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식량은 발데리안 영지에서만 소모해도 자그마치 1년분이나 되는 막대한 양이었기에 창고에서 꺼내 수송대를 구성하고 마차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그리고 교단의 위용과 명성을 위해서 수송대의 호위는 예정대로 교단에서 하기로 했고, 당연히 이 많은 양을 호위하려면 ‘금역’을 수호하는 성기사들까지 전원 동원되어야 했다.
“대주교님, 아무리 그래도 ‘금역’을 거래 대상으로 삼은 건 큰일 날 일 같은데… 적어도 성국에 의견을 물어보고 하시는 게…….”
“그사이에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 상상해 보았나? 선 조치, 후 보고라는 말이 있지. 사실 지금도 늦은 거나 다름없지. 수도를 비롯해서 주요 영지까지 이 많은 양의 식량을 운반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상상해 보았나? 게다가 지금은 그나마 낫지. 만약 굶주리기 시작해서 폭주한 타이밍에 운반을 하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걸 노리고 덤벼들지……. 감내하며 일을 성공시킬 수 있겠나?”
“죄, 죄송합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하자 성기사들을 이끄는 단장은 금방 하륀 대주교의 말에 굴복하고 일을 진행해 나갔다.
재난이라는 것은 골든타임에 조치를 취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진화할 수 있기에 성기사들은 우려를 가슴에 품고, 대주교의 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신전 경비를 제외한 전원이 수송 임무에 투입되었고, ‘금역’엔 이제 아무도 자리 잡지 않게 되었다.
“후우~ 드디어…….”
식량을 나르는 행렬과 바쁘게 움직이는 신전 기사들을 보며 완벽하게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는 것에 안도한 베오날드는 세인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과 발데리안 영지의 후계자인 케드론을 데리고 유적으로 향했다.
‘…이제 발데리안 가문과 떨어질 수 없게 되었고, 내 가치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걸 알려 줘야 할 때가 되었으니…….’
“음, 나도 이 발데리안 영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여기에 오는 건 처음이군. 정말 살다 보니 별 경험을 다 하는군. 아무튼 여기가… 그 유적인가? 겉보기엔 그냥 폐허로밖에 안 보이는데 말이지.”
“과연 여기를 얻기 위해서… 그 많은 식량을 줄 가치가 있을까요?”
“크흠! 셀리나 님, 베오날드 님이 하시는 일이니… 분명 뭔가 있을 겁니다.”
“와! 이건 처음 보는 건축 양식이네요!”
도착한 베오날드 일행은 각자 터만 남은 ‘금역’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금역’을 수호하는 성기사들은 오로지 사람들의 통행만 막을 뿐, 감히 이 금지된 땅에 있는 것을 관리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금지된 구역이라고 써 붙인 판자가 아니었다면 그냥 흔한 폐허로 생각될 장소로 오직 풀과 세월의 흐름에 닳고 닳은 바닥의 석재들만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똑같이 지키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야 누군가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면 역시 입구를 지켜야 하니 말이죠. 자, 횃불에 불을 피우고 들어갑시다.”
“아니, 잠깐… 엄연히 ‘금역’인데, 이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 건가?”
“들어가도 되니 제가 이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는 어두운 입구를 향해서 베오날드가 먼저 움직였다.
엄연히 금지된 영역이고 어두운 지하로 들어가는 게 마치 ‘던전’으로 향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다들 두려워했지만, 베오날드의 성향상 그는 확실하지 않은 곳에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다들 그를 믿고서 따라갔다.
내부는 베오날드가 전에 갔던 탈피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석재와 철제가 잘 어우러진 튼튼하고 거대한 지하 통로로 조명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둡기 짝이 없었다.
“자, 다들 잠시 정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으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요? 가장 핵심적인 말을 해 보자면 이 유적, 할데온에 있는 것의 형제뻘인 곳입니다. 즉, 그곳과 비슷한 구조라는 거고, 내부의 보안도 똑같은 셈이죠.”
탁… 타닥타닥! 탁!
그렇게 말하며 베오날드는 입구 근처 벽면에 있는 패널을 조작하여 곧바로 암호를 집어넣어서 보안과 함정을 해제하고 불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러자 환한 불빛과 함께 베오날드를 맞이한다는 메시지가 패널에 떠올랐다.
“우와아앗? 이, 이게 뭔가?”
“밝아졌어?”
“세상에… 이게 뭐야?”
“저거 불빛을 내는 거, 뭐죠? 마정석인가요?”
