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왜 멋대로 남의 노예를 잡아 가지고 딸이니 뭐니 하는 겁니까? 엄연히 그녀는 제 사유 재산입니다, 폐하.”
“…뭐?”
“무엄하… 헉?”
베오날드는 침착하게 예전에 수도에서 구상해 두었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혹시라도 정체를 들키거나 하게 되면 둘러댈 방법에 대해서 이미 사전에 협의한 게 있었다.
다만 이렇게 잠시 뜸을 들인 것은 그녀의 눈빛을 보며 의사를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가고 싶다면 이대로 모른 척하고 보내 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확실하게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즉시 수도에 있을 때 새겼던 노예 문양을 발동시켜 빛나게 한다.
“노예 계약의 주문입니다. 보기 드문 적성을 가진 터라 비싼 돈 주고 새긴 것이지요.”
“…무, 무슨 짓을?”
“무슨 짓이라니요. 제 물건에 표기하는 것도 죄입니까? 그녀는 그저 닮은 사람일 뿐, 젤시 황녀가 아닙니다.”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아무리 저라도 황녀님에게 노예 주문을 새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물론 실제론 새겼지만 뻔뻔하게도 당당히 나오는 베오날드였다.
어차피 그녀는 황녀였던 자신을 스스로 버린다고 했으니 자신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역할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황제는 예상외의 공격을 받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베오날드와 베시아를 둘러보는데, 화가 나서 그녀의 입을 묶은 구속을 풀고 난 뒤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따위 놈의 망발을 인정하는 건 아니겠지? 너는 자랑스러운 칼레움 제국의 황녀 아니더냐? 저 헛소리를 어서 부정해!”
“예? 저, 저는… 저는 그저 일개 노예일 뿐입니다, 폐하.”
“……!”
소심한 듯 덜덜 떠는 연기까지 넣어 가며 베시아는 황제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어차피 지금 황제의 손에 잡혀 돌아가면 또다시 다른 귀족에게 팔려 가기 전에 그 지옥 같은 통제가 있던 시절로 돌아가게 되고, 지금의 자유로운 삶은 꿈에나 그릴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레기온 경의 무력엔 대항할 수 없기에 무력하게 잡혀 왔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그녀였다.
“끄으으으응!”
“애초에 그녀는 대회가 끝난 이후 제가 수도의 노예상에게 구매한 노예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제가 늦어 버렸기에 구매한 것이지요. 아무튼 보여 드려 봐야 폐하께 혼란만 드릴 거라 일부러 숨겨 둔 건데, 기어이 찾으시다니 놀라울 따름이군요.”
“이 뻔뻔한 놈 같으니! 내가 그런 말에 속을 줄 아느냐?”
“설령 거짓이라고 해도 어찌하실 겁니까? 노예 낙인이 새겨진 황녀? 그걸 어디에 팔아먹으실 겁니까? 지운다고 해도 흔적이 남을 텐데 말이죠.”
그렇게 말하자 은은한 보랏빛의 노예 문장이 베시아의 손에서 빛났고, 황제는 오히려 자신이 놈의 수작에 놀아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결함을 넘어서 폐기 상품이 되어 버린 젤시를 도로 데려가 봐야 그냥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이 흑역사를 지우려면 베오날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날 갖고 놀아도 유분수지!”
“갖고 놀다니요. 갑자기 혼자서 옷을 벗고 춤을 추신 건 폐하 아닙니까?”
“저……! 당장 목이 달아나고 싶은 게냐!”
아주 우아하게 황제의 추태를 표현한 말에 레기온 경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검을 뽑아 베오날드의 목에 겨누었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귀족은 그야말로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족속이며 싸워서 못 이길지언정 그 자세를 잃으면 그거야말로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기온 경, 검을 거두게. 지금 저놈이 죽으면 제국에 좋을 일이 하나도 없네. 껄껄. 그래, 간만에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좋아. 네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젤시를 여기에 두고 갈 순 없지.”
“황녀님이 아닌데 왜 자꾸 데려가려는 겁니까? 놔두고 가시죠.”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겐가? 허허. 내가 마음에 드는 이 계집을 가지고 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지?”
절대 베오날드에게 질 수 없다는 듯 황제도 이번엔 황제의 권위를 앞세운 방법으로 베오날드를 압박하고 나섰다.
폭군들의 방식을 택하는 황제. 만인지상의 자리에 위치한 제국의 황제가 가져간다는데 현실적으로 막아설 수 없는 상황. 이렇게 나오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여기가 발데리안 백작이라는 대귀족의 영역이라곤 해도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반항할 순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게 나오시는군요.”
“쓸 수 있는 카드는 써야 하는 법이지. 자, 이젠 어쩔 텐가?”
“데려가셔도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지요. 데려가십시오.”
평온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말 같았지만, 황제는 베오날드의 눈빛이 지금까지와 한 차원 달라지는 것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동굴 속에 숨어서 귀찮다는 듯 으르렁대기만 하던 맹수를 얕보다가 드디어 동굴을 나와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았을 때 같은 전율과 공포. 도저히 20대라 볼 수 없는 예기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에 황제는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대로 데려가면 무조건 이놈과 사생결단을 해야 한다는 거군.’
그렇다고 지금 그를 제거할 수도 없는 상황. 그러면 결국 후환을 남기고 황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인데, 이깟 흠집 많이 생긴 계집 하나 돌려받자고 큰 적을 하나 더 만들고 우려를 품자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여기까지군.’
