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어떤… 방법인가?”
“먼저 발데리안 가문의 유적을 다시 확보해야 합니다. 교단이 지키는 그곳… 결국 사람이 있어야 지키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 식량 대란을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명분은 그곳의 유물도 꺼내고, 그곳을 거점으로 만들어서 서쪽으로 확장해 나간다고 하는 겁니다.”
“확장?”
“예. 엄연히 발데리안의 영향권엔 바다가 들어가 있지만 서쪽의 숲에 위험종 몬스터들이 다수 살고 있어서 개척해 나가는 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있지요. ‘블랙 드레이크’를 잡은 것에서 보셨다시피 ‘마갑주’의 전투력은 서쪽 개발에 매우 유용합니다.”
기존엔 병사와 기사들, 모험가들을 다수 투입해서 위험한 싸움을 해야 했지만, 마갑주로 인해서 대형 위험종 몬스터를 잡을 가능성과 생존율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것을 지적하며 기존에 들어가지 못했던 서쪽을 개발하자고 한 것이었다.
“호오?”
“그리고 지금 이 유적은 이제 서쪽 영지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로 매우 적절합니다. 파괴되었다곤 해도 쓰이던 석재라든가, 터가 고르게 다져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명분으로 교단과 협상을 하는 거지요.”
“협상? 그게 가능하겠나? 그곳이 금지된 영역이 된 지는 백 년도 넘었다네.”
“그러니 지금 식량 대란이 기회이지요. 종교란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끌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평온하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혼란이 오기 시작하고, 굶주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게 신앙심이죠.”
전생에도 그랬다.
여신이 내리는 기적이 실제로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배부르고 등 따실 때만 순순히 종교를 믿지,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그저 폭력과 폭주를 부채질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여신교의 기적으로 병은 고치지만, 기도로는 빵을 만들 수 없다.
물론 이런 식량 대란이 또 역으로 포교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대륙 전체가 식량난을 겪게 되면 이건 또 다른 레벨의 이야기다.
대륙 전체 레벨로 식량 대란에 기아가 발생하게 되어 모두가 굶주리면 여신이든 마신이든, 배만 부르게 해 주면 절대신이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베오날드의 인식 속에서 종교란 결국 규모가 큰 광대놀음이나 다름없었다.
‘여신이 실존한다는 걸 알아도… 원래 인식이 그리 바뀌진 않는군.’
“으음… 즉, 우리가 비축해 놓은 식량으로 베팅을 해야 한다는 거군. 가장 식량의 가치가 오른 시점에… 교단에서 위기감을 겪는 순간에 말이지?”
교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교단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우선이지 민중 구제가 우선은 아니다.
하지만 교단의 세력이 줄어들 것 같은 때엔 민중 구제를 하면서 더욱 교세를 강화할 수 있기에 바로 그 시기에 식량을 미끼로 교단과 협상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해가 빠르시니 정말 감탄이 나옵니다. 하지만 적어도 경작에 들이는 비용보다는 적게 들 가능성이 높지요. 그리고… 식량의 가치가 오르는 건 바니로 백작가의 그 곡창 지대에서 식량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질 즈음이니, 올해 겨울쯤이 되겠군요.”
“으으음, 그동안 우리는 먼저 대비를 해서 더 많이 비축을 하고?”
“서쪽 사냥을 미리미리 진행하면서 우리가 유적보단 서쪽의 숲과 산을 개발하려고 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지요. 그럴싸한 계획 아닌지요? 뭐, 유물 때문이라는 걸 눈치채도 어떻습니까? 가문의 보물이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둘러대기도 좋지요.”
“으으으음…….”
오스왈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베오날드의 의견은 확실히 좋은 것이었지만, 다소 위험 부담도 있었다.
결국 여신교에 설득이 될 정도의 엄청난 양의 식량을 바쳐야 한다는 건데, 이런 결정을 자신이 혼자 내리기엔 너무나 부담이 컸던 것이다.
“물론 백작님의 재가를 받고 하는 게 좋겠지요? 시간이 있으니…….”
“그렇지! 암, 형님의 이야기도 들어야겠지. 하하하, 그럼 바로 전갈을 보내겠네. 긴밀한 거니… 가문에 내려오는 암호로 써야겠군.”
“예, 그러십시오.”
