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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60화 (160/259)

[160화]

“예, 그러시는 게 당연하겠지요. 저희도 물론 그냥 열어 달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허허, 설사 저 하늘 끝까지 백금화로 탑을 쌓는다고 해도 무리일 겁니다.”

“그러면 사람의 시체로 쌓는다면 닿을 수 있을는지요?”

“허허허, 상당히 무서운 말씀을 하시군요.”

“그런 일이 곧 일어난다면?”

더없이 진지한 말투로 베오날드가 말하자 하륀은 숨을 멈추고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대주교라곤 해도 대규모로 사람이 죽거나 하는 모습을 볼 일은 거의 없었기에 그는 공포스러운 소리를 하는 베오날드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남부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서 대륙 전체의 식량 시세가 오른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올해는 다시 정상화된 남부에서 식량이 공급될 거라고 보고 있지만… 그게 안 될 예정이지요.”

“무슨 근거로 그런 예측을 하시는지요?”

“가르칸 공화국의 노이멀 총리가 바니로 백작가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저번 전쟁을 일으킨 그녀는 계속해서 제국을 위협하고 혼란을 만들 생각이지요. 지금쯤이면 추수가 끝났을 거고,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고 도덕규범을 신의 뜻과 함께 쉽게 부여해 주는 건 좋지만, 결국 거대한 재앙이나 재난 속에서 사람들의 생존이 위협당하게 되면 모래성처럼 금방 부서지지요. 왜냐면 ‘기적’이 있다곤 해도 소수의 사람에게만 그 혜택이 부여되고, 일반 사람들은 결국 ‘기도’밖에 하지 못하니까요.”

종교인에게 불쾌할 법한 소리를 직구로 쏟아 내자 대주교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전생에 베오날드가 군림하던 시절에 맞이한 홍수, 태풍, 역병과 같은 각종 재난에서 매년 거액의 헌금을 받아 처먹는 것치곤 ‘교단’은 정말 쓸모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다 해결한 일에 숟가락 얹어서 유세 부리는 꼴을 더 보았기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 문제가 아니라 식량난이… 올해도 있을 거라는 겁니다. 물론 저희 영지는 이런 점을 작년부터 예상했기에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다른 곳은 어떨까요? 작년 겨울과 보릿고개를 넘은 시점 이후엔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예상하고… 아무런 대비를 안 했겠지요?”

“으음……!”

“아무튼 이 사실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시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미리 제안만 하겠습니다. 유적이 있는 지역의 금제를 해제해 주시고, 저희가 탐사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현재 발데리안 영지가 비축해 놓은 식량의 절반을 교단에 대주교님의 이름으로 기부하도록 하지요.”

“절반씩이나?”

“아, 절반이라고 하니 정확한 양을 예상 못하시겠지만 대략 발데리안 영지민들을 1년간 먹여 살릴 정도입니다. 아껴 먹으면 1년 반 정도는 되겠군요.”

“그, 그렇게나? 그걸 1년 만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쪽 숲의 위험종들을 부지런히 사냥해서 모조리 가공하여 보존식으로 만들고 지금도 늘리고 있습니다. 맛은 그리 좋지 않지만… 뭐, 굶주리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거대한 위험종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얻은 고기는 그 양은 많으나 확실히 소나 돼지에 비해선 맛도 떨어지고 냄새도 심하다.

심지어 보존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말로 딱 ‘먹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식량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나가는 것에 비하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 굶어 죽는 사람들 앞에서 맛 투정은 그야말로 귀족의 사치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굶주리게 되면 말입니다. 이성과 합리… 심지어 도덕심까지 잃어버리게 되지요. 혹시 보셨는지요? 흉작과 역병이 들어서 참혹해진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입니다.”

“…….”

“차마 자신의 자식은 잡아먹을 수 없어서 옆집의 자식과 바꿔서 잡아먹는다든가, 장례를 치르고 매장한 시신이 반나절 만에 누군가의 스튜가 된다거나, 빵 한 조각에 딸의 처녀를 파는 가족이라든가. 아, 참고로 그때 노예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서 시세가 완전히 개박살 났었지요. 그 외엔… 아, 말이 너무 길었군요. 대충 이런 용납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버리죠.”

