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백작님, 잘 들으십시오. 저는 그저 제 자리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 증거로 백작님의 후계자인 케드론 도련님을 위한 마갑주도 성심성의껏 제작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영지를 운영하면서 저와 하이디 경은 사병을 늘리지 않고, 케드론 도련님의 재가를 받아서 발데리안 영지의 병사들을 운용했다는 점이지요.”
“으, 으음…….”
도시를 만든 충격에 휩싸여 발데리안 백작이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착착 짚어 주었다.
권력의 핵심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무력인데, 베오날드는 자신이 철저히 사적 무력을 배제해 왔다는 점을 강조했고, 모두 발데리안 백작가의 후계자인 케드론의 재가를 받아서 진행했다고 하자 조금은 두려움이 누그러지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그러니 결국엔 모두 발데리안 백작님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으음… 그건 그런가?”
“게다가 이제 가을. 곧 예정된 식량 대란이 올 겁니다. 한두 해가 아니라, 아주 오래갈 식량 대란이지요. 그걸 생각하면 이렇게 영지를 키운 건 오히려 다행이지 않을까요? 아니면 계속 우려가 되신다면 오늘부로 여길 떠나서 발데리안 영지로 가서 얌전히 있겠습니다.”
‘어디 나 말고 이거 할 수 있겠냐?’ 하는 배짱 두둑한 발언. 발데리안 백작은 늦은 저녁 시간인데도 창밖으로 활발한 사람들의 모습과 번성한 도시의 풍경을 보면서 저걸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리해 보았지만 달리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놈이야 이 도시를 처음부터 만들었으니 인망을 쌓았겠지만… 다 따져 봤을 때, 이 정도 규모의 도시를 통제하려면 웬만한 사람이 아니곤 불가능한데…….’
결국 대체제가 없고, 지금 이렇게 벌여 놓은 일을 갑자기 되돌리면 영지민들과 귀족들의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대신 맡아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즉, 결국 베오날드를 계속해서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긴 내가 재상에 남작까지 임명한다고 큰소리 떵떵 쳤으니, 오히려 이렇게 대단하면 더 좋은 게 아닌가?’
‘쓰지 못할 거면 나에게 넘기게~’
충격이 조금씩 가신 덕분에 이성적인 판단이 되는 건지 발데리안 백작은 차츰 베오날드에 대해 인정하고 현 상황을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머릿속에는 이전 회담에서 크멜 공작이 했던 말까지 맴돌고 있으니, 오기로라도 베오날드를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재주를 크멜 가문의 영지로 가서 펼친다고 하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후우~ 그렇지. 알았네. 자네를 믿지. 좋아! 작위도! 내가 바로 줌세!”
“아,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작위도 지금 굳이 필요 없고, 그건 나중에 케드론 도련님이 제 혼처를 알아보고 난 뒤에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딱 명분도 되고 말이죠. 그리고 일하는 입장에선 지금 입장이 가장 마음에 드니 말이죠.”
천성적으로 맨 꼭대기보다는 한 계단 아래에서 실무적인 일을 보는 게 더 익숙한 베오날드였기에 작위는 다시 한번 거절해 두었다.
그다음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가을 시기가 다가오니 교단과의 협상에 대해서 말을 꺼내고자 하는 베오날드였다.
“아무튼 이제 다음 일을 생각하도록 하죠. 교단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자네 뜻에 맡기도록 하지. 설사 그 유적에서 허탕을 치더라도, 자네가 이 정도 수완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겠지. 교단과의 회담도 자네가 주도하고 차후에 보고하게. 케드론에겐 내가 일러두지.”
“아무리 부하가 유능하고 충성심 있어 보여도 지켜보는 것까지 그만두셔서는 안 됩니다. 지금처럼 케드론 도련님과 상의하고 교육하며 진행하겠습니다.”
“그리하게.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수고하게나.”
발데리안 백작은 베오날드의 말이 자신에게 교육하는 것처럼 말하는 투라서 살짝 거슬리려 했지만, 뭔가 납득이 가는 기분이 들었기에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일어나서 금방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일하는 베오날드와 하루가 다르게 번영해 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다시금 감상에 빠졌다.
‘나도 나름 평생을 우리 가문과 영지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이건 차원이 다르군.’
천성이 기사이자 무인이라서 모르는 게 많다고 해도 나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면서 영지를 번영시키고자 노력했었는데… 약 반년 만에 저런 것들을 모두 이루고 마치 정답을 다 아는 문제를 푸는 것처럼 일말의 지체 없이 일들을 진행시켜 가는 패기를 보면서 자신은 그저 영지의 주인으로 앉아 있기만 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저런 게 왕의 재목이라는 건가? 후우우~’
그리고 발데리안 백작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베오날드의 존재감과 능력을 생각하며 그를 잠깐 자신의 위로 두어 보았다.
