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결국 이번 회담은 황제의 판정승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황제가 얻은 것은 없지만 일단 베오날드에게 빅엿을 먹이고,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방해였기에 확실히 판정승이었다.
그나마 베오날드에게 위로인 것은 그가 오래 있지는 못할 거라는 희망이었다.
‘일단 셀리나에게 숨어 있는 하이디 일행에게 사정을 전하고 나오라고 해야겠어. 후우~’
“호오, 아침 식사가 풍성하군.”
“메뉴는 염장으로 저장되어 있던 블랙 드레이크의 고기로 만든 스튜와 근래에 얻은 신선한 오우거의 간 구이와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입니다.”
“오우거의 간?”
현재 베오날드는 요리사 차림을 하고서 황제 앞에 차려진 메뉴를 셰프처럼 설명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대접하는 요리이니 최대한 그 격에 맞는 호화로운 것으로 해야 했는데 여기 있는 시골뜨기 요리사로는 그게 불가능했고, 발데리안 영지에서 호출하자니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셀리나에게 말을 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지.’
그래도 요리를 하는 과정 덕분에 셀리나의 호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고, 베오날드는 전생에 황제에게 대접했던 대로 직접 요리를 집도해서 나름 그럴싸한 요리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문 요리사처럼 차분히 황제의 앞에 놓여 있는 요리들에 대해서 하나둘 설명하기 시작한다.
“식욕이 왕성해서 배가 불러도 계속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오우거의 간은 푸아그라보다 훨씬 비대하고 기름지지요. 단점은 처음 얻을 때 특유의 비린내가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만 처리할 줄 알면 더 이상 오리로는 만족 못하는 극상의 맛을 자랑합니다. 위험종 몬스터라서 잡기 힘들고, 간이라는 부위 특성상 빨리 상하기 때문에 기회가 거의 없지요.”
“…근데 이거 처리법은 어떻게 알게 된 건가?”
“기록입니다. 그리고 오우거가 아니라, 랜드 드레이크와 블랙 드레이크의 간도 처리하면서 얻은 노하우가 있기에 그것으로 처리했습니다.”
“허, 그럼 어디 맛을 볼까? 오… 오오오오!”
겉 부분은 이빨로도 느껴질 정도로 바삭하게 익었지만 그 껍질을 뚫는 순간 나오는 농후한 육즙과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우고, 코까지 뚫고 밖으로 나오며 감각을 꿰뚫는다.
전율할 것 같은 풍부한 맛의 향연. 하나 그것도 결국은 사라지기 마련. 황제는 감탄하면서 미리 따라져 있던 와인을 들이켜고 나서 감상을 내뱉었다.
“이거 참 기가 막히는군. 허허, 내 생애 이런 맛은 처음이야. 한 점 더… 해도 되나?”
“처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으시면 다른 것을 드시고 난 뒤에 손을 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감각이란 반복하면서 점점 익숙해지니 말입니다.”
“조화 또한 중요하지. 허허.”
아주 숙련되게 식사를 접대한 베오날드였고, 그 뒤로 디저트까지 황제를 만족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집무를 보기 위해 집무실로 향하는데, 같이 따라온 황제도 집무실의 접대용 탁자에 앉아서 차를 즐기면서 그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허허, 그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하게나.”
‘막상 상황이 되니 환장하겠군.’
지금 영지에는 한시바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곤란한 상황이었다. 특히 베시아는 도시 건축과 저택 설계에 없어선 안 될 인재이며, 지금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비장의 카드가 너무 많아서 황제에게 드러날까 고민이라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일의 순서를 바꾸고 조정하려니 죽겠군. 끄으으으응…….’
“흐음… 호오오~ 그 많은 서류를 혼자 관리하나?”
“그래 봐야 제국 수도에 비하면 코딱지만 한 도시이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좀 더 커지면 이제 여기도 인력을 확충해야 하는데… 적절한 방법은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선적으론 발데리안 영지의 영향을 받는 귀족 가문에서 계승권이 밀리는 분들을 기용할 생각입니다. 그쪽으로선 영지 밖으로 보낼 수 있어서 좋고, 우리로선 교육을 받은 인원이 생기니 좋고 말이죠.”
