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세 달 뒤.
교국, 중앙 대신전.
칼레움 제국 동쪽에 존재하는 교국 혹은 신성국이라 불리는 종교의 본산은 거대한 하나의 도시로 이루어진 도시 국가였다.
성지(聖地)를 지키기 위해서 지어지고 만들어진 이 도시는 성벽부터 순백으로 가득 차 있었고, 도시 내부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신전은 현 대륙의 주요 교단인 여신교의 중심이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고, 이 안에선 지금 수많은 신도와 신관들과 주변국의 귀빈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한 대주교를 치하하는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하륀 대주교는 들으라. 그대는 여신과 교단의 이름으로 칼레움 제국에 몰아친 기아의 폭풍을 막아 내어 무수한 인명을 구원하였노라. 신의 뜻을 배우는 것은 쉬우나 그것을 따르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며 이번 대재앙의 경우 자칫하면 거대한 혼란에 대륙의 미래가 어둠 속으로 잠길 뻔했다. 그것을 구해 낸 공은 결코 작지 않으니 하륀 대주교 그대에게 교단은 ‘성자(聖者)’의 칭호를 수여하겠노라.”
“감사합니다, 교황 성하.”
“허허허, 덕분에 교단의 위신이 크게 올랐네. 정말 아주 잘했어. 어떻게 그런 준비를 한 겐가?”
“와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륀 대주교는 자신보다 더 노년인 교황에게서 받은 성해포를 걸치고 그의 칭찬을 들으며 예를 갖추었다.
하나 하륀 대주교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는데, 자신이 이번에 한 거라곤 발데리안 영지에서 베오날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밖에 없는데 이런 큰 성은과 명성을 받는 게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구나.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이런 큰 성은이라니…….’
“홀홀홀, 손을 크게 흔들어 주게. 교단에서 희망의 빛이 탄생했으니 말이야. 홀홀홀.”
“성하,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일은…….”
“‘금역’을 해방한 대가라는 건 이미 들었네. 홀홀. 어쩔 수 없지. 굶주려서 식인귀가 되어 날뛰고 교단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보단 낫지.”
우려심에 하륀 대주교는 금역에 대한 것을 한 번 더 고백하고 묻지만, 교황은 자비 어린 얼굴로 그의 우려를 덜어 주었다.
그가 말한 대로 이번 사태는 하륀 대주교가 식량을 가져와서 풀어 조기 진압을 하지 않았더라면 큰 혼란으로 번질 수 있었고, 교단의 위신이 떨어질 뻔한 대위기였다.
그런 위기에서 구했으니 금역에 대한 이야기는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교단이 망하면 해방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러나저러나 해방될 거면 교단을 보존하는 게 합리적이니 말이다.
“어차피 그 유적은 우리 교단에서도 발굴하려고 했지만 안에 있는 온갖 함정 때문에 희생만 컸지. 그러니 당장 놈은 그곳을 어떻게 개방시키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걸세. 감시만 잘하면 될 게야. 알았나? 놈이 그 금역을 가지고 뭘 하려고 하거든 당장 알리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성하.”
“그것만큼은 절대 실패하지 말게. 이변이 생기면 바로 지원 요청을 하고 말일세.”
결국 공이 너무 크다 보니 ‘금역’을 팔아먹은 것에 대해선 큰 질타를 받지 않았고, 금역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선에서 처분이 끝나게 되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고 하륀 대주교는 다른 대주교들과 각국의 귀족과 주요 인물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고, 교황은 인자한 웃음을 띤 채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홀홀홀, 베오날드라. 거참 우연치고는 기묘하군. 하필이면 과거 교단의 적이었던 베오날드 폰 노이멀과 이름이 같다니 말이지.”
대대로 교황들에게만 전해지는 역사 속 인물과 이름이 같은 것을 기이하게 느끼는 그였다.
500년 전, 지독하게도 교단을 싫어하던 통일 제국의 권력을 쥐던 대귀족으로 그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유산을 두고 일어난 싸움으로 인한 혼란으로 세계가 분열된 것 때문에 악인으로 실컷 포장했던 게 재평가되고 교단의 위신이 깎일까 두려워서 그를 역사 속에서 지웠던 것이다.