‘마치 눈앞에서 생생히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군. 근 20년 사이에 그런 재앙은 일어난 적이 없었을 텐데. 하나… 분명 교단의 기록엔 남아 있었지.’

베오날드가 죽고 난 이후 난세 속에서 기상 이변이나 태풍, 가뭄 등으로 흉작이던 때가 있었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교단의 기록에 남아 있었기에 그가 말하는 일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하륀 대주교였다.

하나 그렇다곤 해도 ‘금역’을 해방하는 일은 자신이 독단적으로 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직도 갈등하는 그를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두드렸다.

“뭐, 제안에 응하지 않으셔도 발데리안 영지에 계실 테니 대주교님의 신변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깔끔하게 포기하고 곧 식량난이 오면 비싸게 팔면 그만이고, 이것을 미끼로 인구를 빨아들이고, 발데리안 영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겁니다.”

“…….”

“하지만 대주교님은 어떨까요? 대륙 전체에서 아사자가 급증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데 그냥 지켜본 사람이 되시겠지요? 그 죄책감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죽고 나서 천상의 심판대에 섰을 때, 자비로운 여신 앞에서 당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지금 동요하는 것으로 보아 베오날드의 말을 상상한 것이리라.

독실한 종교인일수록 자신이 쌓아 온 도덕의 탑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평생 성실하고 독실하게 여신을 섬겨 오며 자비와 도덕을 전파한 이 대주교에게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버렸다는 죄책감은 절대 버틸 수 없는 것이리라.

심지어 그는 단 한 번도 참혹한 전쟁을 본 적 없기에 정신적 내성이라곤 전혀 없으니 타격은 더 클 테고 말이다.

“감정적 이야기를 제외하고 실리적 잣대로 이야기해 보면 얻은 식량을 가지고 구호 활동을 다니는 걸로 대주교님의 명성은 제국을 뒤흔들 것입니다.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하고 여신님의 뜻을 전하는 그 고결한 행동. 게다가 운반하는 식량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전력을 끌고 가야 하므로 ‘금역’을 지키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비상사태이니 말이죠.”

“그게… 베오날드 님의 말대로 된다면 말이지요.”

“네, 맞습니다. 아직 남쪽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으니, 가정일 뿐이죠. 그러니 대답은 소식이 들려올 즈음에 듣는 걸로 하겠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겁을 줘서 속였다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해야 하니 말이죠. 그때 다시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일어선 베오날드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났다.

하륀 대주교는 낮은 신음을 뱉고는 차를 마시면서 우선은 베오날드가 말한 시나리오가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도와 남부에 있는 다른 대신전에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데리안 영지에 오는 상인들과 교단에서 보낸 전서구, 또 직접 오고 가는 모험가 및 순례자 등을 통해서 베오날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그자의 말대로 되어 가는 건가?’

“교단 총본부에서는 어떻게든 식량 확보에 힘쓰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구호 활동을 할 준비를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추수가 끝난 시점. 곧 겨울이 오고, 겨울에 식량을 구한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이 없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전하는 교단의 전령을 보며 하륀 대주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전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예. 분명 교단에서도 나름 재난이나 비상 상황을 대비해서 비축한 물자가 있긴 하지만 그… 이번 사태는 상상 이상으로 클 건데, 예측을 못한 것이 가장 뼈아픕니다. 망할 하프엘프 같으니! 항복 협정을 노골적으로 어겼습니다.”

“성국에서는 어떤가?”

“이미 가르칸 공화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인도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압박을 하고 있지만, 노이멀 총리는 ‘받아야 할 것을 받을 뿐.’이라며 무시하고 있습니다. 전쟁도 불사할 생각인 것 같은데… 현재 가르칸 공화국의 군사력은 제국의 전력에 맞먹는 걸로 추정되는 수준이라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불가능하겠지요. 성국에서는 지금 최대한 모은 군사력으로 성전을 하고자 하니…….”

