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다음 날, 하이디의 저택.
베오날드는 아침 일찍부터 다시 검을 잡고 땀을 흘리며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제 일개 침입자에게 당한 것이 너무나 쪽팔린 나머지 그놈에게 당했다곤 못하고 그저 도망쳤다고 말하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단련장으로 온 것이었다.
“후우… 후우… 흡!”
“어라? 오늘은 베오날드 님이 먼저 오셨습니까? 별일이시네요.”
“아, 하이디인가? 요새 너무 검을 안 휘둘렀더니 나태해진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후우우~ 대련 한번 할 테냐?”
“예, 기꺼이 하겠습니다!”
베오날드의 제안에 밝은 표정으로 즉시 대련용 창을 들고 오는 하이디였다.
그리고 둘은 곧바로 날을 세우지 않은 대련용 무기를 쥔 채 서로에 대해 예를 갖춘 다음 대련에 들어갔다.
오러를 끌어 올리긴 하지만 둘 다 살상 의지는 절대 없는 순수한 대련. 기술과 힘, 속도를 겨루면서 무기를 서로 맞대는데, 베오날드는 금세 하이디의 수준을 눈치챘다.
“흠!”
‘이제는… 노골적으로 봐주는 게 보일 정도로 격차가 커져 가는 느낌이군!’
콰앙!
페인트를 섞어 가며 나름 기교를 부려 보는 베오날드였지만, 하이디의 눈빛은 이미 자신의 노림수를 간파한 듯 돌파해 가며 창을 휘둘러서 먼저 우위를 잡고 베오날드를 찍어 눌렀다.
재능의 차이도 있지만 온갖 몬스터를 사냥하며 격전을 벌인 그녀와 노력으로 달려온 베오날드는 이제 좁히기 힘든 수준까지 차이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 게다가 하이디가 더 강하다면 오히려 전력으로 단련할 상대가 생겨서 좋았기에 베오날드는 상관없었다.
‘…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군. 나보다 뛰어나서 걱정 없으면서 단련의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최적의 환경이니 말이야. 앞으로 계속 그녀와 단련 시간을 갖는 것도…….’
“베오날드 님! 베오날드 님! 큰일 났습니다. 긴급 사태입니다!”
좋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가 달려오면서 급보를 알렸다.
베오날드는 아쉽지만 대련을 멈추고 급한 용무를 듣기 위해 그에게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숨을 몰아쉴 정도로 급하게 달려올 일이 대체 무엇인지 짚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한창 좋았는데, 무슨 일이지? 지금 급한 일이 일어날 게 있나?”
“그, 그게… 손님이…….”
“손님을 맞는 건 아침 식사 이후라고 하지 않았나? 아직 시간이 이를 텐데?”
“다, 다른 손님도 아니고… 그, 그게…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그의 말에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 베오날드였다.
황제가 여기에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분명 지금쯤이면 수도에서 일어난 식량난에 대처하기 위해서 바쁠 인간이 왜 여기까지 온 건가?
심지어 그 황제의 성향은 극한의 합리주의이자 이성주의다.
그러니 이곳에 온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여서 베오날드는 버럭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제정신인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여길 왔다고? 가짜가 아닌가?”
“저, 저도 믿지 못했습니다만, 그… 황실의 인장은 물론 서신까지 맞는 데다, 황실 기사단장인 레기온 경까지 동행하고 있어서…….”
‘젠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제라도 칼레움 그자라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번엔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베오날드라고 해도 상식선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 예상이 가능하지, 이런 변수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이디! 지금 즉시 베시아와 세인을 데리고 서쪽 숲속 유적으로 가서 대피해라. 사냥 가는 척하면서 베시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자루든 어디든 숨기는 걸 잊지 마라. 안에 들어가기만 해도 충분하다. 내가 직접 갈 때까지 누구도 믿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좋아. 후우~ 너는 가서 또 밤새우고 자고 있을 셀리나를 깨우고 발데리안 저택에 이 사실을 알려라. 내가 응대하고 있겠다.”
“예! 베오날드 님.”
하지만 아무리 예상 밖의 일을 맞이해도 대처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당황하더라도 대책을 못 내놓을 정도로 베오날드의 귀족 생활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해야 할 조치를 취하고, 빠르게 씻고 난 뒤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서 저택 내에 마련해 둔 귀빈실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고서 앉아 있는 황제에게 예부터 갖추었다.
“알현하는 것이 늦어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고개를 들라. 오히려 내가 미안한 입장이지. 연락도 없이 이렇게 암행으로 찾아왔으니 말이야.”
“제국은 황제 폐하의 것인데, 자신의 집을 둘러보는 게 어찌 잘못이겠습니까? 오히려 이 초라한 곳에 오셔서 서광을 비춰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며 이 작은 저택의 영광이 될 겁니다.”
“허허허허! 그것참 고마운 소리군.”
한 치의 막힘없이 아부를 퍼붓는 베오날드. 무례하게 찾아왔음에도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포장하는 이 혀 놀림은 그야말로 뱀의 간사한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황제도 만만치 않은 게 겉으론 미소 지으면서 그 아부를 받아쳐 주면서도 속으로는 더욱더 차갑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베오날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은… 재미있는 소문이 제국 수도에까지 퍼져서 말일세.”
“어떤 소문인지요?”
“영지 경영 실력.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내용이더군. 약 1년도 되지 않아서 시골 마을을 도시로 만들었다느니, 재정이 풍부해졌다느니, 가르칸 공화국의 공작을 알아차리고 미리 식량난을 예상해서 대비했다느니 하는 내용들 말이야.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왔지.”