“홀홀… 하지만 이거 신경 쓸 여유가 없군. 흐으음~”
지금은 고작 이름만 같은 놈보다 더 두려운 자가 활개를 치고 있어서 그것을 막느라 대처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라라 폰 노이멀.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딸인 하프엘프의 문제가 더 심각했기 때문이다.
식량난의 불은 어떻게든 껐지만 지금 남쪽에서 그년이 벌이고 있는 패악질은 대륙은 물론 교단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후우우~ 베오날드의 직계가 저리 난리를 치는데, 이름만 같은 놈은… 아무것도 아니지.”
지금 아래에 폭풍이 몰아치는데, 옆에서 조금 부는 칼바람은 아무것도 아닌 상황. 폭풍에 대처하는 것만 해도 바쁘다.
바니로 백작가를 장악한 노이멀 총리는 반항하는 귀족들과 인간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건 기본이고, 반항하지 않고 굽히는 백성과 귀족들에게도 폭정을 행사하고 있었다.
‘후우~ 대체 그년은 뭘 목적으로 하려는 건지.’
태도가 과하다 보니 이전엔 같은 교단의 이종족 사제들을 통해 중재를 해 보려 했지만 노이멀 총리는 피식 웃으면서 중재를 거부하고 바니로 백작가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신전을 급습해서 반항하는 신관과 성기사들을 모두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추방시켜 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날 막고 싶거든 직접 막거나 아니면 여신이라도 불러오시오.’
그러고는 대놓고 교국의 교황인 자신에게 도발하는 서신을 보낸 노이멀 총리.
교황은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모든 신전에 ‘성전(聖戰)’을 선포해서 총 집결시켜서 심판하고 싶었지만 전쟁이라는 게 그리 쉽게 해서는 안 될 것이고, 또 지금 여기서 행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북부의 악을 방치할 수도 없고… 후우~’
지금은 ‘마왕’이 잠들어서 조용히 있지만 북부에 자리를 잡은 마족들이 문제였다.
분노와 증오의 권속들. 언제 다시 마왕이 깨어나서 대륙을 멸망시킬지 모르기에 그에 따른 대비는 기본이고, 가능하다면 성전을 통해서 직접 올라가 모두 이 대륙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교단의 숙원이었기 때문에 가르칸 공화국과 함부로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교단에서 대처할 수 있는 건 소수의 성기사단과 성직자들을 파견해서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피난을 시키는 게 전부인 상황. 이러니 저기 조용한 발데리안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교황은 하륀 대주교가 잘해 주길 빌며 자신의 일을 하러 떠났다.
***
같은 시각, 바니로 백작가 집무실.
본래 바니로 백작가의 가주만이 앉을 수 있는 이 집무실은 이제 완벽히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인 노이멀 총리의 것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벽면에 있던 바니로 백작가 가주들의 초상화, 군기, 각종 장식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가르칸 공화국의 군기와 장식물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어딘가 낡아 보이는 히드라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후후후, 역시 이거지.”
“귀중한 걸 들고 오셨군요, 총리님.”
“무려 500년이나 된 거야, 후후훗. 그나저나 오늘은 몇 명이나 죽였지?”
“341명입니다. 아사(餓死)가 121명, 쇠약사 및 노역을 하다 쓰러진 게 93명, 반항해서 죽인 게 127명입니다. 수급은 저택 앞 광장에 꾸며 놓았고, 시신은 모두 버렸습니다.”
바니로 백작이 엘프 주지육림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노이멀 총리의 폭정은 여전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죽일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녀는 사망자의 숫자와 쌓이는 인간의 수급과 흐르는 피의 강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증오와 분노의 갈증을 풀기엔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싹 다 죽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그것대로 분노와 증오가 덜 모인다고 난리이니~ 정말 아쉬워.”
