는 우리 자기랑 이런 몸이 되어서 나쁘지 않은걸?”
“과거엔 내 예산을 타 먹으려는 놈들 천지였으니까……. 심사할 지혜가 없으면 눈탱이 맞거든. 그래서 마탑의 모든 학부에 관한 지식을 대강 익히느라 죽는 줄 알았지.”
“자, 드시지요. 저희 리리가 성가시긴 해도 차를 타는 솜씨 하나만큼은 좋아서 말이죠.”
“후후후~ 마족이 타 준 차는 처음일 거야~”
두 사람과 동시에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베오날드는 내온 차를 받아 들었다.
과연 마족이 탄 것이라 그런지 진하고 향긋한 향기가 올라오면서 그의 코를 간지럽혔는데, 그는 찻잔을 잡더니 마실 것처럼 들려다가 문득 그 빛깔과 자태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오오… 이 진한 붉은빛은 처음 보는 것이군. 새로운 종인가? 아니면 개량된 건가? 이런 향은 처음이야. 음~”
“그리 특별한 건 아닙니다. 한 가지 비법이 있긴 하죠. 바로 리리의 피를 아주 조금 섞은 거라고 해야 하나?”
“리리의 포상 어때? 좋아? 후후훗~”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해로운 건 없습니다. 비린내도 없고 말이죠. 그러니 식기 전에 드십시오.”
“식으면 한 잔 더 타면 그만이지. 연금술사로서, 그리고 다시 태어난 지금 내 흥미를 돋운 것이 별로 없었는데… 즐기려면 제대로 즐겨야지 않겠나? 하하.”
“…….”
베오날드는 웃으면서 차의 향을 계속 음미하며 느긋하게 즐기고자 했다.
하나 그런 그의 모습과 다르게 리리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베오날드가 마시려는 ‘차’에 무언가 수작질은 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전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드디어 찻잔에 입을 댄 것이었다.
“으음… 하아~ 정말이지, 이렇게 제대로 된 ‘차’가 얼마 만인지. 베노피스에 있을 적이 떠오르는군.”
“베노피스… 아, 노이멀 공작님의 본거지였죠?”
“원래 본거지는 당연히 ‘노이멀’이지만 내가 옮겼지. 노이멀엔 좋은 기억이 없어… 어? 갑자기 잠이…….”
차의 맛을 즐기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베오날드는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탁자에 툭!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리리켈은 불안해하던 표정을 풀고 안도하며 자신의 앞에 있는 찻잔의 액체를 버렸다.
“휴우~ 정말이지, 사람 기겁하게 만들긴……. 아니지, 그래도 확실히 확인해야지. 저래 봬도 연금술사들의 대부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야. 리리, 놈이 자는 건 확실한가?”
“응~ 확실해. 아주 쿨쿨 자고 있어. 설마~ 설마~ 마스터 연금술사가 고작 수면제에 당할 줄이야. 후후훗.”
“혹시나 뭐라도 조짐을 느낄까 봐 일부러 향이 강한 차를 골랐지. 아무튼 다른 학부의 장들이 오기 전에 얼른 구속을 해야겠어. 설마 진짜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올 줄이야. 크흐흐, 달켄 님이 정말 좋아하시겠…….”
그들이 좋아하며 베오날드에게 다가간 순간 보랏빛 섬광이 빛나고 그의 수도가 순식간에 리리켈 중 ‘켈’의 목을 꿰뚫으러 날아갔다.
분명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습이 날아오자 그는 대응할 새도 없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몸에 달라붙은 마족인 ‘리리’가 발톱을 세워서 베오날드의 기습을 막아 내었다.
“마족과 한 몸인 게, 이런 게 좋군. 쳇!”
“리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잔다며?”
“이상하네? 분명 자고 있었는데?”
“아주 잠깐 잠들었었다. 하지만 금방 깨어난 거지. 잠이 드는 약이 있으면 반대로 시간이 지나면 잠이 깨는 약도 있는 법이지. 500년 전 마탑에 있을 때도 너 같은 짓거리를 하는 흑마법사만 마탑 1층에서 꼭대기까지 2열 종대로 있었다.”
“큭!”
여유 있게 말한 베오날드는 물러나면서 검을 뽑았다.
지금도 이런 수작을 부리는데, 500년 전 마탑의 전성기엔 얼마나 수많은 수작질이 오갔을 것인가?
과거에 있던 일들을 떠올리며 베오날드는 리리켈에게 이죽거렸다.
“그래서 내가 흑마법을 공부한 거지. 마탑 일도 일이지만, 너 같은 짓거리를 하는 놈들 천지라서 말이야. 오늘처럼 어설픈 수면제는 수백 번은 마셨고, 세뇌 마법 시도, 독약 먹이기, 내 몸에 마족을 빙의시켜서 지식을 빼앗아 가려는 시도도 있었고, 서큐버스를 이용해서 유혹도 꽤 당했지. 아무튼… 너희는 5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큭, 과거의 마탑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네 몸에 달라붙은 마족 아가씨가 안 알려 주던가? 충분히 알 법한데 말이지.”
“알아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죠. 대가를 요구하거나 말입니다. 아주 악착같아요. 이것들은 뭐 하나 공짜로 주는 게 없죠.”
“그치만~ 그게 마족이자, 마족의 의무인걸?”
“아무튼 감히 내 뒤통수를 치려 했으니… 각오는 되었겠지? 이렇게 되었으니 아까 보낸 건 필시 나를 잡으러 온 놈일 테니 빠르게 끝장내도록 하지.”