‘즉… 내가 너무 유능해서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는 거군. 하긴 이런 일, 아무나 못하는 법이니 말이지. 아~ 너무 잘하는 것도 문제였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자신이 잘해서 황제의 경계심을 끌어 올려 생긴 변수라는 것에 베오날드는 일이 꼬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잘하는 것을 일부러 못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 여기까지의 과정은 일분일초가 너무나 아까웠기에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하나 기쁨도 잠시, 베오날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황제를 대했다.
“이거 영광스러운 일이 하나 더 늘었군요. 부족한 재주를 이렇게 칭찬해 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훗, 겸손이 지나치군. 아무튼 자네의 진면목을 이제야 안 게 너무 아쉽다네. 이 정도로 뛰어난 보물일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젤시와 맺어 버릴 걸 그랬는데 말이야.”
‘흐음, 의도적으로 젤시를 언급한다라? 그렇다면… 베시아에 대해서 감을 잡은 건가?’
“그럼 예의 차리는 말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 수도로 올 생각 없나? 그 능력을 이 작은 도시에 발휘하는 것보단 제국 전체를 위해 사용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
헤드헌팅 제안에 베오날드는 일단 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잠시 고민했다.
표면적으론 이 정도의 실력이 있는 걸 봤으니 인정하고 더 큰물에서 놀게 도와줄 테니 오라는 제안이었지만 그 안에 어떤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더불어 자신의 유적까지 찾은 마당에 이 발데리안 영지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정중히 거절하기로 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그 어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제 가치를 알아봐 주신 발데리안 백작님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고, 또 작은 도시이지만 제 손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 좋으며, 또 아직 어린 제가 갑자기 높은 지위에 갈 관록이 안 된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니 좀 더 시간이 지난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으으음…….”
너무나 타당하며 합리적인 반대 의견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곤 하지만 20살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그 말을 쉽게 따를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적어도 가문의 힘이나 개인 세력이 좋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황제의 후원 정도가 한계라면 그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이유도 충분히 합리적이었기에 황제는 납득하는 척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냥 물러날 순 없었다.
“그런가? 혹여나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지금은 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폐하.”
은연중 베오날드에게 압박을 넣는 황제였지만, 베오날드는 그런 짓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외양이 어려서 그렇지, 실제 연륜으로 본다면 눈앞에 있는 황제보다 더 많이 쌓인 베오날드였으니 말이다.
일말의 동요도 없으니 오히려 조급한 것은 황제였지만, 그 또한 얌전히 당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음 전략을 행하기로 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할 순 없으니. 허허, 정말 아깝군, 아까워.”
“저도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그러니 내가 머물며 직접 배우는 수밖에 없겠지.”
‘…무슨 미친 소리야?’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가 수도에 멀쩡히 있는 자기 황궁과 직할령을 놔두고 남의 영지에 머문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중 톱이었기에 천하의 베오날드라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말도 안 되는 수에 그가 동요를 보이자 황제는 드디어 활로를 찾았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이 정도 패를 던져야 놈을 흔들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물론 황제 또한 자신이 한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베오날드라는 인물에겐 합리적인 카드는 너무나 뻔한 것이라서 역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자각했고, 그를 흔들려면 스스로가 생각해서 비합리적인 의견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기탄없이 던진 것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극한의 합리적인 인물은 비합리적인 수도 합리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것이다.
“제국을 위해서 끝없이 수행하고자 하시는 폐하의 고견에는 정말 놀랐습니다. 하나 이곳은 폐하를 모시기엔 너무나 부적합한 곳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그러니 우선은 황도로 돌아가시면 제가 거처와 예법을 아는 이들을 준비할 터이니, 그때 다시 찾아오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생각은 고맙네만 그럴 필요 없네. 날 모실 자들은 이미 황실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네. 그 외에 필요한 건 오늘 수도에 전갈을 보내서 가지고 오라고 할 걸세. 그저 자네는 이 저택에 있는 방만 몇 개 제공해 주면 되네.”
‘진짜 머물 생각인가? 이 노친네? 지금 시국이 어떤데 여기서 머물겠다는 거야? 집에 가라고!’
대륙 전체에 식량난이 파격적으로 닥쳐올 걸 모르는 인간이 아닐 텐데 이러는 꼴을 보니 베오날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하륀 대신관을 통해서 초기 충격을 완화할 식량을 보내긴 했지만, 그걸 이 작자가 알 리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젠장, 이러면 거절할 명분이 없다. 할 일도 많은데 이 망할 노친네 개인 교습이나 해야 할 판국이라니! 그래도 오래 머물진 않겠지?’
‘사실 머물 처지는 아니지만, 놈이 흔들리면 이건 하는 수밖에 없지.’
결국 베오날드는 황제를 모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도 오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하기에 수도로 떠날 때까지만 잘 버티자 생각하며 그는 황제를 직접 모시고 저택 내에서 가장 좋은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물론 아무리 좋아도 황궁이나 대귀족의 저택에는 비교가 안 되기에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발데리안 영지로 보내 버릴 계획이었지만…….
“허허, 괜찮네. 내가 억지 부린 거니 이곳에 머물도록 하겠네.”
황제 또한 베오날드가 자신을 꺼리는 것을 눈치챘기에 이 저택의 방에 머물기로 해 버렸고, 그렇게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