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 망할 영감탱이가……! 기어이 나 죽고 그걸 가져갔네!’
‘신마법의 구현과 방법론’은 마탑의 대마법사 달켄 다이나가 작성한 것이다.
이 ‘신마법’이라는 새로운 마법 체계의 개념을 증명하고 완성하기 위해 오만 가지 실험을 다 하고, 실패 횟수도 많아 연구비는 고래처럼 빨아들이면서 성과는 전혀 나지 않았는데, 달켄 다이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구를 해 댔던 것이었다.
그렇게 쌓인 부채만 백금화 100만 개. 도저히 참지 못해서 연구 중지와 자료 폐기라는 조건으로 부채를 까 줬더니 기어이 자신이 죽고 나서 다시 가져간 것이었다.
‘진짜 진저리 나는 영감탱이라니까. 나보다 오래 산 건 그렇다 치는데, 죽고 나서도 그걸 가져가다니! 그놈의 신마법이 뭐기에! 젠장!’
“베오날드 님,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아니, 딱히 문제는 없다. 그저 순서가 헷갈려서 다시 떠올렸을 뿐이다.”
베오날드는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가져온 도서들도 대여 기록을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알의 둥지’를 천천히 나와 다시 걸어 잠그고, 문을 닫는 작업을 했다.
“일단 필요한 물건만 챙겨 왔으니, 여기 위에 제대로 된 저희 저택과 영지 구성을 끝내면 그때 개방하지요. 괜찮겠지요? 도련님?”
“으음, 나도 그게 좋을 거라 생각하네.”
“나가면 또 할 일이 많겠군요.”
웃으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든 베오날드는 나가서 할 일들을 생각하는 동시에 ‘신마법 구현과 방법론’을 훔쳐 간 달켄 다이나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책의 대여를 승인한 것이 자신의 아들인 알테리오였기 때문에 그 책을 이곳에서 가지고 간 뒤로 이미 500년이나 지났을 것이다.
‘음, 게다가 셀리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죽고 난 이후, 내 유산을 두고 마탑에서 혼란스러운 내전이 벌어졌다고 하고, 그 뒤에 다이나 가문이 승리해서 다이나 왕국을 건국한 게 역사의 전개인데……. 그러면 그 노친네는… 결국 자기 물건만 되찾고 마탑의 내전에 시간을 보내다가 죽은 거려나? 으으음…….’
“오오오, 세상에나, 현 마탑에서도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서적이라니……! 역시 고대 유적은 대단해. 아아아~ 이로써 영원한 4급 신세를 벗어나서! 5급, 6급으로 진급을…….”
“셀리나?”
“예? 왜, 왜 그러세요?”
“물어볼 게 있다. 혹시… 달켄 다이나라는 대마법사를 아나?”
“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마법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중에 대마법사 달켄 다이나를 모른다? 그건 마나 운용을 모르면서 마법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다이나 왕국의 건국 시조이며 마탑 내전의 최종 승리자로서 유실된 마도의 유산을 다시 끌어모아서 새로운 마탑을 만드신 분이죠.”
“호오…….”
자신은 기록 말살로 잊혔는데, 마탑에서 꼼짝도 못하던 노친네의 이름은 지금 위대한 인물로서 내려오니 상당히 기분이 불쾌한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자연스럽게 달켄 다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에 적절히 추임새만 넣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그 뒤로 300년 전쯤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탑의 수장이자 다이나 왕국의 왕으로서 군림하시다가 결국 돌아가셨으나 이후 마탑과 다이나 왕국의 규모, 마법사들의 권한 등등… 대륙에 끼친 영향은 매우 거대하다고 할 수 있죠.”
“그렇군. 근데… 300년 전에 죽었다고? 어떻게? 인간… 이시지 않나?”
“예. 인간이라고 전해지긴 하는데… 대마법사이시니, 뭔가 차원이 다르겠죠.”
‘…망할 영감쟁이, 대체 얼마나 산 거야? 내가 마탑에 들어간 시절부터 계속 노인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이긴 한 건가?’
지겹게 오래 산 노인네. 그놈의 ‘진리’가 뭔지 계속 살아야 한다면서 온갖 발악을 다 하던 것이 기억났다.
참고로 그 오래 살게 하는 연구 분야는 인체와 관련되었기에 대연금술사로서 한 다리 걸치고 있던 베오날드도 지겹게 시달렸던 기억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자꾸 이상한 시약을 만들어 달라고 난리였지. 물론 나도 받은 게 있어서 거절은 못했지만…….’
