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물론 제국에서 바니로 백작가와 그 주변만 농업을 하는 건 아니다.
도시화가 잘된 제국 수도의 성 밖에 있는 평야에는 엄연히 농가들이 있었고, 대부분의 도시들도 주요한 기초 산업이 농업이었다.
애초에 농업은 문명을 세우는 척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것으로, 사냥보다 안전하고 채집보다 일정하고 더 많은 식량 생산이 가능해서 인구 부양을 가능케 하여 인류가 마을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농업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현대의 기계화, 토지의 질을 유지하는 비료 등등… 각종 기술이 개발되어서 폭등한 생산량을 일반적으로 상상해서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과거 구시대적인 농업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일단 그 영지가 가진 모든 농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서 휴경지를 두고 하는 농업이 기본이라서 실제 가용하는 영지의 농토는 가진 땅의 2분의 1 혹은 3분의 1이다. 거기에 농업 기술이나 종자 개량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며 토지의 질, 그해의 날씨에 따라서 또 실제 생산량은 들쭉날쭉해진다.
거기에 사람은 음식만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 문명을 이루고는 신분과 직위가 갈리고, 직업과 계급이 생기고, 거기에 맞는 옷, 의약품, 건축물, 무기를 비롯한 생활 도구부터 시작해서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물건들을 생산하고 또 소모해 가며 지내기에 이것들을 얻기 위해선 무엇인가를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데… 특정한 산물이나 광산, 어업을 하는 마을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주 수입원은 ‘식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토지가 비옥해서 식량 생산이 뛰어난 남부의 곡창 지대에서 공급되는 식량은 비록 식량의 가치를 낮추긴 하지만 인구 부양력을 높여 주고, 거기에 여분의 자금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을 통해 발전한 덕분에 ‘제국’이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에 밑받침이 되고 있었다.
애초부터 칼레움 제국 황제가 계속해서 황녀를 시집보내려고 할 정도로 관리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 결국 그 밑받침이 붕괴되고 만 것이었고, 그것은 칼레움 제국으로선 큰 불찰, 가르칸 공화국으로선 아주 좋은 기회였다.
“…폐, 폐하! 예상하신 대로… 남부 바니로 백작가와 거래하는 상인이 올해도 식량 매입에 실패했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아마 다른 영지들에도 이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그렇군. 역시 그 망할 잡종 엘프 년이… 예상대로 행동했군.”
으득.
결국엔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져서 이가 갈리는 칼레움 제국 황제였다.
이 사태를 예견한 그 또한 베오날드처럼 식량난에 미리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고, 나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발데리안 영지와는 다른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바로 제국 수도의 인구수와 도시 규모의 차이였다. 거주하는 인구 숫자만 해도 발데리안 영지보다 훨씬 많은데, 농토는 성 밖에 있는데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식량 문제에 한해서 손쓸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국정 예산과 황실 자산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쌀 때 미리 사 두는 것과 식량 위기를 알려서 대비하라고 하는 것, 그리고 대체 식량의 재배를 권장한다거나 파티와 사치를 줄이는, 그가 평생 제국을 경영해 온 방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 부족하군. 터무니없이 부족해. 어떻게든 이 방안을 해결할 방법이……. 특별히 올해는 휴경지 농사까지 지으라는 특명을 내릴까? 아니, 지금 그리했다간 지력(地力)을 소모해서 이후 더 큰 식량난이 온다! 절대 안 돼! 지혜가… 지혜가 필요해!’
그래서 관료, 재상, 아카데미의 학자들과 마법사들을 불러서 계속 논의했지만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갑자기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식량난을 대비할 방안을 쉽게 떠올리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런 높으신 분들 중에서 평민들이나 하는 농업이라는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있다고 한들 이 전란으로 뒤덮인 500년간 그런 연구를 할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실패인가. 그럼 결국…….’