오스왈드는 일단 백작의 재가를 받기로 하고는 즉시 비밀 서찰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백작의 답장이 오면 알려 달라고 말하고는 이번엔 백작가의 업무실로 향했다.
그곳은 백작가의 가신들과 관리들이 모여서 업무를 진행하는 곳으로, 이 영지의 행정적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오, 베오날드 님 아니신가? 오스왈드 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베오날드에게 말을 걸어온 자는 발데리안 가문의 행정관 중 한 명인 라인크레트 남작이었다. 그는 40대의 남성으로 마른 체격에 안경을 쓰고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학구적인 인상을 가진 이였다.
제국 아카데미 출신으로 어언 15년가량을 발데리안 가문에서 일해 온 그는 오랜 관료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들은 보통 굴러들어 온 돌인 베오날드를 꺼리며 배척하기 마련이었지만, 나름 아카데미 출신에 검술까지 상급 기사 역량이고, 마도구 제작, 실제 전공까지 세워서 입지를 얻고 들어온 자이다 보니 도저히 텃세나 압박은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었고, 오히려 이들이 눈치를 보는 처지였다.
“식량 대란이 연장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몬스터 사냥을 늘리고, 서쪽 지역 개발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런가? 잠깐, 식량 대란이 연장된다고? 바니로 백작가의 올해 농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게 가르칸 공화국이 노리는 것이지요. 제국 전체를 뒤흔들려고 하는 걸 겁니다. 아무튼 저는 케드론 도련님과 상의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 사실을 영지 내에 알리는 것도 좋겠지요.”
“아, 알았네.”
분명 신입은 베오날드였지만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누가 상전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나 자신은 남작이지만 검에 재능이 전혀 없어서 지금 발데리안 가문의 비호 아래에서 귀족의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베오날드는 그 발데리안 가문의 총애를 받는 자였기에 그의 명령 아닌 명령을 이행하러 다른 관리들에게 향했다.
“도련님, 접니다. 오스왈드 영주 대리님과 이야기를 하고 왔습니다.”
“오? 그런가?”
내려온 베오날드가 본 케드론은 현재 마갑주를 벗고 검의 수련을 하면서 가보인 방패를 사용하는 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는 베오날드를 보자마자 검과 방패를 내리고 다가와서는 위에서 상의했던 내용에 대해 베오날드에게서 다시 한번 더 들었다.
“으음, 그렇군. 그래서… 나에게 온 것은?”
“이제 봄이니, 몬스터들도 그렇고 생물들이 활동할 시기입니다. 사냥 팀을 꾸리죠. 마갑주가 2대고, 역시 실전에서 개선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또 훈련도 되고 말이죠.”
“오오… 그거 나쁘지 않군. 게다가 위험종 몬스터들은 가만히 놔두면 위험하니 말이야.”
“거기에 우리에겐 ‘알테리오’가 있습니다.”
포식자 계열 몬스터로선 인간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는 한 건드릴 필요가 없는 존재였지만, 그리폰은 알다시피 같은 포식자로서 생존권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 다툼과 먹잇감을 공유하는 라이벌이다.
‘블랙 드레이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의 영역에 가서 울어 주기만 하면 그 지역에 사는 위험종 몬스터들은 눈이 시뻘개져서 알아서 달려올 것이다.
“특히나 동면을 하다가 봄에 깨어난 놈들의 경우 배가 고픈데, 자기 영역의 먹잇감을 노리는 침략자가 나타나면 그야말로 사생결단으로 달려들게 됩니다. 그것만 주의하면 됩니다. 내일쯤 가도록 하죠. 저는 곧장 모험가 길드로 가서 의뢰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으음, 그거 좋군. 식량도 구하고, 훈련도 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군. 그럼 나는 갈 병사와 기사들을 추려 보겠네. 좋은 경험도 되겠군.”
“예. 너무 많아도 좋지 않으니 적당한 숫자로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걱정 말게.”
그렇게 케드론은 몬스터 사냥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준비를 하러 기사단이 있는 병영으로 향했고, 베오날드는 곧바로 몬스터의 분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영지 도심에 있는 모험가 길드로 향한다.
나름 대귀족인 발데리안 가문이 지배하는 도시는 황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캘러메인 백작가의 도시보다는 번영한 모습이었고, 잘 정비된 도로와 하수도를 가지고 있어 훨씬 깔끔했다.
