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70화 (170/259)

[170화]

[지금 세상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볼레아 왕국의 가혹한 공격, 다이나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법칙을 흔드는 금기의 연구, 가르칸 공화국의 증오가 담긴 살육 침략, 교국에 암약하고 있는 어둠, 마왕이 잠든 땅에서 때를 기다리는 분노의 마족들까지……. 심각한 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니 참 개막장이군요.’

사방으로 아주 난리가 난 상황. 끔찍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에서도 제국을 유지하고 있는 제라도 칼레움 황제의 수완도 보통이 아님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세계의 상황은 개판 5분 전이었다.

[분노의 마왕이 강림한 이후 서로 싸우던 대륙의 인간들이 모두 협력하게 되었고, 간신히 그를 쓰러뜨려 잠들게 했지만 결국 그의 부하들은 지금까지 암약하며 그를 다시 깨우려 하고 있습니다.]

‘아, 예. 그러면 곤란하겠죠. 그런데 그 분노의 마왕이라는 분을 어떻게 깨웁니까?’

[그는 세상에 ‘분노와 증오’가 가득 차면 자연히 깨어나는 존재입니다. 한번 강림하면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부하들을 이끌고 날뛰고, 부수고, 불태우고……. 모든 것이 사라지면 마계로 돌아가서 다음 강림할 곳을 찾지요.]

‘완전 자연재해 같은 거네요. 아무튼 그렇다면… 어우, 이런~’

여신님의 설명으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을 금방 깨닫는 베오날드였다.

일단 분열된 나라 상황도 상황이지만, 이미 사방팔방에서 온갖 난리가 나고 있었으니 분노와 증오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이번에 생긴 식량난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서로 식량을 뺏고 빼앗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만큼 ‘마왕’이 다시 눈뜨는 것엔 한 걸음 더 다가갔으리라.

‘완전 난감하네요.’

[당연히 이를 막아야 합니다.]

‘그야 당연하겠죠? 안 그러면 인류가 멸망할 테니 말이죠.’

[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인지요? 당신도 막아야지요.]

‘저야 이미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용사님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열심히 입신양명하고 드디어 자리를 잡았지요. 언제든 그분이 나타나면 도우려고 말입니다. 예, 대충 그런 이야기였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 비상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비상사태라는 말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 베오날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멈추려고 했지만, 갑자기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굳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라? 왜 이러지?’

[온전히 계시를 전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멈춰 두었습니다.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요.]

‘…저기, 사람에겐 각자 맞는 적성과 능력이라는 게 따로 있는데 말이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예상하시는 건가요?]

‘세상엔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신님. 저는 싸움이나 투쟁에 걸맞지 않습니다. 무재(武才)도 그리 있지 않고 말이죠. 얼마 전에 저 깨진 거 보셨죠? 하하하.’

[미안하지만 지금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습니다. 원래라면 더 일찍 ‘기도’를 했더라면 연락을 해서 계시를 내려 주었을 텐데 말이죠.]

‘아니, 내가 무슨… 아니… 맞구나.’

‘당신 부하입니까?’ 같은 불경한 소리를 하려고 했지만 까놓고 보면 지옥 불에서 불타던 것을 여신과 계약하고 거래를 해서 다시 생을 얻은 거니 부하가 맞는지라 베오날드는 하려던 말을 할 수 없었다.

즉, 자신에게 거부권이 없다는 말이었다.

‘…뭘 해야 합니까? 아니, 더 말할 게 없겠네요. 지금 사방에서 난리가 난 걸 막아야겠죠?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는 원인들을 배제하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오면 되는 거니까요. 보자, 그러면… 역시 가르칸 공화국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는 라라부터 막아야겠네요. 후우우~’

[아뇨.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당신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니, 그… 남쪽보다 심각한 일이 있다고요?’

상인들과 피난민의 말을 들어 보면 바니로 백작가의 영토에서는 진짜로 단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포악한 짓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식량난은 그냥 전초전이라 생각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을 신경도 안 쓰는 건 물론 반란을 진압한다고 불러온 가르칸 공화국 군대가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덤으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피해를 입히는 것도 방치해 두는데… 그것보다 심한 일이 있다니, 베오날드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거보다 심한 일이… 어지간해선 없을 텐데요?’

[그곳은 바로 다이나 왕국입니다.]

‘…그 마법 변태들이 또 무슨 짓을 한 거랍니까?’

[그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보려고 해도 마치 어두운 장막이 덮인 것처럼 너무나 어두워서……. 하지만 놔두면 큰일이 발생할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보고 알아보고 해결하라는 거군요. 하아아~ 다이나 왕국이라.’

사실 생각해 보면 그곳에 갈 사람으로는 자신만큼 적임자가 없긴 했다.

어중간한 마법사보다도 마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게 베오날드였고, 셀리나라고 하는 안내역이 되어 줄 사람이 있기까지 했다.

‘하아~ 생각해 보니 정말 저밖에 없는 것 같으니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리고 부디 조심하세요.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계약 변경을 일방적으로 하셨으니 조건에 좀 더 어드밴티지를 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죠.’

[그건 성공하면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럼… 앞으로 자주 기도 좀 하세요.]

‘아니, 잠깐…….’

“잠까아아안!”

여신님의 일방적인 작별 통보와 동시에 베오날드는 눈이 떠지면서 정신이 들었다.

엄숙한 예배 중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오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몰렸다.

베오날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고, 다시 예배로 돌아오게 된다.

“하하핫! 자네가 설마 졸 줄은 몰랐군. 하긴 요새 일이 많이 힘들어 보이긴 했어.”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백작님.”

“아니야. 바쁘고 힘든 친구를 억지로 불러낸 내 탓이지. 올해 거둔 세수의 보고를 도저히 믿지 못했으니 말이지.”

