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일주일 뒤, 발데리안 영지 산하 하이디의 영지.
황제와의 불편한 동거는 그 뒤로 계속 이어졌다.
일단 접대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지만, 황제는 발데리안 영지에서 사람이 와서 모시겠다는데도 고집을 부려서 이 저택에 계속 머무르면서 찰싹 달라붙어 가며 그의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집무실에 앉아서 수도에서 온 서찰로 정무까지 보니 베오날드로서는 화딱지가 날 지경이었다.
“허허, 다행히 수도의 식량 시세가 안정화되었다는군. 그리고 귀족들과 빠르게 소식을 주고받고 연계해서 상인들의 행동을 막고 위급한 지역에 보존식을 보낼 거라고… 허허허, 당분간 더 머물러도 되겠군.”
‘설마 내 계획이…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아이러니하군.’
“그나저나 그 식량들… 여기서 생산된 거라고 들었는데, 그럼 그 모든 배후가 자네였단 말인가?”
“뭐, 제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건 막고 싶었으니까 말이죠. 그리고 교단과 거래로 얻을 것도 있었습니다. 바로 서쪽에 있는 금역이죠. 그 위치가 너무나 요충지라서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곧 길을 내고 새로운 영지를 건설할 예정이죠.”
중요한 정보는 감추면서 베오날드는 까놓을 수 있는 정보에 한해서만 이야기하며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근 일주일 동안 황제는 마치 감시를 하듯 베오날드의 곁에만 머물면서 계속 그의 의중을 알아보고, 또 황녀 젤시에 대해 아는지 떠보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해 봤지만 마치 철옹성인 양 베오날드는 전혀 동요도 없었다.
‘흐으음… 이거 참 만만치 않은 놈이군. 대체 어떤 정신력을 가지고 있기에 철옹성 같을꼬…….’
‘이 정도 압력은 애들 장난이지. 어리석은 황제 같으니……. 귀족이 귀족끼리 얼마나 치열하게 서로를 헐뜯고 노리는데 말이야.’
제국과 황실의 권위가 있는 옥좌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자로서는 절대 느끼지 못할 감각일 것이다.
벨릭스 폰 노이멀이 만든 그 아수라장 같은 지옥에서 생명과 명성을 걸고 서로를 헐뜯고 생존 싸움을 하던 사람이 느끼던 그 압박감. 애송이 백작에서 하루아침에 황제의 대리자가 되어서 다른 대귀족들에게 노려지던 그 압박감들에 비하면 황제의 것은 아주 하찮은 애교였다.
“한데 남부에서 오는 상인들에게 들은 소식에 의하면 노이멀 총리가 사고를 크게 치고 있는 것 같은데… 계속 머무셔도 괜찮겠습니까?”
“허허허, 지금 농번기인데,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군사를 일으키고자 해도 지금은 따를 자가 아무도 없네. 자칫하면 모두 공멸하지.”
‘그건 맞는데… 집에 좀 가라고!’
벌써 일주일째 이러고 있으니 대접하는 문제도 문제였지만, 우선순위를 갈라놓은 일을 할 수 없어서 속이 터지는 베오날드였다.
그래서 남부의 소식을 슬쩍 던져서 수도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지만, 황제는 또 만만치 않게 타당한 이유를 대고서 그의 말을 씹어 버리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나가 볼까?’
황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승부수를 걸기로 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짧긴 했지만 그동안 전혀 흔들리는 모습이 없었기에 조급해지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남부에서 난리가 났다면 돌아가서 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
“그보다 자네, 정말 아깝구먼~ 그때 그냥 젤시랑 맺어 줬으면 지금쯤 대박이 터졌을 건데… 아쉽군, 정말 아쉬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요.”
“그렇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지. 그리고 더 후회하기 전에 지금 자네를 제거하고 싶네.”
황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순식간에 방 안의 기온이 내려가는 듯 공기가 차가워진다.
서류에 사인하며 열심히 일하던 베오날드의 손이 자연스럽게 멈추고, 한 손을 몰래 검 손잡이로 가져간 뒤 황제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극단적인 것으로 예상하던 일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동요가 없군.”
“이 정도면 엄청 동요한 겁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어? 싶은 상상 중 하나였죠.”
“그런가? 아직 희망 사항만 말한 건데 말이지.”
“희망 사항이라는 건 ‘할 수 있다’라는 걸 의미하죠, 폐하.”
