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52화 (152/259)

[152화]

며칠 뒤, 발데리안 영지 저택.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워 영지를 받은 하이디는 영지의 파악과 자신들의 보금자리 건설을 위해 셀리나, 베시아, 알테리오를 데리고 떠난 가운데, 베오날드는 세인에게 마갑주 제작을 하던 공방을 지키는 일을 맡기고서 드디어 발데리안 저택에 손님이 아닌 그 구성원으로서 출근하게 되었다.

“이제 자네는 정식으로 발데리안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네. 그동안 손님 대접받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걸세, 라고 말하고 싶지만… 재상으로 삼으라는 백작님의 명도 있었고, 또 우리 가문에서 갚지 못할 빚이 있으니 그것참 난감하게 되었군.”

“오랫동안 가주님을 대신해서 이 영지를 지키신 오스왈드 님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또 맡은 바가 있으니 말이죠. 우선은 케드론 도련님의 마갑주 제작이 먼저인지라. 그쪽을 하면서 발데리안 영지에 대해 파악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허허, 내가 뭐 따로 지도할 게 없구먼.”

오스왈드가 따로 사람을 붙이거나 알려 줄 것 없이 그는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는 중이었다.

이미 백작에게 받은 일도 있고, 영지에 대해 파악하겠다고 하니 따로 손댈 게 없었기에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맞이했고, 베오날드 또한 지금 바로 뭘 하겠다고 설칠 게 아니라 귀족들의 연명부를 보며 이름을 외우고 영지 위치를 대조하면서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보자… 백작님 아래로 영지를 가진 귀족이… 백작 한 명, 남작 3명, 자작과 기사 합쳐서 8명. 총 12명이군. 물론 여기 기사의 한 명은 하이디군. 그때의 공이 어지간히 컸겠지.’

그렇게 귀족 가문들의 구조를 파악하면서 베오날드는 또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발데리안 영지 내부에 있는 자신의 유산이 잠든 ‘유적’, 그것을 되찾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여신교의 교단’이 관리하는 그곳을 손에 넣고 싶은 베오날드. 여러모로 고민을 했지만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여신은… 실존한다는 걸 체험까지 하고 왔으니 참 이게 난감한 일이군.’

전생에도 교단과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만큼 베오날드는 이번 생에선 어릴 때 세례를 받거나 부모 손에 이끌려 간 것을 제외하고는 신전에 거의 가지 않았다.

아, 그나마 추가한다면 세인을 위해 그녀의 모친의 무덤을 보러 갔을 때 정도가 끝이었다.

그 정도로 교단과는 거리를 둔 베오날드였는데, 막상 여신이 실존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으음, 한번 가 보긴 해야 하나? 아니, 내가 먼저 가는 건 별로 성미에 맞지 않아.’

자신이 먼저 교단에 가서 교섭을 시작하면 그들은 자신이 노리는 그 유적에 대해 뭔가 수상함을 느끼거나 거기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가는 것은 안 된다.

그들이 스스로 교환할 게 없어서 바치는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쓸 수 있는 것이 식량 문제뿐인가?’

“겨울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식량 수급에 나서야 하네! 빨리 야산 채집, 사냥!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게!”

‘다들 바쁘군. 하긴 내년 추수까지 식량난은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야.’

제국의 곡창 지대였던 바니로 백작가의 영지가 이번 전쟁으로 개판이 나 버린 상황. 전쟁이 끝난 뒤에 마저 추수했지만 그 양은 작년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었다.

물론 농업을 바니로 백작가 측만 하는 게 아니라 제국의 모든 영토에서도 하긴 하지만, 제국 전체에 풍요롭게 공급해 주던 곡창 지대의 농사가 망했으니 제국 전역의 식량 경제가 요동칠 건 뻔한 사실이었다.

“망할 상인 놈들, 벌써 물류를 통제하기 시작했군.”

“심지어 평민들에게 2배, 3배의 가격을 제시해서 매점매석까지 일삼고 있답니다.”

“이 멍청한 무지렁이들 같으니! 그러면 내년에 4배, 5배 더 비싼 가격에 되사게 될 거라는 걸 모르나?”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멍청한 거지.’

옆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은 베오날드는 지당한 평가를 하면서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평민들에게 교육을 시키면 반란 염려가 일어난다고 아예 시키지 않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최소한 사회의 톱니바퀴로 쓸 정도의 교육을 시키면 효율이 좋다는 쪽이었다.

과거 500년 전, 베노피스에서는 9세에서 15세까지 모든 아이들이 의무 교육을 받았었고, 산수, 역사, 글자의 읽고 쓰기 등등… 고급 지식은 아니어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레벨의 교육은 시킨 것이었다.

