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은 말쑥한 복장을 한 희끗한 백발이 섞인 갈색 머리의 중년 남성으로, 옷차림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지만 금제 외눈 안경이라든가 손목에 슬쩍 보이는 세공된 시계와 반지가 돈 좀 만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 알리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소개를 먼저 했다.
“반갑습니다, 베오날드 님. 저는 오웰 상회의 라히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저희 오웰 상회는 주로 모험가 길드와 거래하면서 몬스터의 소재를 매입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베오날드 님께서는 최근 다양한 의뢰를 받아서 사냥하신 몬스터의 소재를 모험가 길드에 전혀 판매하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왔습니다.”
“딱히 무슨 일 없습니다. 피 한 방울, 심지어 내장에 가득 찬 배설물 하나까지 다 쓸 곳이 있는지라. 애초에 의뢰에 대한 보상만 받고, 소재를 처분하는 방법은 쓰는 자의 자유인데 말이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저희 상회에 특별한 수요가 생겼는데, 그것에 맞는 물건이 없어서요. 그런데 마침 베오날드 님에겐 그 물건들이 있으셔서 말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최근 베오날드가 얻고, 그들이 노릴 만한 물건이면 역시 근래에 실컷 사냥한 위험종 몬스터의 소재와 마정석일 것이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구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사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물건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상인들이 이렇게 직접 발품을 팔아 교섭에 나서는 경우가 있었다.
“그… 수요라는 건 다이나 왕국입니까?”
“…하, 하하하, 주요 고객의 정보를 발설하는 건 금기인지라.”
“긍정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애초부터 팔 생각도 없었지만, 발데리안 가문에 몸을 맡긴 처지라서 다이나 왕국엔 팔 수 없습니다.”
“으으음, 가격을 더 잘 쳐 드려도 말입니까? 저희로선 반드시 구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래서 상인이 싫다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분명히 의사를 밝혔는데도 계속 끈적끈적 달라붙어서 자신의 것을 노린다.
그렇다고 칼을 휘둘러서 배제할 수도 없고, 답답할 따름인 베오날드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면서 존대를 포기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어디 그 귓구멍을 한번 확 열어 줄까? 더러운 피와 귀지를 파내고 나면 아마~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못 알아들은 건 아닙니다. 하나 예상하신 대로 다이나 왕국의 문제가 좀 큽니다. 그쪽에서 마정석 수요가 너무나 많습니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마정석 매입을 독촉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희로선 죽을 맛입니다.”
“…뭐, 마법 변태 국가라고 들었으니 그렇겠지.”
“하지만 근래 갑자기 요구하는 양의 수준이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걸 충족시키는 건 그쪽 사정 아닌가? 이쪽도 마정석은 쓸 곳이 아주 많다. 더구나 말했다시피 발데리안 가문에 적을 둔 몸으로 다이나 왕국에 마정석을 판다? 치명적인 일이 되는 셈이지.”
돌아서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만 라히들이라는 상인은 이 시점에서 눈빛과 말투를 바꾸고는 베오날드에게 말했다.
“그래서 역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이나 왕국에선 마정석을 원하는데… 그게 이곳에 있지만 팔지 않는다? 어떻게 될까요?”
돈으로 사지 못한다면 직접 쳐들어와 빼앗을 수 있으니 팔라는 무언의 협박이었지만, 그런 것에 굴할 정도로 나약한 베오날드가 아니었다.
또한 여기서 팔기 시작하면 놈들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몬스터의 사냥과 마정석의 판매를 강요할 것이다.
“대강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팔지 않는다. 어차피 위험종 사냥도 교단과 서쪽 개발을 협의하지 않으면 이 이상 진행되지도 않는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하지만 ‘마법사’들의 원한을 사는 건 상당히 두려운 일이실 겁니다. 한순간에 머리 위에 마법이 떨어져서 모든 게 콰아앙~ 하고 사라질 수 있으니 말이죠.”
‘정말 우습군. 마탑의 기둥 중 하나였던 나에게 감히 마법에 대한 걸로 협박이라니…….’
피식.
이건 너무나 웃음을 참기 힘든 일이라 베오날드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에겐 마법이라는 것은 너무나 신비한 것이라서 이런 협박이 먹힐지 모르겠지만, 베오날드는 엄연히 대연금술사로서 마탑의 최상위 회의에도 참여한 몸이다.