그러자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잘 군림할 것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이 난세 속에서 저런 군주 옆에 서서 세상을 호령하는 상상을 해 보니 썩 기분 나쁜 일도 아니었다.
하나 자신은 약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발데리안 가문의 가주. 가문과 전통, 영토를 지켜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후우, 진정시키려고 해도 가슴이 진정이 안 되는군. 하하핫!’
자신이 이토록 가슴 뛰는 뜨거운 열정을 품었던 게 언제였던가?
못해도 20년, 아니 30년일까? 다이나 왕국에 대한 원수를 자신의 대에서 갚을 거라고 노력하면서 살아왔건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제국과 정치 싸움하면서 이미 그런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 그저 무사히 케드론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끝내자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저 친구의 가능성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다이나 왕국에 복수한다는 가문의 사명을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나 어떻게 보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키우는 게 아닐까? 그럴 거라면 차라리 저 친구의 아래에 들어가서 가문을 유지해 달라고 하는 방법은… 후우우~ 정말 복잡하군, 복잡해.’
차라리 전쟁터에서 싸우는 게 속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한 발데리안 백작은 결국 답을 내는 걸 미룬 채 지켜보기로 마음먹고는 발데리안 영지로 돌아갔다.
***
그 뒤에 몇 주가 지나고, 드디어 가을 수확 시기가 찾아와서 남쪽의 바니로 백작가와 그 영지에서는 한창 황금빛으로 물든 밀밭의 추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올해는… 그래도 굶주리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흉작이 아닌 걸 감사해야겠지. 하하핫. 작년엔 정말 끔찍했는데 말이지.”
“사 먹어야 했으니… 그리 풍족하진 않았으니까요.”
작년에 전쟁의 여파로 제대로 추수를 할 수 없어 식량 생산을 거의 못하였기에 겨울과 봄에 까딱하면 굶어 죽을 뻔했다.
다행히 가르칸 공화국에서 약속한 지원이 있었기에 문제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선 가르칸 공화국이 무상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은 오직 전략상 불태운 절반의 식량. 한데 문제라면 이제 이 식량을 자국 영지의 생산량에 맞춰 분배를 받은 귀족들이 본래라면 세금을 제하고 영지민에게 배분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자기 영지민에게 판매하는 식으로 풀어 버린 것이었다.
‘작년에 개판 된 거 봤지? 올해 세금 면제해 줄 테니, 대신 우리가 파는 식량을 사서 먹어라.’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조치. 당연히 영지민들 사이에선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에 추가로 전쟁의 패배, 항복 배상금, 죽은 병사와 기사들의 유족들을 위한 보상금을 비롯한 것으로 이유를 달아 버리고서 기사들로 하여금 항의하는 자들을 겁박하니 어쩔 수 없이 사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크는 빚까지 졌다면서? 그 상인 놈들이 지독할 텐데…….”
“그럼 어쩌겠습니까? 그 친구 아내가 막 출산을 했는데……. 애들이랑 아내는 잘 먹여야지요. 어쨌든 올해 세금 내고 남은 걸로 내면 어찌어찌 되겠다고 합니다.”
“나중에 좀 도와줘야겠어. 쯧쯔쯔…….”
그렇다 보니 몇몇 영지민들은 빚까지 내서 식량을 사 먹는 경우도 있었다.
하나 영지민들이 어떤 고통을 받든 간에 일단 본래 세금을 제하고 영지민에게 뿌려야 했던 식량을 유료로 판 만큼 영지의 재정은 조금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폭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작년 전쟁 중 잃은 식량은 전략상 보존해 주기로 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으로 발데리안 가문의 군대가 감히 전쟁터의 현장에서 추수를 해서 막장스럽게 빵을 구워 먹는 식으로 아주 제대로 엿을 먹였고, 마찬가지로 침략해 왔던 크멜 가문 군대와 제국 수도군 모두 머무는 동안에 상당한 민폐를 끼쳤기에 더 많은 양이 필요한데, 그것은 어떻게 했냐면 당연히 가르칸 공화국에서 빌린 것이었다.
“빌린 곡물도 당연히 되팔아야겠지?”
“그렇게 해야겠지요.”
“하지만 영지민들에게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닌가? 불안하군.”
“하나 식량을 사들인 대금을 지불하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전쟁 배상금을 죽은 병사와 기사들의 유족들에게 줘야 하고… 수도에 있는 가족에게도 그대로 보내야 하니…….”
바니로 백작가의 영향 내에 있는 귀족들은 이런 방법이 옳지 않고 영지민들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일단 작년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큰 타격이었고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영지도 있었으니, 그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가신들을 유지하기 어려웠기에 피와 살을 끊는 느낌으로 영지민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 히히히, 노이멀 총리가 다 알아서 하시오. 히히히.”
“명대로 하겠습니다.”
하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바니로 백작이었다.