“호오~”
“그래도 모자라면 언어, 역사, 수와 셈을 배우는 학교를 만들어서 영지 내의 모든 아이들을 교육시킵니다. 3년 과정으로 말이죠. 거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은 이제 상급 학교를 만들어 직접 교육시키고 일을 가르쳐서 영지의 인력으로 삼아야겠죠.”
“평민에게도 교육을 시킨단 말인가?”
“그래 봐야 그냥 나무토막인 것을 조직의 톱니바퀴로 만드는 정도죠. 부품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야 하는 법이니 말이죠. 수도만큼 인구가 풍부하고 여기저기서 인재들이 몰려온다면 저도 이런 고민 안 합니다.”
베오날드도 엄연히 정통 귀족이기 때문에 평민들에게 과한 교육을 시키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황제는 납득하면서 계속해서 베오날드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며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베오날드에게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무슨 질문이든 마치 답안지를 준비해 놨다는 듯 척척 답이 나오고, 하는 일은 효율적이며 마치 수십 년간 이런 일을 해 왔던 것 같은 관록이 느껴지자, 황제는 자신이 이런 인재의 내면을 못 알아봤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자신의 아래로 데려올 방법이 없을까 덧없는 고민을 할 뿐이었다.
***
그리고 황제가 발데리안 영지 쪽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제국에는 예고된 대로 유례없는 식량난의 돌풍이 몰아쳤다.
작년은 전쟁 때문이라고 쳐도 올해는 멀쩡히 올라올 거라 생각한 남부의 풍부한 식량이 모조리 가르칸 공화국의 손에 들어가 버리니 시세는 무지막지한 기세로 폭등, 그래도 농업 비중이 조금 있는 영지라면 아끼거나 방법을 찾아서 버틸 수가 있지만 제국 수도 같은 농업 비중이 떨어지는 곳은 곧바로 직격탄을 맞게 된다.
“대체 폐하는 이런 중요한 사태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전하! 전하! 놀라지 마십시오. 발데리안 영지의 신전 대주교 하륀 님께서 대량의 식량을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하륀 대주교께서 운송비와 신전 성기사들의 수고료만 받고 넘겨주신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절한 타이밍에 교단에서 가져온 대량의 식량이 도착한 것이었다.
하륀 대주교는 이 사태에 타격이 제일 심할 농업이 가장 빈약한 제국 수도부터 구원하기로 생각하고 받아 낸 1년분의 절반가량을 먼저 제국 수도에 투입한 것이다.
‘어떻게 거기서 식량이 이렇게… 그런가! 아버님께서 발데리안 영지 쪽으로 가셔서 손을 쓰신 거구나!’
말도 안 되는 오해였지만 황제 대리를 맡은 황태자로서는 황제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량이 왔으니 그분이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국가적 비상사태에 수도를 비울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절박한 상황에서 드디어 식량 시세 안정화를 도와줄 구원의 손길이 왔으니 지금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긴급히 들어온 보존식들 덕분에 수도의 식량 시세부터 안정화시켜 백성의 삶에 켜진 불을 가까스로 진압하여 안정시키고, 하위 귀족들이 있는 여러 영지에 제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파견하여 혼란이 일어나는 곳들의 안정화를 시작했다.
물론 제국 전역에 이 조치들이 빠르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장 규모가 큰 수도의 혼란을 막게 되니 자연스럽게 후속 조치와 각 지역의 지원은 황태자가 처리해도 될 정도로 한결 수월해졌다.
본래라면 제국을 뒤엎을 사건이 초기 진화가 되어 버리고, 사람들이 대처할 틈이 생기자 그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제국의 이런 조치가 노이멀 총리의 귀에 들어간 것은 수도에 식량이 전해지고 3일 뒤였다.
“이게 무슨……!”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온 서찰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내용을 확인했다.
제국 수도에 발데리안 영지에서 교단이 대량의 식량을 지원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당초 목표로 하던 것보다 혼란의 규모가 작아지고, 제국 수도의 식량 시세는 안정화되었다는 이야기. 결론은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누군가 내 계획을 간파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올해 눈치챘을 땐 이미 생산할 수 있는 식량이 없었을 텐데? 지금 대처를 하려면 적어도 작년에 전쟁이 끝난 타이밍에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대체 누가?”