“그렇지. 아무튼… 자네는 지금 내 기준에서 볼 때, 너무 뛰어나네. 그래서 제국에는 위험하지. 이 작은 도시를 만드는 데 1년이라면 앞으로 약 20… 아니, 10년이면 제국 수도보다 더 번창한 도시를 만들 수 있겠지.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그런 뛰어난 지도자 아래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할 거고…….”
결국 황제의 심기에 거스를 만큼 능력을 보였다는 이야기다.
본래 베오날드는 그래도 여기가 발데리안 백작가의 영토라는 점을 생각해서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남부의 위협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교단을 통해서 대량의 식량을 수도로 보낸 일도 있기에 여러모로 지금 자신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타이밍이었다.
“지금 죽이면 여파를 감당하기 힘드실 텐데요?”
“하지만 지금 아니면 자넬 죽일 찬스가 없을 것 같아. 껄껄껄. 앞으로 자네가 일으킬 문제나 영향을 예상해 보면 오히려 지금 죽이는 게 이익일 수 있지.”
“까딱하면 제국이 멸망할 겁니다만?”
“그건 나중에도 마찬가지일세. 조엔이 자네를 감당할 거라 생각되지 않는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싹을 자르는 게 도움이 되겠군.”
‘…젠장, 이 망할 영감쟁이 같으니!’
베오날드 입장에선 황제가 가장 확률 낮은 선택지를 골라 버린 셈이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위험 부담이 한둘이 아니라서 낮아도 너무 낮은 확률이라 그냥 배제해 버린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선택지를 골라 오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고, 즉시 저 문에서 레기온 경이 들어올 경우를 생각해서 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지금 선수를 쳐서 창밖으로 나가야 하나? 아니면 문이 움직이는 순간 움직여야 하나? 그다음 하이디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발데리안 영지로 가야 하나? 이 망할 황제는 권위가 있어서 날 죽이려는 걸 사람들에게 보인다고 한들 거짓을 말하고 찍어 누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그러니 죽이지 않을 이유가 생기면 어떻겠나? 가령 가족이 되거나 하는 거지.”
“결국 혼약 이야기로 돌아가는 겁니까? 협박 방식이 참 기묘하시군요. 게다가 이런 식으로 바닥을 깔면 설사 하더라도 충성심이 생길 리 없을 텐데요? 애초에 전 정략결혼을 해도 양자 간에 호감은 있어야 한다고 보는 파라서요.”
“보기보다 상당한 로맨티스트로군. 하긴 그래야 반푼이 귀족이자 일개 아카데미 학생 주제에 황실과 제국에 반역하여 황녀를 도둑질을 하겠지. 허허허.”
“도둑질? 아~ 젤시 황녀님을 말입니까? 제가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근거는 없네. 증거도 없지. 하지만 내 심증은 자네라고 생각하네. 왜냐면 아까 말한 것 같은 짓을 할 담력과 지혜를 모두 가진 용의자가 자네뿐이거든. 아니라고 해도 나는 자네가 맞는다고 생각하네.”
때론 이성보단 억지가 합리적일 때가 있다.
심증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힘과 권위로 찍어 누르는 것이기에 이후 다른 귀족 혹은 이 베오날드라는 놈이 차후 마찬가지인 방법으로 자신을 찍어 누르게 될 때 할 말이 없어지는 문제가 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기에 이런 무리수를 던진 것이었다.
‘적어도 이러면 놈을 나와 같은 칼날 위에 세울 수 있다.’
‘망할 노친네가… 아주 단단히 결단을 내렸군.’
“아무튼 그런 것을 가정하고 말하도록 하지. 젤시는 너에게 주겠다. 본처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실종되어서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었을지 모를 아이, 거둬 주는 것만으로도 은혜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
그러니 알아서 자수하라는 의미의 황제의 제안. 지금이라면 공훈도 되고, 일단 명목상이지만 황실의 일원도 되고, 젤시도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만약 거부하면 지금 여기서 죽이겠다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그야말로 강요.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 보이긴 했지만, 베오날드는 ‘뱀’답게 그 안에 숨겨진 함정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좋은 제안 같지만 저한텐 별로 메리트가 없습니다. 제가 중앙 정계에 진출할 것도 아니고, 또 진출한다고 해도 발데리안 가문의 사위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밥값은 합니다. 오히려 너무 화려하기만 한 장식은 메리트가 아니라 디메리트입니다.”
“…….”