더구나 술식 세공과 마도구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마법에 대한 지식은 어중간한 마법사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그에게 이런 협박은 너무나 같잖은 것이었다.
“뭐, 조심하도록 하지. 그럼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일이 많아서 말이지.”
“…그러지요.”
전혀 동요 하나 없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라히들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다이나 왕국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할 일을 짐작해 보았다.
‘그것들이 마법 실험을 하던 게 한둘이 아니니……. 아무튼 제대로 대비만 해 두면 문제없겠지. 마정석은 나도 써야 하니 말이야.’
마갑주의 프레임에 집어넣는 술식 세공에 있어 마정석은 필수 요소나 마찬가지이고, 다른 마도구를 어떻게든 만들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귀중한 것이다.
황금도 좋지만 결국 이 난세, 금고를 지킬 칼이 더 중요한 시대이다.
써먹을 역량이 없다면 팔아먹어도 좋겠지만, 베오날드에겐 이미 무수히 많은 사용법이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아무튼 다이나 왕국 놈들이 무언가 일으킨다는 건…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리고 다시 일이나…….’
우우웅!
다시 펜을 잡으려는 순간, 무언가 작게 공명하는 소리가 베오날드에게 들려왔다.
딸인 라라 폰 노이멀, 현재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인 그녀가 준 반지가 연락을 받고 진동한 것이었다.
베오날드는 즉시 문을 잠그고 딸아이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
“부르셨습니까?”
『…오랜만이군, 베오. 그래, 그쪽 상황은?』
“딱히 큰 변화 같은 건 없습니다. 일단 올해 식량 사정이 궁할 것을 예상해서 작년에 다양한 방법으로 비축을 해서 잘 넘긴 모습입니다. 다만 발데리안 가문에서 뭔가 이상한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위험종 몬스터의 사냥도 늘었고 말이죠.”
『으음, 위험종 몬스터의 사냥이라. 흐음…….』
‘신뢰를 주려면 정보를 풀어야 하는 법이지.’
일단 알려 줄 수 있는 투명한 정보들을 알려 주어서 신뢰를 쌓는다.
어차피 일개 병사의 입장으로 알려져 있으니 중요한 정보는 얻어다 주지 못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고, 노이멀 총리 또한 지금 이 베오라는 병사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교차 검증할 자료를 얻는 선에서 끝이었다.
틀린 정보만 주지 않으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편안한 구성. 오히려 베오날드 측이 떡밥을 던져서 정보를 얻기가 좋았다.
“그나저나… 그 ‘탈피의 무덤’ 쪽은 어떻게 되어 가십니까? 혹시 제가 도와 드릴 거라도 있으신지요?”
『음, 아직 없다. 지금은 이 영지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상황이니 말이야. 다만 아버님의 유산에 손을 쓰는지에 대해선 확인해 두고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
‘아,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군. 하나 감시한다니 이 정도만 해도 걱정 없겠지. 혹시나 내 이름이 크멜 가문에 퍼지진… 않았으려나?’
한 가지 둘러대고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베오날드라는 자가 크멜 공작을 구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차리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이었는데, 살짝 걱정되었지만 크게 우려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서로 이해했다곤 해도 크멜 가문의 수장이 발데리안 가문 사람에게 구해졌다는 걸 공공연히 떠들어 봐야 가문의 위신만 깎일 테니 적당히 얼버무릴 것이다.
‘또 정보란 여기저기 뿌려지면서 오염되기 마련이고, 설사 문책당해도… 그분의 것이니 그분의 이름을 댔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지.’
『아무튼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해라.』
“예! 모든 것은 위대한 노이멀 가문을 위해!”
그렇게 통신이 끊어지고, 제국으로선 머리 아프겠지만 베오날드로선 당분간 가르칸 공화국 쪽의 움직임과 ‘탈피의 무덤’ 쪽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 안도했다.
그리고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기에 최대한 번영을 해 놔야만 앞으로 큰 위기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다시 집중해서 이 싹트기 시작한 도시를 크게 키울 작업들을 재개했다.
***
그로부터 약 반년 뒤, 가을의 시기가 찾아왔다.