가르칸 공화국에서 얻은 엘프 부인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색잡기에만 빠진 그는 이제 꼭두각시로 앉아 있어야 하는 회의조차도 나오지 않고 노이멀 총리에게 모든 걸 일임한 상태였고, 그녀는 영지와 귀족들의 회의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슬슬 추수철이니 빌려 준 곡물을 받아야겠군요. 하지만 시세가 작년 기준 2배 넘게 올랐는데, 그럼 2배의 양을 받든… 시세를 적용한 돈이든 뭐든 받을 테니 꼬옥~ 지불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운반비와 부대 비용도 같이 지불하는 거 잊지 마십시오. 저희가 이 나라에 가져올 때 들인 돈이 있으니 받는 건 합당합니다.”
물건의 시세란 상시 변하는 법. 노이멀 총리는 비아냥거림을 잔뜩 담은 어투로 바니로 백작의 성에 모인 귀족들에게 빚을 갚으라는 통보를 전했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그들은 책정되는 금액의 아찔함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돈으로도 받고, 곡물로도 받습니다. 또 만일 갚지 않거나 거부할 시엔 무력을 사용해서 추징을 해도 좋다고 바니로 백작님에게 허가도 받아 놓았습니다. 저희 군(軍)의 전투력에 대해선 작년 전쟁을 보신 분이라면 다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
“하, 하지만 그러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식량난에 시달릴 거요! 또 빚이라는 것은 꼭 올해 다 갚지 않고, 형편이 되는 대로 분할해서 내년 혹은 내후년으로 이관해서 이자를 늘려 받는 식으로 하면 노이멀 총리에게도 이익이지 않겠소?”
당연하지만 이대로 빚을 갚게 되면 또다시 작년 같은 식량난 혹은 재정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머리가 돌아가는 바니로 백작의 가신 중 하나가 매우 합리적인 의견을 노이멀 총리에게 제안했지만, 애초부터 합리적으로 이익을 늘리려는 게 아닌 노이멀 총리로서는 그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애당초 계약서에는 올해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얌전히 지불 기한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올해 갚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영지의 식량을 거두는데, 기존에 정해진 세금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추가적인 세금을 또 물려서 폭등한 시세와 추가 비용을 내게 된 것이었다.
참고로 작년에 식량을 사기 위해 빚을 내었던 평민들은 또 추가된 무거운 세금을 뜯기고 나니 작년보다는 나았지만 터무니없이 적은 양의 식량만 남게 되었다.
“아니! 이걸로 어떻게 또 올겨울을 나고 내년을 버티라고!”
“나… 나… 빚을 갚아야 하는데, 이거밖에 없어선 안 돼! 지금도 빚이 계속 불어나는데!”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너무합니다. 아무리 영주님이라지만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영지민들은 이 가혹한 처사에 항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사들의 전투력 앞에선 일반 백성들은 그저 벌레나 다름없었기에 금방 진압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부 영주들은 이 시점에서 노이멀 총리의 계략을 알아채고서 그녀가 부과한 빚을 갚는 것을 거부하고 또 재협상을 하고자 했지만, 이제 여기선 바니로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있기 위해 주둔하고 있는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가 활약하게 된다.
“빚을 갚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 및 반란을 일으키려던 오릴 남작, 유스티나 자작, 샬로엔 경의 목입니다, 총리님.”
싸움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전쟁이라곤 겪지도 않고, 훈련도 강하게 하지 않는 이 남부의 군대가 야만족과 싸워 철저히 단련된 크멜 가문의 군대, 가혹한 훈련을 받은 제국 수도군과 동시에 싸워도 지지 않던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에게 저항할 수 있을 리 없던 것이었다.
“수고했다. 내가 말한 대로 반역자는 모조리 죽였겠지?”
“예. 그들의 영지에 있던 인간들은 모조리 죽였고, 수급을 잘라서 탑을 쌓았습니다. 시신과 목을 한군데 모으니 피가 강처럼 흐르더군요. 아, 깃발은 바니로 백작가의 것을 꽂아 두었습니다.”
“좋아. 이걸로 바니로 백작가에 대한 충성심과 결속이 끊어지는 건 물론 ‘증오와 분노’가 쌓이겠지. 후후훗, 아주 만족스러워. 열등종이 죽어 나가는 모습은… 정말… 정말 최고야. 후후훗… 후후후훗…….”
이 살육을 행한 자신들은 가르칸 공화국 소속이지만, 모든 처형을 비롯한 가혹한 처분은 전부 바니로 백작가의 이름과 인장을 빌려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바니로 백작가로 쏠릴 것이다.
추가로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그녀의 증오와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예상한 대로 바니로 백작가를 장악한 노이멀 총리의 폭정으로 인해 바니로 백작가의 영향권에 있는 영지들은 모두 가혹하게 수탈을 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전국으로 흘러들어 가서 판매되어야 할 곡물들은 올해도 갈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