“거기에 황녀님을 호위하고 시중들기 위해 황실 사람들이 자연히 이곳에 주둔해야겠지요. 아주 대놓고 첩자와 암살자를 모두 심을 수 있겠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여차할 경우 자식을 빼돌려서 허투루 삼을 수 있고 말이죠.”
“그건 어디까지나 만일의 경우지. 하나 메리트를 생각하면 감수하지 못할 건 아니지 않나?”
“예. 하지만 사람은 항상 천칭을 가지고 다니는 생물이 아닙니다.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죠. 저를 읽으시려면 그것부터 생각하셨어야지요. 만약 제가 했다면 제가 왜 그런 간덩이 큰 짓을 했는지는 생각도 안 해 보셨지요?”
이건 황제에게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벨릭스 폰 노이멀에게 하는 것일까?
황제는 하필이면 베오날드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건드린 것이었다.
정신적 외상이나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면 현대 한국 남성들은 10년, 20년이 지나도 가끔 군복무 시절의 악몽을 꾸면서 몸서리치는 일이 잦을 만큼 무서운 것이며, 그 일에 한해선 이성이나 합리가 통하지 않을 정도의 감정적인 분노를 품기도 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애초에 폐하랑 저는 손잡을 수 없단 이야기입니다. 그냥 여기서 죽더라도 말이죠. 물론 전 최대한 저항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적의를 가득 담아 황제를 노려보는 베오날드. 이 정도 레벨이면 이제 황실 모독이자 반역자라고 외쳐도 될 정도로 무례한 짓이긴 했다.
하나 황제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건지 그저 기이하게만 그를 바라볼 뿐이었고,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난감해한다.
사실 황제의 죽일 생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허세의 일환으로, 진심으로 죽일 위압감을 뿜긴 했지만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길들이기가 참 힘든 놈이군. 하지만 명마일수록 길들이는 맛이 있지.’
‘…무슨 꿍꿍이지?’
명확한 거절을 했는데도 여유로운 황제의 모습에 베오날드는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느꼈다.
설마 여기서 한 수를 더 준비했다는 건가? 황제가 둘 수를 예상해 보지만 감이 잡히지 않는 베오날드였는데, 황제는 여기까지 예상한 건지, 아니면 꺼내고 싶지 않았던 건지 찝찝한 얼굴을 하며 문밖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러면 되겠나? 레기온 경, 들어오게.”
“예, 폐하.”
“…….”
베오날드는 레기온 경과 함께 들어온 사람을 보며 순간 깜짝 놀랐지만 속으로만 놀랐을 뿐, 겉으로는 동요를 감추었다.
같이 들어온 것은 본래라면 지금 유적에서 조용히 이 망할 황제 일행이 떠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할 베시아였던 것이다.
그녀는 구속되고 입이 막힌 채로 베오날드에게 미안하다는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허허허, 많이 놀란 것 같군. 정말이지 이거야말로 여신의 인도 아니겠는가? 정말 우. 연. 히 찾아온 발데리안 영지에 설마! 사라졌던 내 딸이 있었을 줄이야. 하하하핫!”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대며 웃는 황제. 베오날드는 어떻게 그가 베시아… 아니, 젤시를 찾았는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그게 우선이 아니었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그녀를 찾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과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 또 그녀를 어떻게 지킬 것이냐였다.
“너무나 많이 변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저택 입구에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전혀 몰랐을 게야. 허허허, 하지만 그 갈피를 잡고 조사하니 금방 나오더군.”
‘애초에 이곳에 몰래 황제가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황제의 말 덕분에 아주 우연히 그들이 오는 타이밍에 젤시를 본 게 화근이었다고 이해하는 베오날드였다.
외모를 확인하고 이곳에 있다는 갈피만 잡는다면 대귀족인 발데리안 가문에 심어 둔 첩자나 각종 길드를 들러서 행방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 말이다.
베오날드가 실수한 것은 애초에 황제 일행이 그녀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자, 어디 그럼 아까 전부터 하던 말을 다시 해 볼까? 껄껄껄.”
‘재수 없는 짓도… 벨릭스 놈이랑 똑같군.’
으득.
꼴 보기 싫은 부친의 모습이 겹치면서 잘 절제하던 감정이 결국 새어 나갔는지 이가 살짝 갈리는 베오날드였다.
그는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이 위기를 넘길 방안을 생각하였고, 태연한 표정으로 황제의 말에 반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