‘…모든 게 그의 말대로군.’

이제야 베오날드의 그 자신만만하던 태도가 납득이 가는 하륀 대주교였다.

여기서 ‘금역’을 식량과 거래하지 않으면 제국에 큰 혼란이 오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서로 잡아먹기 위해서 싸울 것이다.

‘발데리안 영지 1년분의 보존 식량. 물론 그것으로 제국 전체를 구할 순 없어. 하지만 그것이 있다면…….’

식량난이라는 것은 결국 거대한 산불과 같은 것이다.

일어날 때 확! 하고 거대한 불길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태울 것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그 위에 다시 생명이 싹튼다.

베오날드의 말대로 올해 겨울과 내년 봄에 이어서 여름까지… 이 타이밍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혼란이 커질 것이고, 결국 적응하게 되겠지만 제국의 국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심하면 주변국들이 침략해 오고, 어쩌면 제국이 갈기갈기 찢기면서 난세는 더 혼란스럽고 길어질지 모른다.

막을 방법은 오직 베오날드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그 식량으로 초기의 혼란과 대량 아사 사태를 최대한 억눌러 혼란과 국력의 하락을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금역은 오래전부터 이유가 있었기에 금역으로 막아 두었을 터. 거기에 베오날드라는 자도 그 금역을 노리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안을 안 받아들이면 닥칠 운명이 너무나 명확해서 거부할 수가 없다.

베오날드의 말대로 자신이 제안을 거부하는 순간, 수많은 인명이 굶어 죽을 미래가 보이니 하륀 대주교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생을 신의 뜻을 따랐다고 자부하는 그는 언젠가 시련의 때가 찾아오면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 그 뜻을 이루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신이시여…….’

그리고 지금 바로 그때가 찾아왔다.

금역을 지키고 교단의 인정을 지키며 살 것인가?

설사 이단으로 찍힐지언정 금역을 해방하고 평생을 따른 여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어떤 것이 진정 여신의 뜻을 따르는 삶인가.

‘답은… 이미 나왔군.’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대응할 시간이 늦어지는 만큼 하륀 대주교는 대주교라는 자신의 지위에 맞는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신앙을 결코 배신할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에게 보낼 서신을 적어 전령에게 전했다.

그렇게 하륀 대주교의 항복 선언이 베오날드의 손에 도착했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으면서 곧장 보존 식량을 보낼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이 제안은 그 신관이 어떤 타입이든 거부할 수 없지.’

만약 하륀 대주교가 권력과 지위에 탐욕스러우면 탐욕스러운 대로 기부받은 식량으로 자신의 명성을 떨치고 성국에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에 백금화를 내밀어서 성격을 떠본 것이었냐면 바로 ‘거래’로서 ‘금역’을 얻고 난 이후의 대응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지금처럼 신실하고 선량한 타입이 아니라 탐욕스러우면서 뻔뻔한 인물이라면 식량을 기부받고도 약속을 안 지키고 배 째라로 나올 가능성이 있기에 거래를 하는 데 있어 서류와 문서는 물론 기록까지 해 놓고 발뺌하지 못하게 할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다.

약속이라는 것은 꼭 지켜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에 그것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튼 드디어… 내 유산을 되찾게 되는군. 후우우~ 정말 긴 여정이었어.’

‘탈피의 무덤’에 이은 두 번째 유산. 그곳을 얻은 건 단순한 성과가 아니라 지금 탈피의 무덤에 있는 전송 마법진 시설도 켜 놓았기에 실질적으로 2개의 유산을 되찾은 거나 마찬가지이며 이젠 자신이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특히나 이 발데리안 영지 아래에 있는 건… 아주 중요한 시설이지.’

전생에 그의 최측근이었던 발데리안 가문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아주 중요한 시설이 있는 만큼 베오날드는 하루라도 빨리 ‘금역’이 해방되어 그 유적으로 가서 시설을 활성화시키길 바라며 창고에서 꺼내지는 보존 식량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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