달켄 다이나는 그 마법에 집착하는 성격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헛된 건 아닌 게 마법 실력은 최고였다.
특히나 마도구를 만들고자 하는 베오날드에겐 마법 술식을 개선하거나 개발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는데, 달켄 다이나는 베오날드가 요구하는 술식을 그냥 척척 만들어 내고 개선해 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진짜 더럽게 오래 살았네, 망할 노친네. 아니지, 잠깐만…….’
‘나는… 나는 ‘진리’에 반드시 도달할 거야. 콜록! 콜록!’
‘…뭔가 찜찜한데 말이지. 흐음… 다이나 왕국이라.’
끈질길 정도로 삶에 집착하던 달켄 다이나의 모습을 떠올린 베오날드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다이나 왕국이 있는 북쪽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기에 다이나 왕국 쪽에 손을 대거나 뭘 할 수 없었던 그는 나중에 여유가 되면 사람을 보내서라도 소식이라도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
며칠 뒤, 하이디의 영지.
이제 늦은 가을. 겨울맞이 준비와 여러 공사로 한창 바쁜 영지에 낯선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수수한 상회 마크를 달고 있는 이 마차는 낯선 것이었지만, 제국 수도에서 받은 허가증과 상인 협회증을 문을 지키는 기사에게 내밀고서 인증을 받은 다음 영지로 들어왔고, 마차 안에 있던 허름한 로브를 걸친 노인은 영지의 풍경을 바라보며 슬쩍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허허, 이거 참… 예상 이상으로 번영하고 있군.”
“마을에서 사람들의 말을 들었는데, 이 마을… 아니, 도시가 만들어진 지 1년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폐… 아니, 어르신.”
순간 폐하라고 할 뻔했다가 얼른 어르신이라고 말을 바꾼 중년 기사. 그는 황실을 지키는 수호자인 레기온 경으로 위장한 기사단을 데리고 칼레움 제국의 황제 제라도 칼레움을 호위해서 몰래 이곳에 온 것이었다.
“허허허, 그나저나… 참 대단한 도시야. 작지만 아주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오랫동안 제국을 다스려 도시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황제는 깔끔하게 만들어진 도시 구조를 보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잘 정돈된 도로와 저택들, 안전을 위한 배수로, 하수도, 골목길의 간격도 화재를 대비해서 넓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도시라고 생각하며 놀라워했다.
“이게 그놈의 실력인가? 허허허.”
“어르신, 저기를 보십시오.”
“오, 저건?”
레기온 경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거대한 몬스터를 실은 수레가 한 대 지나가고 있었다.
신장이 약 5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그 거대한 몬스터는 바로 오우거로 무지막지한 괴력과 튼튼한 가죽으로 소문이 났고, 인육을 좋아하기에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위험종 몬스터 중 하나였다.
“…오우거인가? 허허, 황궁 박물관에 박제된 것 말고는 처음 보는구먼.”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닙니다, 어르신. 잡으려면 상당한 희생을 각오해야 할 텐데……. 굶주리는 게 무섭다곤 해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가뜩이나 전쟁 이후 병사들의 희생이 컸을 텐데 말입니다.”
“흐음… 확실히.”
수레에 실려 가는 오우거는 총 3마리. 한 마리를 노리는 것도 여러 기사들과 병사들의 희생이 필요한데, 3마리면 아무리 적어도 100명 단위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을 거라 예상하는 레기온 경이었다.
“하나 자세한 내막부터 알아봄세. 우리가 생각하는 걸 분명 그 베오날드라는 놈도 생각할 테니 말이야.”
둘은 본격적으로 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선 알아내고자 한 것은 오늘 본 오우거 3마리에 대한 최신 정보를 포함해서 몬스터 사냥에 얼마만큼의 전력이 투입되었느냐였다.
마을에서 고기를 파는 상인에게 돈을 주면서 은근슬쩍 묻자, 술술 대답이 나왔다.
“아, 저 오우거들은 아마 영주이신 하이디 경과 케드론 도련님이 잡으셨을 겁니다.”
“한데, 저런 위험한 몬스터들과 싸우면 희생이 크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으음, 저희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도련님과 하이디 경의 무예가 뛰어나서 그런지 희생이 거의 나오지 않더라고요. 죽어도, 뭐랄까… 다른 이유이거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다치는 정도?”