당연하지만 베오날드를 따라오던 일행은 갑자기 밝은 불빛이 켜지고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자 깜짝 놀라면서 각기 다른 감상을 내뱉었다.
그리고 단순히 오래된 유적의 차원을 넘어선 이 시설의 모습에 다들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마법사인 셀리나였다.
“저, 저기요! 베오날드 님! 이거 어떻게 된 거죠? 여기 대체 정체가 뭐예요? 제발 설명 좀 해 주세요! 대체 할데온 유적에서 뭘 한 건가요?”
“급발진이 심하네. 말했다시피 여긴 할데온 유적과 같은 곳이다. 약 500년 전 통일 제국 시기에 건축된 곳이고, 이곳의 용도는 바로… 자, 이리 와서 직접 여길 봐.”
“이건…….”
베오날드에게 따지러 간 그녀는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 안은 아주 거대한 서재로, 족히 수천, 수만 권은 될 법한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본 셀리나는 경악을 하며 중얼거렸다.
“전부 책?”
“그래, 여긴 ‘알의 둥지’. 500년 전, 통일 제국의 국정을 휘어잡은 한 귀족이 그 시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을 모아서 보관한 곳이다.”
“모… 든 책이요?”
“그래, 모든 책이다.”
마탑에서 대연금술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 베오날드이기에 ‘지식의 보존’에 대한 중요성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리석고 폭주하는 생물이라는 것도 알기에 그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간에 열심히 연구하고 가꾸어 온 ‘지식’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주를 제작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알의 둥지’였다.
‘괜히 내가 발데리안 영지에 만든 게 아니지.’
‘탈피의 무덤’은 폐품들을 모아 놓은 창고 같은 곳이었기에 대충 대륙 구석에 만든 것이라고 하면, 반대로 이 ‘알의 둥지’는 가장 중요한 곳이라서 최측근인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에 만든 것이었다.
그 중요성은 베오날드가 사이가 안 좋은 후계자인 알테리오에게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여기는 인간의 지식을 보관하는 곳이라 엄청 중요하니까 관리 좀 해 다오.’라고 하면서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그런데 결국 놈은 또 여기를 셧다운 해 놓고 가 버렸지. 에휴~ 우리 집안은 부모 자식 간에 사이가 안 좋은 유전자라도 있는 건가? 아니, 라라를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하아아~’
아무튼 그 어떤 곳보다 중요한 유산 중 하나를 되찾은 베오날드였다.
앞으로 다른 곳들을 찾아야겠지만, 일단 여기 알의 둥지에 있는 지식들 중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꺼내는 것부터 당장 해야 할 작업이었다.
‘필요한 책들을 찾는 것도 일이겠군. 역사서라든가 고대의 책들도 많이 있을 텐데… 언제 다 둘러본다. 에휴~’
“…세상에나, 이것들, 단순히 500년 전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서적들도 잔뜩이라니!”
“아마 유실된 마법서나 옛 마탑의 오래된 연구 자료들도 있을 거다.”
“뭐라고요? 아니, 대체 여기는 뭡니까? 그걸 어떻게 모은 거죠?”
‘뭐긴, 돈 주고 샀지. 마법사 놈들은… 경제관념이 많이 부족하니까.’
그놈의 진리가 뭔지, 마탑에 기부하는 돈으로는 연구 자금이 모자라다고 하면서 일을 벌이는 마법사들이 너무나 많았고, 베오날드는 그들에게 빚을 지게 해서 그들의 마법서나 연구 자료를 압류해 버리거나 아니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들에게서 사 버리는 식이었다.
‘혹은 미친 연구를 해서 사고 치려는 놈들을 제압해서 몰수 때려 버린 거라든가……. 진짜 정신병자 놈들이 너무 많아.’
마법사들의 탐구욕이 문제인 건지 모르지만, 미친 연구를 하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골치가 아팠던 베오날드였다.
흑마법, 사령술, 악마학… 같은 금지된 분야의 연구를 하는 건 기본이고, 세계의 질서나 법칙을 뒤흔드는 주문 같은 걸 연구하는 놈들도 천지였다.
물론 예산을 지원하는 베오날드는 모조리 걸리는 대로 연구 자료를 압수 혹은 폐기 처분하는 척하고 혹시 쓸 일이 있을지 몰라서 이곳 알의 둥지에 보관했다.
“아무튼 여기 이 ‘알의 둥지’에 대해선 무조건 비밀입니다. 도련님이야 당연히 지켜 주실 거라 믿고… 다른 사람들도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저기… 마법서 빌려 가도 되나요?”