“…윽!”
검에 실린 오러도 문제였지만 살기를 뿜어내는 베오날드의 기운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 리리켈이었다.
본래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은 ‘검술’에 조예가 있다고 들은 적이 없는데, 뿜어내는 예기는 상급 기사급의 그것이었다.
연금술사로서 너무 잘 알려진 터라 약물이나 마도구에 대한 대비는 했지만 설마 저렇게 그냥 강할 줄은 상상도 못한 리리켈이 이 좁은 실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생각한 순간, 베오날드는 이미 공격하고 있었다.
“자기! 정신 차려!”
“젠장!”
‘…저 마족, 겉보기완 다르군.’
채앵!
나름 오러를 집중해서 빠르게 기습을 했지만, 저 ‘리리’라는 마족은 어느새 검을 소환해서 베오날드의 검을 막아 냈다.
오러의 힘을 담아서 휘두른 검인데, 저 마족은 상반신만 저 ‘켈’이라는 남자의 몸에 붙어 있는 주제에 대등하게 막아 내면서 그가 거리를 벌릴 때까지 시간을 잘 번 것이었다.
‘이러면 불리해.’
“역시 우리 ‘리리’, 아주 좋았어!”
“이제 역전의 시간이야. 호호호홋!”
‘저 마족… 생긴 거랑 다르게 아주 만만치 않군.’
처음엔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지만 푼수 같고 가벼운 태도로 보아 서큐버스 계열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검격을 막아 내고 통찰력도 뛰어난 것으로 보아 보통 레벨의 마족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는 베오날드였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엄연히 어둠학부의 장을 맡은 흑마법사가 어중간한 마족과 계약을 했을 리 없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저놈을 노려야겠군.’
“좋아, 이제부터 제가 왜 1급 마법사인지…….”
“자기! 조심해!”
자신의 턴이 찾아온 것에 자뻑하며 폼을 잡는 ‘켈’에게 베오날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리리’ 쪽에 검을 휘둘러 그녀의 움직임을 막고자 했다.
둘이지만 결국 하나의 몸을 하고 있기에 ‘리리’를 막으면 자연스럽게 ‘켈’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 ‘켈’은 어느새 눈앞까지 날아온 것을 바라보며 일단 쳐 내기 위해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그것은 그대로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콜록! 콜록! 이, 이건 뭐야? 매, 매워!”
“이 비겁한 연금술사 같으니! 무슨 짓을 한 거야?”
“후추와 페페론치노, 마늘 엑기스, 거기에 먼지, 밀가루 등등을 배합해서 만든 최루탄이다. 너 같은 놈에게 고급스러운 약재는 필요조차 없지.”
마법사를 상대로 주문을 봉쇄하는 건 당연한 일. 시동어조차 못 외우면 1급이든 대마법사든 모두 멍텅구리나 마찬가지다.
놈이 학부장이라고 한들 대부분 이 안전한 어둠학부에서 연구만 했을 터. 싸우거나 누구와 겨루는 능력은 필시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래서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고, 전투에 특화된 훈련을 하는 ‘전투 마법사’라는 병과도 생긴 것이었다.
“콜록! 콜록! 커어억!”
“자기! 그렇게 마구 움직이면!”
그렇게 말하곤 베오날드는 호흡을 멈추고 파고들었다.
‘켈’이 기침을 하면서 괴로워하는 탓에 상대는 몸의 움직임이 흐트러져 있었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리리’ 쪽에서 휘두르는 검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주 가볍게 품 안으로 들어간 베오날드는 검으로 자신을 노리는 ‘리리’의 검을 튕겨 내고 가차 없이 다리에 오러를 집중한 다음 그대로 ‘켈’의 다리와 다리 사이를 정확하게 노리고 후려 찼다.
“콜록!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
“훌륭한 하모니군.”
“이, 이런 비겁…….”
“끄아아아아아앙!”
서걱!
‘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오날드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그의 목과 남성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격통(?)엔 마족도 못 버티는 건지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검을 놓아 버린 리리의 목까지 단숨에 베어서 그들을 죽음의 곁으로 보내 주었다.
비열한 수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괜히 시간 끌다간 이 ‘리리켈’의 제자나 부하들이 올라올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얼른 벗어나야겠군. 아, 맞아. 이대로 놔두면 분명… ‘사령학부’의 놈들이 재주를 부려서 되살릴 수 있으니…….”
품에서 이번엔 기름이 든 병을 꺼내어 ‘리리켈’의 시체 위에 붓고, 부싯돌로 불을 일으킨 베오날드는 불이 활활 타는 것을 보며 안에 갖추어진 ‘리리켈’의 로브와 겉옷을 둘러써서 흑마법사 스타일로 위장을 한 다음 불이 크게 타오르기 시작할 때 바람처럼 그 장소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며 빠르게 빠져나갔다.
“들어라! 지옥의 문이 우리 지혜의 신전 정상에 열렸노라! 뿜어져 나온 뜨거운 겁화가 만물을 불태울 것이니! 동지들이여! 심연으로 끌려갈 수 있음을 주의하라! 음… 의외로 재미있는걸?”
당연히 이곳 방식으로 과장된 말투와 동작과 함께 즉석에서 생각한 대사를 외친 베오날드는 리리켈 학부장의 호출을 듣고 올라오는 학생들을 속이고 무사히 내려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고, 일단 어둠학부 영역을 벗어나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