‘음, 이제 슬슬 익숙해져서 그런가? 과거의 풍경이 더 이상 보이질 않는군.’
같은 발데리안 백작가의 도시였지만 베오날드에겐 500년 전과 지금으로 나눠진 2개의 도시였다.
그리고 본래 500년 전의 풍경이 더 먼저 눈에 아른거리곤 했는데, 이제는 과거의 광경은 머릿속에서 떠올려야 보이게 될 정도로 이 현실에 익숙해진 것을 느끼며 베오날드는 모험가 길드에 도달했다.
“어서 오세요? 어머! 혹시 드레이크 슬레이어 님 아니세요?”
“그런 기이한 호칭으로 불린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오자마자 모험가 길드의 여직원이 호들갑을 떠는 것에 그는 기이하다는 시선을 보냈는데, 그녀는 책자 하나를 가져와서 베오날드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그것은 블랙 드레이크를 잡은 것을 인정했다는 모험가 길드의 공식 서류였고, 거기엔 베오날드가 했던 사인이 있었다.
“아, 이거 말이군. 하지만 이런 칭호를 난 받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게다가 의뢰는 성공적으로 했고, 보수는 받았으니 끝난 이야기 아닌가?”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서……. 블랙 드레이크 정도의 마물이면 저희 발데리안 지부에 있어서도 엄청난 성과이고, 제국 수도에 있는 길드 본부에서도 난리가 날 이야기이거든요. 전쟁 중에 이미 토벌의 증거는 수도의 본부로 보내서 입증이 끝났지만, 그… 어떻게 잡으신 건지에 대한 사정 청취가 안 끝나서… 그러니까…….”
“즉, 어떻게 잡았는지 알려 달라?”
“예. 본부에서도 이걸 어떻게 3명이서 잡느냐고 당혹스러워하는 눈치라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상관없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험가에게 있어 사냥 노하우를 알려 달라는 말은 마법사의 주문 술식과 기사 가문의 마나 호흡법과 검술을 알려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마갑주에 관해선 되도록 외부로 유출하고 싶지 않은 베오날드였다.
더 좋은 무기나 병기에 관해서 누구 하나가 돌출이 되면 주목받게 되고, 그것을 누구나 경계하게 되는 건 일반적인 상식이다.
게다가 바로 위에 마법이라는 요소에 미친 다이나 왕국이 있기에 그놈들이 마갑주에 대해서 들으면 분명 미쳐서 내려올 게 뻔했으니 감춰야만 했다.
“아, 그렇긴 해도… 최소한의 합당한 설명이 있어야 해서…….”
“정 그렇다면 그리폰을 이용한 포식자의 영역에 대한 이론으로 미끼를 구축하고 적절한 함정을 이용했다고 전하게. 이른바 전략과 전술의 승리지. 아무튼 여기 있는 의뢰서, 가져가도 되나?”
“아! 예.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여기… 랜드 드레이크로 하지. 드레이크의 가죽을 좀 더 구하고 싶거든.”
“원하시면 다른 지역에서 잡은 것을 구매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아마 운송비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가격이겠지. 그리고 구한다고 해도 가죽 크기도 작을 테고 말이야. 됐네. 직접 사냥해서 구하는 게 수지가 맞는 장사이지. 그럼 이만.”
“아, 안녕히 가십시오!”
직원의 인사를 들으며 의뢰서만 챙기고 빠르게 나오는데, 베오날드는 문득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
하나 눈치챈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일단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저택으로 돌아가며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확실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으음, 감히 발데리안 영지에서 이런 간 큰 행동을 할 놈은 거의 없는데 말이지.’
아래에 있는 귀족들에 대해서 싹 검토했지만 발데리안 가문에 거역하거나 반항할 기미를 보이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일단 무력도 무력이고, 모두 다 같이 다이나 왕국에 한 번 크게 당했던 지역이다 보니 ‘타도 다이나!’라는 큰 목표를 위해 뭉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앙에서는 지금 나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을 테고.’
그 황제라면 충분히 장기적인 식량 대란의 흐름을 읽고 있을 것이고, 크멜 가문은 지금도 계속 내려와서 전쟁을 거는 볼레아 왕국의 약탈자들과 싸우느라 바쁜 처지다.
그럼 남은 건 어디인가? 소거법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결정 나게 된다.
바로 이 발데리안 영지가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국가, 다이나 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