그러니 결국엔 모든 게 실패한 것이 눈에 보이는 황제에겐 이제 다음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폭등하는 식량 시세, 빵을 달라며 외치는 백성들, 그나마 귀족들은 영지에서 세금으로 받은 식량을 가지고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얄짤없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작년의 식량난은 전쟁으로 인해 한 해만 그런 거라면서 나아질 거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졌기에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었는데, 그게 없다? 어떻게 일이 커지고 난리가 날지 상상하기도 싫은 황제였다.
“…그렇다면 결국은 전쟁뿐인가?”
복잡한 문제 속에서 가장 쉽고 깔끔한 해결책은 역시 전쟁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먹을 입을 줄일 수 있고, 내부 불만과 분노도 바깥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단점은 역시 국력과 인구를 깎아 먹는다는 것과 가뜩이나 난세 속에서 혼란스러운데 제국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었기에 쉽게 택할 방법이 아니었다.
“후우~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폐하, 발데리안 영지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런가? 이리 주게. 어디… 그쪽도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눈치 빠른 놈의 말을 들어서 대처를 하고… 허어……?”
올라온 보고서를 읽던 황제는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을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데리안 가문의 가신이 된 베오날드의 수완과 마도구 제작을 통해서 위험종 몬스터를 안전하게 사냥해서 각종 마도구 제작 소재를 얻는 것은 물론 얻어 낸 엄청난 양의 고기를 가공해서 식량 비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관련 사업을 하면서 농업이 전부였던 코딱지만 한 영지를 순식간에 소도시급으로 성장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농지 개발을 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그놈인가? 그러고 보니 크멜 공작도 빚을 졌다고 했었… 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 건지…….”
애초에 이 보고서의 진실성부터가 의심이 갈 정도로 허황된 내용이라서 황제는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했던 전쟁의 승리를 치하하기 위해서 만난 크멜 공작이 놈에 대해 칭찬하던 걸 생각하면 아주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건… 직접 확인해야겠군. 여봐라! 지금 즉시 레기온 경을 불러와라.”
“예! 알겠습니다, 폐하!”
‘그놈에게 두 번이나 당할 순 없지.’
보통 다른 문제였다면 이 믿을 수 없는 보고의 정보를 확실히 검증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보내거나 했겠지만 이미 한 번 그놈에게 당했고, 놈의 역량이 외양과 나이대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자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고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황제였다.
레기온 경이 오자 황제는 즉시 비밀리에 발데리안 영지에 가겠다고 하며 준비를 지시했다.
***
발데리안 영지, 여신교 대신전.
“도착했습니다, 베오날드 님.”
“으으음… 풉!”
드디어 고대하던 교단과의 거래를 위해서 발데리안 영지에 있는 가장 큰 대신전에 찾아온 베오날드는 500년 전에 지어진 그곳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감회에 빠지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신성 모독 겸 자신이 디자인한 여성스러운 면이 많이 강조된 여신상이 이곳 대신전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케 저 디자인을 만들게 했군. 하핫. 뭐, 대신전의 주교들은 왕 아래의 제후 같은 거니 말이지. 나름 재량권이 있었겠지. 베노피스의 대신전에도 저걸 만들었으니… 아무튼 이리저리 만들었겠지.’
“오셨군요, 베오날드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내를 맡은 사제 폴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베오날드를 맞이하러 나온 사제는 40대 후반의 대머리 남성으로 금색 장식이 된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지위가 있는 사제인 것 같았다.
하긴 자신은 발데리안 영지 후계자의 오른팔로 낙점된 몸이고, 최근 발데리안 영지 바로 옆에서 대규모 사업을 해서 작은 영지를 번영시킨 걸로 아주 유명한 몸이었다.
사제 폴의 안내를 받아서 신전 내부를 걸어간 베오날드는 금방 별실에 도착했다.
“이곳에 대주교님이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귀족급 이상의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별실 안엔 화려한 카펫이 깔려 있고 탁자엔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고, 한쪽 구석엔 여사제 한 명이 미리 차를 타기 위한 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탁자 옆에 마련된 의자엔 폴이라는 사제보다 더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대주교로 보이는 50대의 남자가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베오날드를 맞이했다.