“그건 열심히 위험종 몬스터를 토벌해 주신 도련님의 공도 큽니다.”

“하하핫! 그래서 더 좋은 거야. 후계자의 입지를 굳혀 주기까지 하니 말이야.”

재정적 수입은 물론이고, 케드론에게 마갑주를 주어서 안전하게 위험종 몬스터 사냥의 주역으로 밀어주며 자연스럽게 영지민들에게 후계자임을 굳힐 수 있게 해 주며, 영향권 안에 있는 다른 영지에서 찍소리도 못하게 해 주니 베오날드가 예쁘지 않을 수 없는 백작이었다.

특히나 지금 제국 전체가 여러 사건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자신의 영지가 번영하고 튼튼해지는 것을 싫어할 가주는 없기에 그는 베오날드가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 남은 소원은 이 복덩이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완벽히 혼약으로 묶어서 가족으로 만드는 것뿐이리라.

“그러고 보니 그 금역 쪽에 있는 자네 저택은 지금 어느 정도 공사가 되었나?”

“올해 너무 바빠서 이제 막 시작할 예정입니다. 지반 공사부터 철저히 해야 하니 시간이 좀 더 걸릴 겁니다.”

사실은 지하 아래에 있는 ‘알의 둥지’를 가려야 하기 때문에 그 작업을 먼저 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지만, 아무튼 변명이 통한 건지 발데리안 백작은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건축에 대해선 모르지만, 뭐든 철저히 하는 건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흐음, 그렇군. 그러면 혼약을 좀 더 미뤄야 하나? 나는 가능하면 당기고 싶은데 말이지.”

“하하, 아직 상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요.”

“뭐? 케드론! 이 말이 사실이냐?”

“그게… 저 친구 조건이 좀 많이 까다롭습니다. 외모, 심지어 종족도 안 본다고 해서 쉬울 줄 알았는데… 특출한 재능이라고 하니까요.”

케드론은 나름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고, 베오날드의 조건을 듣자 발데리안 가주도 표정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누라감을 찾는데, 특출한 재능이라고? 부하나 인재를 찾는 게 아니고?”

“사람마다 매력을 느끼는 게 다르지 않습니까? 미모, 몸매, 키를 비롯해서 매력을 느끼는 신체 부위가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이상할 게 있습니까?”

“이상하지. 반려자를 찾는 건데……. 아, 그래서 자네 주변에 있는 그 아가씨들이 그랬던 거군.”

세인이 조금 미묘했지만 그녀도 노력을 하고, 아카데미에서 베오날드 대신 이것저것 배운 덕분에 영지의 행정 업무 일부를 맡겨도 될 만큼 성장한 지 오래였다.

하이디는 말이 필요 없는 상급 기사의 전력이었고, 셀리나는 마법사이니 애초부터 예외, 황녀… 아니, 베시아 또한 건축 설계에 있어서 없어선 안 될 전문가. 죄다 어디 한 분야에 재능이나 능력이 있는 여성들뿐이어서 베오날드의 취향이 뭔지 파악을 하게 되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뭐, 그런 셈이죠. 하하.”

“하지만 그래도 결혼이라는 건 엄연히 가정을 이루는 것인데… 너무 그런 면만 생각해선 안 될 걸세.”

‘내가 설마 귀족의 결혼을 가지고 훈수를 들을 줄이야.’

살다 보니 참 기괴한 일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걸릴 것 같았기에 대충 넘기고 베오날드는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백작님, 그보다 다이나 왕국의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놈들이 언제는 멀쩡했나?”

“하나 이번엔 다릅니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놈들은 마법에 관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저희가 마수 사냥을 시작할 쯤엔 상인을 통해서 소재랑 마석을 얻으려고 접촉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조용한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흐으음… 확실히!”

‘사실 내가 대처를 잘한 거지만, 변명을 하려면 이 수밖에 없지.’

상인의 엄포 이후, 베오날드는 다이나 왕국 쪽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경계, 그리고 자신이 운용하는 시설과 마수 소재 보관을 철저히 관리했기에 지금까지 사고가 없던 것이지만 다이나 왕국에 가기 위해 변명을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전에 조사하러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그놈들은 ‘마법사’가 아닌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네.”

“그래서 셀리나를 대동할 겁니다. 엄연히 마탑 소속의 마법사이니까요. 아무튼 다소 위험하지만, 그만큼 조사하러 갈 가치가 있을 겁니다.”

“으으음…….”

적절한 베오날드의 설득에 발데리안 백작으로서는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애당초 이 발데리안 가문만 해도 다이나 왕국에 한 번 영토를 빼앗긴 아픈 과거가 있기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했고, 미리 대비를 위해 조사해 준다는 베오날드의 제안은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게. 그럼 자네가 부재중인 동안 저 영지들의 운영은 어떻게 하나?”

“일단 케드론 도련님을 영주 대리로 임명하시고, 세인에게 그 보좌를 하게 하시면 될 겁니다. 케드론 도련님도 엄연히 아카데미에서 배우신 것이 있으니 제게 배운 세인과 함께 일하며 영지 일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겁니다. 물론 제가 맡은 일을 대신 맡는 건 엄청 힘들 겁니다.”

“뭐든 고통 없이 얻는 건 없으니 말이지. 알았네. 그리하도록 하게. 다만 절대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면 곧장 돌아오게.”

“예. 마도구와 마법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서 가겠습니다.”

발데리안 백작의 승인을 얻은 베오날드는 돌아가자마자 곧장 일행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셀리나와 함께 다이나 왕국으로 갈 준비에 들어갔다.

여신이 직접 암운(暗雲)이 짙다고 한 만큼 위험할 거라 예상한 베오날드는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야 했기에 출발하기까지 약 3주나 걸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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