“건축학 책도 있나요?”
“물론이지. 다만 500년 전 언어로 쓰여 있어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아니지, 그냥 500년 전 언어를 가르쳐 주면 되겠군. 일단은 관리실로 가지. 그곳에 가야 제대로 된 목차나 서적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야.”
베오날드는 일행을 데리고 중앙 관리실로 향했다.
한참을 거대한 복도를 걸은 뒤에 도착한 곳은 이전 할데온 유적에도 있었던 것과 같은 관리실이었다.
결국 탈피의 무덤이나 이곳 알의 둥지나 용도 자체는 보관이었기에 둘 다 큰 차이는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관리실에 놓은 마도구라든가, 각종 도구들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와아… 여기도 굉장하네요.”
“아, 이게 내부 지도구나.”
“그러고 보니 이 던전의 시설들은 어떻게 작동하는 거죠?”
“지맥의 마력을 끌어와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산이나 들에서 봤던 그런 곳이 시냇물이라면 여기는 강이나 큰 호수라고 보면 된다. 우선 보자… 건축학 서적이랑 당시 건축물 설계도, 농업 서적… 셀리나, 마법서는 어느 분야를 원하는 거냐?”
단순히 창고 기능만 하는 탈피의 무덤보다 나은 것은 바로 이 마도구로, 어디에 어느 서적이 있는지 알려 주는 기능이 있는 장비였다.
복잡하지 않게 분야를 태그로 나누고, 그 리스트를 나오게 한 다음 서재의 위치를 알려 주게끔 술식을 간소화해서 짜 넣은 것으로 나중에 급하게 혼자 내려왔을 때라도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베오날드가 직접 만든 시스템이었다.
‘그때는 인력이 있는데 굳이 왜 만드냐고 난리 치던 놈들 천지였는데… 지금은 만들고 보니 이토록 편할 수가 없지. 후우~ 덕분에 마도구에 다중 술식 전개와 안정화 논문도 쓸 수 있었고… 아무튼 만들길 아주 잘했어.’
“마법서야… 원하는 분야야 많지만, 그… 정말 다 있나요?”
“웬만한 건 다 있을 거다. 그러니 기탄없이 이야기하도록. 하이디랑 케드론 도련님도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자신이 찾을 책들의 위치를 먼저 찾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것도 우선 찾아가야 할 것을 찾아낸 베오날드는 곧장 서재에 가서 직접 책들을 가져왔다.
지도가 있다곤 해도 500년 전의 글자를 완벽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베오날드뿐이기에 직접 움직여야 했고, 겸사겸사 밑에 있는 전송실로 가서 탈피의 무덤과의 연결도 켜 두기까지 했다.
‘좋아, 거기 상황은 이상 없군. 아무튼 오늘은 이 책들을… 대여 설정을 해 두고 나가면 끝. 나가자마자 베시아에게 이곳 입구 위에다 저택을 만들 거라고 하고 같이 설계해야겠어. 으음, 어디 500년 전 그대로 복구해 볼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꺼내 온 책들에 보존 주문이 걸린 태그와 열람 기록에 대여 설정을 해 두는 베오날드였다.
이곳에 있는 책들은 모두 귀중한 것들인 만큼 언제, 누가 대여했는지 기록해서 관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베오날드는 기록을 위해 열람 기록을 열어 보는데, 안에는 옛날에 대여했던 이들이 적어 둔 기록이 있었다.
‘음? 이 연도는… 내가 죽고 난 이후인데, 누가 대여해 간 거지?’
[대여 기록]
대여 서적:신마법의 구현과 방법론-저자 달켄 다이나
대여자:달켄 다이나
승인:알테리오 폰 노이멀
“이건……? 아니, 알테리오… 이 자식이?”
기록을 본 베오날드는 책을 대여하려던 것도 잊고 발끈했다.
이 ‘신마법의 구현과 방법론’이라는 책은 금서(禁書)로, 마탑의 대마법사인 달켄 다이나가 연구 중에 대형 사고를 친 바로 그 위험한 연구였다.
연구하다가 사고 치는 일이 잦다곤 하지만 이 연구를 할 땐 사상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고 피해도 컸는데 배상도 하지 않았기에 베오날드가 도저히 못 참아서 마탑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빼앗은 연구 자료였는데, 그걸 기어이 되찾아 간 기록을 발견했으니 머리가 아파 오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