‘발데리안 가문에도 그러라고 시켰었는데… 쩝, 제안할 게 더 많아지겠군. 아무튼 식량 문제라. 교단도 나름 스스로 농사를 지었었지만 그런 건 한적한 시골에 박혀 있는 곳이나 그럴 뿐, 든든한 귀족 후원자가 있는 곳의 교단은 그런 게 전혀 없지. 아무튼 지금은 식량 문제는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예정된 것을 알고 미리 대비하면 내년 추수 때까지 버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영지에서 자급하는 식량도 있고, 지금 벌써 군대와 영지민들을 최대한 동원해서 사냥과 채집에 나서서 보존식을 늘리고 있는 상황. 인류는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하나 베오날드가 걱정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문제는 바니로 백작가의 실권을 잡은 가르칸 공화국이… 내년에 나오는 식량을 무기로 삼아서 시장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면?’

당장 다들 내년만 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완벽한 뒤통수를 맞게 되고, 향후 몇 년간은 가르칸 공화국에 식량 경제가 종속되는 사태가 예상되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자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최소한 이성적인 생각만 하는 황제도 이런 생각이 머리에 닿아 있겠지.

‘하나 결국은 무능하게 당하게 되겠지. 이게… 농업은 단기간에 되는 게 아니고, 또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으면 무력하니까…….’

결국 농업은 1년 단위 사업으로 단기간에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전란의 시기. 전략, 전술 같은 것을 연구하는 이들은 있어도 농업에 그 기력을 많이 투자하는 국가는 없다.

그러니 가르칸 공화국에 있는 자신의 딸, 노이멀 총리는 그것을 알고 바니로 백작가를 노렸고, 전략상 승리를 거둔 것일 터였다.

‘그리고 아마… 이 식량 문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의 혼란과 내전을 초래하려는 거겠지.’

언제나 민중의 분노는 배고픔과 굶주림에서 시작되곤 한다.

이유는 상관없다.

이상 기후로 인한 대기근이든 갑자기 발생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역병이든 결국 사는 것에 지장이 생기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다시 짐승의 영역으로 돌아가서 투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임무가 그걸 막는 거겠지. 후우우~ 하긴 내가 아니면 못 막을 일이군.’

확실히 이런 일은 그 어떤 용사나 영웅이나 마법사가 내려와도 막기가 힘들다.

알아차린 시점에서 기껏해야 한두 번의 기적을 만들어서 몇몇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겠지만, 정책과 방안, 운영을 통해서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 한 번 전성기를 자신의 손으로 일구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겪고 또 특수한 시설들과 유산들을 대륙에 잔뜩 만들어 놓은 베오날드뿐이리라.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위치에다 만들었군. …알의 둥지. 500년 전의 나에게 또 한 번 감사를 해야 할 지경이야.’

‘알의 둥지’. 발데리안 영지에 있는 자신의 시설로 그것이 있는 것은 탈피의 무덤에 갔을 때 이미 확인했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난리는 그곳을 손에 넣으면 한 방에 해결될 일. 베오날드는 자신이 가진 패를 확인하고, 교단과 협상을 할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발데리안 가문도 결국 ‘이름 없는 간신’이었던 자신의 계통이라서 교단과는 사이가 안 좋으니, 우려할 것 없다고 생각하며 그 시간이 오길 기다린다.

***

가르칸 공화국, 아그리셸 성.

인간을 제외한 여러 종족들이 연합해서 살아가는 가르칸 공화국의 중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래전 인간이 지은 건물이었다.

과거 통일 제국 시절에 지어진 이 건물은 남쪽 샤남의 침략과 원정을 위한 기지로 지어진 것이라 매우 거대하고 튼튼한 요새였는데, 그런 면에서 쓸모가 있다곤 하나 이종족들이 뭉친 가르칸 공화국 국민들이 이곳을 납득하는 것은 바로 노이멀 총리의 압박이 있어서였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라. 비밀 통신을 할 것이니 말이다.”

“예, 총리님.”

그리고 총리실에 있던 그녀는 자신을 보좌하는 엘프 기사들과 수행원들을 내보낸 뒤 혼자 총리실 안에 있는 별실로 들어가서는 한 번 더 문을 잠그고 결계까지 쳤다.

그다음 모든 커튼을 내려서 빛을 차단하고 가운데에 있는 마법진을 활성화시키자, 그 위로 붉은 마력의 빛이 인간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늙고 주름이 많은 노인의 형상이었는데, 그다음으로 그려지는 형상들은 인간에게 본래 없는 기관들인 날개나 거대한 뿔이 하나둘 달린 것들로 그들은 가만히 있고 노인의 형상이 움직이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제시간에 맞춰서 왔군, 노이멀 총리.』

“보고엔 늦을 순 없으니 말이지. 대주교.”

그녀가 말하는 대상은 암흑신교의 대주교로 지금 대륙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암흑신교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좋은 태도다. 그래서 성과는?』

“예정대로 ‘바니로 백작가’를 손에 넣었다. 후훗, 이제 제국의 식량 경제는 내 손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이지. 올해는 작년 생산분이 있지만 내년부터… 식량 시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고, 내내년과 내후년엔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저 멍청이들은 아마 전쟁으로 인해 생산량이 떨어져 내년만 버티면 될 거라 여기고 있겠지만 말이야. 후후훗.”