노이멀 총리는 자신의 계획을 간파하고 엿 먹인 존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황제부터 시작해서 제국, 아니 대륙 내에서 현명하다고 손꼽히는 자들을 하나둘 체크 리스트에서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제, 물론 그라면 눈치챌 수 있어. 하지만 농업이 없는 제국 수도로는 대처가 힘들어. 대귀족이나 하위 귀족, 상인에게 이야기해서 대응한다고 한들 소식이 가는 시간이랑 일단 발데리안 영지 쪽에서 식량이라는 건… 발데리안 백작가와 관련된 인물인가? 아니, 아버님의 은혜를 잊은 그 들개 놈들에게 이런 지혜가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선 이런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인물이 없고, 그리고 발데리안 백작가에 그런 인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지, 들개라곤 해도 엄연히 우리 노이멀 가문의 피를 이은 가문이잖아?’
‘그래서… 이젠 사돈어른이라고 불러 줄까?’
‘남사스러워서 못 버팁니다. 안 그러면 저도 그렇게 부릅니다?’
‘…그래. 사돈 맺었어도 우린 그냥 예전대로 부르자.’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집권 시기, 가장 가까우면서 충성스러운 가문인 발데리안 가문에 딸아이를 시집보냈었고, 당연하게도 가주인 케르웰 발데리안은 베오날드의 딸과 결혼한 자식 사이에서 나온 아들에게 가주의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고로 비록 옅긴 했지만 발데리안 가문에도 엄연히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찾았다! 케드론 발데리안! 범인은 너였어!”
발데리안 가문에 대한 수많은 조사 보고서 뭉치들을 둘러보던 중 그녀는 현 후계자인 케드론 발데리안에 대해서 찾아냈다.
케드론 발데리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지로 돌아왔으며 보고서에 의하면 좀 야만인 같은 가풍에 휩쓸리지 않고 귀족적 품위를 지키며 침착하고 지혜롭다고 써져 있었다.
“발데리안 가문의 후계자. 이 정도면 발언력도 충분하고 일을 진행시킬 수 있어. 게다가 역시 무(武)가로서는 명문가고……. 교차 검증해 보니 발데리안 영지에서 가져온 식량은 대부분 고기로 된 보존식. 서쪽 숲에서 사냥… 그렇군. 미리 내 계획을 간파하고서 바로 식량난의 대비를 시작한 건가?”
순식간에 상대의 내막에 대한 윤곽을 잡아 가는 노이멀 총리였고, 케드론 발데리안의 자료를 확인하던 중 믿지 못할 이름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로 현재 가신으로 있다고 하는 ‘베오날드 캘러메인’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눈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가신으로 어째서 이 이름이……? 동명이인? 하지만… 타이밍이 게다가…….”
<…해당 베오날드 캘러메인이라는 자는 연금술 및 마도구 제작이 가능하며 행정 사무 및 도시 건설 임무도 뛰어난 것으로 보임. 또한 휘하엔 상급 기사급 기사를 거느리고 있어 발데리안 가문에서도 현재 혼약을 위한 준비를 하는 중…….>
“연금술… 마도구 제작…….”
성은 다르지만 이름도 같은 데다 연금술과 마도구 제작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오날드 폰 노이멀. 그녀가 가장 사랑하며, 존경하며 자랑스러워했던 사람.
그런데 그와 같은 이름을 쓰는 자가 연금술에 마도구 제작까지 한다니. 대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녀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계속 보고서를 읽어 보았지만 그 이상 뭔가 획기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건 도무지 신경 쓰여 못 견디겠군.”
서류에 나와 있는 내용만 보면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요소가 한둘이 아닌 인물이다.
그런 만큼 더욱 확실하게 확인할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단순히 이름만 같고, 정말 우연히 연금술과 마도구 제작의 재능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혹시라도 노이멀 가문과 관련된 자라든가, 혹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유산을 노획하거나 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