베오날드는 역시 자신이 제국 전체를 다스리던 시절의 내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며 빠르게 번영한 하이디의 영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큰 굴곡은 대략 비슷한 것으로 이미 베오날드가 전생에 대부분 겪어 본 사실들이었다.
‘일할 사람이 부족합니다!’
‘발데리안 영지를 비롯해서 주변 영지에 구인 광고를 넣어라. 보수를 지급하면 어차피 다른 영지의 귀족분들에게 세금이 될 거니까 그분들에게도 문제없을 거다.’
‘농번기라 손에 한계가 있는데요?’
‘용병이라도 고용해라. 어차피 주요 몬스터들은 우리가 쓸어서 일거리가 없어 난리겠지. 아니면 범죄자들도 동원하고… 아! 산적들을 잡아 오라는 의뢰도 좋겠군. 인력이 필요하니 말이지. 노예 구매도 적극적으로 고려하도록.’
악독하기로 명성을 떨치던 위험종 몬스터들을 서쪽으로 몰아낸 뒤 안정화를 위해 그 아래의 포식자들을 사냥하다 보니 용병들과 모험가들의 의뢰가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일거리를 빼앗긴 그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려고 할 정도였지만, 마침 도시 번영을 위한 일손이 부족해서 일자리가 많아지니 굳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거의 0이나 다름없는 작은 마을이다 보니 오히려 깔끔하게 재설계해서 만들기 쉽군.’
그리고 여기서 베오날드는 베노피스라는 영지를 만들면서 쌓은 도시 설계의 노하우를 마음껏 뽐내었다.
벨릭스의 흔적이 남은 도시를 떠나고 싶어서 만든 자신만의 도시! 자신의 작품이었던 ‘베노피스’를 수십 년간 만든 내공은 즉시 발휘되어 도시의 청사진까지 만들었다.
단순히 그냥 있는 그대로 확장해서 규모만 큰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기 좋고 번영한 도시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하나 모든 것이 잘 굴러간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자네는 대체 정체가 뭔가?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건가?”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지식을 넘어선 것을 보게 되면 충격과 공포에 빠지곤 한다.
발데리안 백작은 고작 몇 달 만에 그가 이루어 낸 것을 보면서 처음엔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기에 안색이 파래지는 건 물론 마치 괴물을 마주한 것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별거 아닌데 말이죠.”
“저게! 저게 어떻게 별거 아니란 말인가?”
그는 오랜만에 베오날드가 이룬 성과를 확인하고 그를 치하하기 위해 왔는데, 와 보니 현실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고작 작은 농지만이 있던 마을은 어느새 도시의 분위기가 생겨났고, 발데리안 영지와 연결된 길도 깔끔하게 닦인 건 물론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게 제 재능인 거겠지요. 그리고… 어디 없는 걸 가지고 만든 것도 아니고, 다 있는 걸로 만들었는데… 뭐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
“사실 위기는 몇 번 있었습니다. 인력 수급이라든가, 갑자기 재화와 부가 쌓여서 시샘하는 다른 귀족들이라든가, 일거리를 잃은 모험가들의 반발이라든가. 하나 모두 다 백작님의 비호 덕분에 이런 성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올해 이 영지의 세금 예측량은 아마… 이 정도?”
“놀라움이 멈추질 않는군. 자네가 악마로 보일 지경이네. 아니, 대체… 이 정도면…….”
발데리안 백작의 얼굴과 등에선 지금 식은땀이 잔뜩 흘러내렸다.
잘난 부하를 가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건 도가 너무 지나치다.
5년, 10년에 걸쳐 차근차근 만들어 냈다면 모를까? 이건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언제나 지배자들이 그렇듯 너무나 뛰어나서 발데리안 가문의 자리를 빼앗을지 모르는 부하를 밑에 두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는 여기서 베오날드를 살려 두어야 하나 갈등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음, 귀족이라면 당연히 품어야 하는 고뇌지만 너무 티를 내니까 어처구니가 없네. 본래라면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웃음으로 감추고 뒤통수에 칼을 찔러야 하거늘~ 역시 천성이 기사라서 그런가?’
그리고 베오날드 또한 그런 발데리안 백작의 훤히 보이는 속을 보며 조금은 그의 배포를 기대했던 것을 실망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