베오날드가 예상하던 대로 노이멀 총리는 내년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제국의 식량난을 가속화시킬 생각이었다.

방법은 아주 쉬운 것으로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바니로 백작가의 식량 사정을 도와준다고 약속했는데, 절반은 지원하지만 그 이상은 판매하기로 한 만큼 그 판매분에 대해서 내년에 올라간 식량 시세대로 받아서 챙겨 가게 되면 내년에도 식량의 시세는 계속 오를 것이다.

“아무튼 이걸로 예정대로 남부에 분노와 혼란을 일으킬 준비는 마친 거나 다름없다. 식량 사정이라는 것은 결국 1년 단위 사업이며, 대체할 식량을 준비하려고 해 봐야 터무니없이 부족하거나 영양의 불균형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지.”

『그리고 굶주린 백성들은 결국 분노를 토할 거고, 제국은 분열해서 서로 싸우겠지. 껄껄껄. 그렇게 되면 지금 잠들어 계신 마왕님을 다시 깨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분의 수하들도 모두 일어나서 다시 이 세상을 분노로 뒤덮겠지.』

“하루라도 빨리 마왕님께서 깨어나셨으면 좋겠군. 그때…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신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말이야.”

마왕이 강림한 것은 약 400년 전으로 분열되어 치열한 내전으로 수십 년간 단 하루도 전쟁이 끊이질 않던 시기, 세력이 극히 미미했던 암흑신교의 세력들이 이 호기를 노려 수많은 영혼들과 시체를 수집하고, 제물로 바쳐 ‘분노의 마왕’을 강림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끝없는 분노 앞에 모조리 사라져라!’

‘분노의 마왕’. 증오와 분노를 양식으로 삼는 이 마왕은 강림하자마자 단 10년 만에 대륙의 북쪽부터 시작해서 3분의 1을 초토화시키고, 무서운 기세로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시체의 산, 피의 강을 만들었다. 그 광경은 내전과 어리석음으로 고향과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은 노이멀 총리에겐 속이 시원한 사이다 같은 광경이었던 것이다.

“멍청이들이 갑자기 뭉쳐서 저항을 하다니…….”

그리고 그제야 내전을 벌이던 인간 세력들은 허둥지둥 화해와 협정을 맺기 시작, 지금의 국가 형태로 굳어지고 난 뒤 합동으로 마왕에게 대항하기 시작했고, 여신이 투입한 용사와 영웅들에 의해서 간신히 그에게 상처를 입혀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분노와 증오를 모아라. 그때… 나는…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강림한 ‘분노의 마왕’은 현재 큰 상처를 입고 잠든 상태. 암흑신의 교도들과 남은 마족들은 마왕의 부활에 필요한 ‘분노와 증오’를 모으기 위해 내전을 만들어야 했는데, 마족들과 암흑신교들이 대놓고 나서면 인간들은 서로 안 싸우고 똘똘 뭉치려고 하기에 일단 평화를 위장한 채 오랫동안 암약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제국 내전의 틀은 잡혔다. 몇 년만 지나면 큰 불길이 솟을 거다. 대주교.”

『껄껄, 역시 그 전설의 노이멀 가문의 일원다워. 수완이 아주 좋아. 다이나, 볼레아, 한에 이어서 제국과 교단까지……. 모든 곳에서 그분을 부활시키기 위한 작업이 아주 순조롭군그래.』

“하지만 또 방해자가 나타날 수 있을 텐데?”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늘 그렇듯 여신은… 움직이는 게 느린 게으름뱅이 년이지. 껄껄껄. 게다가 교단도 우리 친구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걱정 말게. 용사가 나타나면… 우리가 먼저 손을 쓸 테니 말이야. 아무튼 계속 수고해 주게.』

“흥, 말하지 않아도 그리할 거다. 아, 맞다. 혹시 교단 쪽에 잠입한 자와 볼레아 왕국에 연락 하나를 넣어 줄 수 있나?”

『음? 뭐지?』

“우리 가문의 유산이 크멜 가문의 영지, 할데온에 있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선 성국에 있는 교단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에 최소한 손대지 못하게 압력을 넣어라. 알았나? 나중에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반드시 막아라.”

『알았다. 누구 부탁인데. 위대한 마왕님의 부활을 위해 300년 넘게 일해 준 노이멀 총리의 부탁 아닌가? 암, 해 드려야지. 내 바로 전갈을 넣지. 그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니 말이야. 껄껄껄!』

대주교는 크게 웃으면서 걱정 말라는 투로 노이멀 총리에게 말했다.

현재 여신교의 교단은 내부 상황이 매우 개판으로 500년 전부터 부패했던 파벌들이 아직도 청소가 안 되어서 교단 내부에 암적인 존재로 자리를 잡은 덕분에 암흑신교의 첩자들이 쉽게 잠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500년간, 그 안으로 잠입한 수가 많아져서 이젠 그들의 파벌을 물려받은 거나 마찬가지인지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 파벌을 움직여서 여신교의 교단을 주무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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