“허허, 어서 오십시오, 베오날드 님. 연락은 백작님을 통해서 이미 받았습니다. 이곳 신전의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있는 대주교 하륀이라고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그럴 리가요. 차가 곧 나올 거니 일단 앉으시지요.”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베오날드를 맞이한 하륀 대주교. 새하얀 백발에 긴 수염을 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선량하고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사전에 알아본 정보에서도 그는 수십 년간 이 발데리안 백작가의 영지에서 지내며 병자와 빈민들을 돌보는 등 수많은 선행을 베풀고 깊은 신앙심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등등, 존경받는 성직자의 모범을 보인다고 하였다.
‘과연 인상은 동화책에서 볼 법한 인자한 분위기군.’
“그래서,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요?”
“우선 이것을… 신전 재정에 보탬이 되시라고 드리는 헌금입니다.”
베오날드는 우선 라라에게 받았던 백금화 한 장을 슬쩍 탁자 위에 놓았다.
백금화. 한 장에 금화 100개의 가치를 지닌 현 대륙 화폐 중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그것을 보면 일반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경악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대주교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침착했다.
‘음, 역시 자제심이 대단하군. 어떤 의미든 간에 말이지.’
“허허, 베오날드 님, 신을 따르는 것엔 액수가 아니라 신앙심과 꾸준한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금화는 너무 크니 넣어 두시고, 금화 한 장과 기도만 해 주십시오. 허허허.”
‘…탐욕이 없는 타입인가? 아니면 거액에 익숙한 건가? 으음…….’
촤르르르르륵!
베오날드는 그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실수를 가장하여 주머니에 있는 백금화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백금화 개수 도합 50장, 금화로 치면 5천 개 분량. 이 정도 액수라면 인간인 이상 동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대주교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보자… 여기 금화 한 장을 헌금으로…….”
“허허허, 감사합니다. 여신님에 대한 감사의 기도도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래도 정말로 신앙심이 대단한 것 같군. 이만한 금액을 보면 웬만한 자라면 동요를 보여야 할 텐데… 아니면 이 정도로는 모자랄 정도로 야망이 크거나 말이지.’
아무튼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베오날드는 빠르게 주판을 두드려 계산을 마치고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어차피 신관님과 나눌 공치사 같은 건 그리 많지 않았고, 생각하는 영역도 겹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죠. 현재 저는 서쪽 숲을 개발하고 바다까지 길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 유적이 있는 땅이 필요합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도시로 만들어 낼 생각이지요.”
“흐으음, 최근 들려오는 베오날드 님이 하시는 일과 공훈에 대해선 들었기에 아마도 이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유적의 핵심 부분을 빼고 그 외의 땅을 모두 열어 드리고, 유적의 입구 위에 신전 하나를 지어 주시고 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으음, 지혜롭군. 게다가 상식도 있어. 신앙심도 깊고, 재물에 현혹되지 않는 걸 보면 제대로 된 대주교인가 보군.’
설마 금역으로 지정해 둔 곳을 이렇게 쉽게 개발하라고 허가해 줄 줄은 예상 못한 베오날드는 내심 놀랐다.
게다가 그가 내민 절충안도 썩 나쁘지 않았고, 무난하게 해결될 수 있는 조건이었기에 이 하륀이라는 대주교가 상식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이 조건에 감사해하면서 물러났겠지만, 그 유적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베오날드로서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음, 이야기가 통하실 분 같군요. 그러면 한 걸음 더 나가도 되겠습니까?”
“한 걸음이라면?”
“그 유적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허허허,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성국에서 ‘금지된 영역’으로 지정하였고, 우리에겐 그곳을 지키도록 했으니 말이지요.”
‘…예상대로인가. 여기서부터 승부군. 내 물건 내가 되찾겠다는데 방해하기는……!’
일단 요구를 들어주고 침입할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베오날드는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물건들이 있는 유적으로 들어가서 전송 마법진을 활성화시켜서 ‘탈피의 무덤’에 있는 것들도 손에 넣어야 했다.
본격적인 거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