사실 뒤에 한 짓은 그냥 황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성질을 좀 내 본 것으로, 지금 이 상황은 뭘 해도 베오날드가 이기는 판이나 다름없었다.
죽여도 제국에 생기는 문제가 심각하고, 이대로 젤시를 데려가면 위장에 못을 박아 둔 것처럼 밤에 잠도 못 잘 판국이니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그에게 안 좋은 감정을 만들지 않고 얌전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허허허, 장난일세. 사람이 늙으니 헛짓거리를 자꾸 하게 되는구먼. 딸아이도 아닌 노예를 왜 데려가나? 레기온 경, 우리가 착각한 게 분명한 걸세. 물러나세나.”
“폐, 폐하? 하지만…….”
“자, 돌아가세나. 우리가 오랫동안 폐를 끼쳤네.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허허허허. 발데리안 영지에 들렀다가 갈 테니 그리 알게나. 허허허허. 허허허허허~ 나올 필요 없네. 정말 없어. 허허허허헛.”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도망치듯이 레기온 경을 데리고 사라지는 황제였다.
체면도 잊은 명백한 도주였지만 지금까지 벌여 놓은 걸 장난으로 치부하고, 자신이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해야만 했다.
원래 아쉬운 놈이 수그려야 하는 게 이 세상 법칙이니 말이다.
“갔네… 요? 그 아바마마가… 물러… 났다고?”
“하여간 계산만 빠른 노인네 같으니…….”
베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황제가 나간 곳과 베오날드의 얼굴을 돌아보며 두리번거렸다.
아직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이리라.
그 지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이자 황제가 먼저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놀랄 거 없다. 저 노친네는 자기감정보단 일단 제국을 유지하는 걸 더 우선하게 만들어진 기계 같은 거라서 말이지. 평생을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에 갇힌 채로 살던 양반이라 당연한 듯 저렇게 움직이는 거다.”
“그렇… 군요.”
“아무튼 본의 아니게 이걸로 우려를 하나 덜게 되었군. 역시 수도에서 노예 문장을 새기길 잘했어. 다만 이젠 정말 후회 없는 거지?”
“애초부터 없었다니까요. 지금이 훨씬 좋아요. 아니, 이제는… 평생 베오날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베시아는 베오날드에게 고백스러운 말을 담아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이쯤 되면 베오날드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궁을 나와 자유를 얻게 되고, 베오날드와 함께하면서 삶의 보람을 얻어 진짜 인간으로 거듭났고 나날이 보람찬 하루를 살 수 있었다.
조금만 허튼 마음을 먹거나 자신을 이용해도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텐데, 그는 끝까지 자신을 한 사람으로서 봐 주었다.
“이젠 돌아가는 것도… 떠나는 것도 상상할 수 없어요.”
“그렇지. 겨우겨우 손에 넣은 행복을 빼앗기면… 지옥이지.”
“예. 돌아가면 더 이상 흙먼지와 돌과 나무와 싸워 가며 땀 흘려 일하는 보람도 없을 거고, 밤새도록 설계도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 눈이 벌게지고 피로할 때까지 일하지만 그래도 완성작이 나왔을 때의 보람도 없을 거고, 하나의 공사나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맥주와 함께 튀긴 소시지와 치킨을 산처럼 쌓아 두고 먹을 수도 없을 거라고요.”
“…어, 그래.”
뒷부분이 살짝 이상했지만 그녀가 지금 얻은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절실히 전해졌기에 아무 문제없었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자상히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다시 한번 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고자 베오날드의 품에 안기면서 고백했다.
“그러니 이제 평생… 책임져 주세요.”
“나는 언제나 내 정원에 머무는 자들에게 책임을 다할 생각이다.”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요.”
둘은 웃으면서 그대로 서로의 체온을 느꼈고, 베오날드는 아직 할 일이 많았지만 우선은 그녀가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했었으니 말이다.
쾅!
“정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님! 셀리나 님과 세인 님의 연락을 받고 이제야 도착을……!”
“와, 진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나 그 한창 좋은 시간은 결국 납치된 베시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이디를 비롯한 베오날드의 일행과 더불어 혹시나 모를 정치적 문제 때문인지 케드론도 같이 왔는데,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베오날드는 태연한 반면 베시아는 부끄러운지 호들갑을 떨면서 물러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을 좀 부탁하네만? 황제 폐하의 마차도 사라지고…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그렇고, 모르는 것투성이라 그러네.”
“후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요. 하나하나 세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이상한 오해나 의심이 쌓일 수 있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베시아의 정체라든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세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황녀라는 걸 모르던 세인은 기절, 케드론의 표정은 복잡함을 넘어서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는데… 황당함을 넘어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네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황제 폐하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젤시 황녀 전하를 빼돌렸고, 지금 들켰는데 황제 폐하를 물러나게 했다… 이 말인가?”
“뭐, 그렇게 되겠군요.”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자네는 좀 유별나긴 해도… 미치진 않은 줄 알았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타협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감정을 더 우선시하곤 합니다, 도련님. 하하하.”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내심 조금은 안도감이 드는 케드론이었다.
베오날드의 그간 행보는 너무 무서우면서도 계산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이 없는 걸로 오해하기 쉬웠지만, 오늘 같은 모습은 역으로 안심이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