“어쩔 수 없지요. 그나저나 총리님, 그… 발데리안 영지로 보낸 위장팀이 잠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뭐라고? 아니, 어째서?”
“그게… 시끄럽게 하던 신관들을 모두 추방했더니 결국 교단에서 화를 내서인지 신전이 있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외부인 ‘이종족’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오죽 거세면 노예 상인들도 지금 맞아 죽을 상황이라 장사를 안 한다고 할 정도입니다. 너무 일을 잘하셨습니다.”
“아아… 그렇군.”
발데리안 영지로 사람을 보내서 감히 아버님의 이름을 칭하는 자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자신이 너무 화끈하게 일을 잘 처리하다 보니 보낸 자들이 죄다 실패해 버린 것이었다.
참 난감한 상황에 빠진 노이멀 총리는 부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증오와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한 것 때문에 사람을 보내기 힘들어질 줄이야.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어쩐다~’
교단과 종교는 결국 일반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기에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었고, 노이멀 총리는 직접 발데리안 영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포기하고 다른 루트를 통하기로 했다.
“으음… 웨닐을 불러와서 다이나 왕국에 있는 그 영감탱이 좀 연결해 줘.”
“예, 즉시 불러오겠습니다.”
부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잠시 후, 로브를 입은 노년의 엘프 마법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춘 다음 수정 구슬을 책상 위에 놓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 푸르게 빛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슬에서 쇠를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노이멀… 의 딸이여…….』
“알아볼 게 있어서 연락했어, 달켄 영감. 한창 바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서로 목적을 위해서 같은 배에 소속된 사이잖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달켄. 즉,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달켄 다이나라는 것이었다.
바로 500년 전 마탑의 대마법사로, 진리를 연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던 자였다.
베오날드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유명한 그였는데, 어떻게 같은 배를 타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일까?
『낄낄… 잘도 말하는군. 암흑신 …에게 영혼을 팔아… 나를 직접… 죽인 주제에… 말이야.』
“영감탱이는 몰래 연구하던 사령 마법의 힘으로 되살아났으면서~ 남 말하는 척하네.”
신경질적인 악담이 오가고, 원수였던 둘은 결국 죽이고 죽고, 되살아나는 과정을 거쳐서 모두 암흑신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사이가 나쁜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가능하면 연락도 안 하고 자기 일만 하고 사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연락한 노이멀 총리였다.
『닥… 쳐라… 끄르르르륵! 네년… 과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
“발데리안 영지를 조사해 줘.”
『발데리안? …아, 그… 노이멀의 개가 사는 곳… 말인가? 끄르르륵!』
“그래. 주인을 배신한 개가 있는 장소지. 아무튼 거기에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있는데… 베오날드 캘러메인이라는 자가 있어. 연금술을 할 줄 알고, 지혜가 대단하다고 하더군.”
『베오… 날드? 끄르르륵! 그 증오스러운 이름과 같은… 자라고? 심지어 연금술사? 끼르르르륵! 끄르르르르륵! 끼이기이기이기기기기긱!』
베오날드에 대한 증오가 큰지 수정 구슬이 덜덜 떨리면서 기분 나쁜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노이멀 총리는 이래서 연락하기 싫었다는 듯 표정을 구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사를 안 할 순 없으니 참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나도… 감히 아버님의 이름을 칭하는 놈이 있어서 불쾌해서 그런데. 아무튼 영감탱이, 시간 남으면 조사 좀 해 봐. 알려 주면 좋고.”
『끼끄르르르륵! 내 손으로… 내 손으로 처리해도 되나? 끄르르르륵!』
“아버님의 이름을 사칭하는 무례한 놈을 죽여 주면 오히려 내가 좋지.”
『끄르르르륵! 그래… 알았다. 크르르르륵! 당장… 준비하지. 크르르륵!』
달켄 다이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수정 구슬의 마력은 사그라들었고, 노이멀 총리는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리치가 얼마나 아버지인 베오날드를 원망하고 있는지도 알고, 또 마법 실력과 능력이 뛰어난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 대신 처리해 줄 거라 믿고 이제 이 안건에 대해선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