“허…….”
상인의 말을 들은 레기온 경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위험종 몬스터를 잡는 데 희생자가 없다는 말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쉽게 잡을 수 있다면 진작 다 잡아서 마정석, 피, 소재를 회수해서 인류는 더 크게 번영했을 텐데, 그의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 영지에 무언가 몬스터 사냥의 노하우가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상입니다, 어르신. 아무래도 몬스터 사냥을 유리하게 하는 특별한 노하우나 기술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것을 알아내려면… 저 저택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레기온 경이 가리킨 곳에 있는 저택. 이 도시의 중심이자 하이디의 저택으로 잡은 몬스터들을 해체하는 작업장을 겸하고 있었다.
위험종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부산물의 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튼 베오날드의 비밀을 알아내야 하는 황제는 레기온 경의 말에 동의하며 곧바로 마차를 지키는 황실 기사단 인원을 모두 데리고 온 다음 직접 안에 들어가 보기로 하는데, 입구를 지키는 병사가 그들을 제지했다.
“멈추십시오.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 우리는 수도에서 온 상인들입니다. 여기서 물건 거래를 하고 싶어서 왔는데… 혹시 들어가도 될는지요?”
“상인? 음… 맞군요. 한데, 물건 거래라곤 해도 베오날드 님은 이미 선약이 많으셔서 지금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만 해도 상단의 상인들이 10명, 귀족 다섯 분, 각종 길드와 조합에서 오신 분들까지, 대기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허어허… 그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못해도 2주는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으으음… 그러면 잠시 저희 어르신과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물러난 레기온 경은 마차를 우선 저택 입구 옆에 세워 두고 황제와 어떻게 할지를 상의했다.
이대로 그냥 물러나서 수도로 돌아갈지, 아니면 황제라는 신분을 밝히고 돌입해서 면담을 할지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레기온 경의 이야기를 듣고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으음…….”
“일단 수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나중에 사람을 보내시는 건? 아니면 황실 기사 중 몇 명을 남겨서 이야기를 해 보고 전하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아니면 수도로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으으으음… 잠시 시간을 주게.”
황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관광을 온 것도 아니고, 식량난 문제를 놔두고서 큰맘 먹고 수도에서 나와서 직접 이곳까지 행차했는데, 이대로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베오날드 그놈의 주도하에 지금 이 도시에서 혁신적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에서 그냥 돌아가서 놈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된다고 그의 이성이 경고 중이기도 했다.
“으으으음… 어렵군.”
신분을 밝히고 들어가서 면담을 한다고 한들 괜히 놈의 명성만 키워 주고, 자신은 실리적인 이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레기온 경의 말대로 사람을 남기고 이야기만 나중에 들은 다음에 대처를 해도 늦지 않았다.
어느 쪽 선택지든 확실하다 싶은 게 없기에 황제는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나는 오늘도~ 망치를 들고~ 노래를 하네~ 랄라라라~ 자~! 오늘 이것만 나르면 끝나니까, 얼른 끝내고 치킨에 시원한 맥주 한잔하러 갑시다~! 베오날드 님이 뭘 시켜도 제가 커버할 테니! 다들 힘내요!”
‘이 목소리는……?’
한참 고민을 하던 황제는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마차에서 일어나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진한 갈색 머리칼에 붉은 눈을 한 소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망치를 쥐고 석재를 운반하는 수레 행렬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황제는 그 소녀를 바라보면서 경악했는데, 머리 색깔만 빼면 자신의 딸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제, 젤시?”
“어, 어르신, 왜 그러십니까?”
“내가…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저, 저길 보게…….”
“저건……! 아아아아!”
황제의 말에 그쪽을 바라본 레기온 경도 깜짝 놀라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장 황실에 가까웠던 기사인 만큼 젤시 황녀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그녀가 황녀라는 것을 확신하진 못했는데, 머리색이 다른 점을 제외하고도 황궁에서는 늘 무표정하고 차갑고 고요했던 인상과 달리 지금 저기 있는 소녀는 태양빛처럼 밝은 미소를 띤 채 활달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음… 으으으음…….”
황제는 너무나 큰 충격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좀 더 확신을 얻고자 다시 한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수레들을 이끌고 들어가서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황제는 우선은 이곳을 떠나는 것을 보류하고는 레기온 경에게 일러 즉시 이 마을에서 숙소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