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그래도 저는 노이멀의 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 분명 저 같은 필멸자가 모르는 큰 뜻이 있겠지요.”
그리고 나름 대귀족 안에서 하위 귀족 생활도 해 봤던 베오날드는 이런 더러운 상황을 참고 넘어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 지금 그녀가 암흑신과 손잡은 것에 대해서 말리려고 한들 바뀔 리가 없는 것이었고, 또한 마탑에서 악마와 거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운 적이 있으므로 쉽게 들쑤셔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기에 일단 지금은 참고 또 참는다.
“그래, 처신은 할 줄 아나 보구나. 후후훗.”
‘…저 진한 오러의 기운. 필시 나보다 노이멀식을 더 단련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크멜 공작에게 비겁한 수를 썼다곤 하나 싸워 볼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나보다 우위이지만 말이야.’
눈앞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보랏빛 오러를 보고 베오날드는 그녀의 경지를 짐작했다.
아마 500년간 여러 방법을 강구하면서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필사적으로 연마했고, 지금 자신보다 더 강한 경지에 오른 게 확실하기도 했으니 어설픈 감정에 휩쓸렸으면 당장이라도 목이 달아났으리라.
“좋아, 그렇다면 앞으로 연락할 수단이 필요하겠지. 전갈이나 사람을 오고 가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이 있다. 자, 받거라.”
“이것은…….”
라라 폰 노이멀이 던진 것은 작은 반지로 보석 대신 마정석이 박혀 있었는데, 안에는 술식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마도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곧바로 눈치챘다.
‘전음의 반지군.’
“전음의 반지다. 본래 한 쌍인 물건으로 착용자끼리 먼 곳에서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베노피스 시절의 유물이다. 아버님이 대륙을 지배할 때 사용하셨던 것이지. 다만 그 박혀 있는 마석에 마력을 채워야 사용이 되는 것이니 충전하는 것을 잊지 마라. 금속으로 된 상자 안에 마정석을 같이 넣어 두면 자연스럽게 반지가 마력을 빨아들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것은 베오날드에겐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르칸 공화국과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이 페이크 정보를 줘서 움직이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게 반지를 받은 베오날드는 즉시 껴 보았다.
“좋아. 그리고… 혹시 원하는 게 있느냐? 중요한 정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 러면 자금을 좀 부탁드립니다. 자금이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또 유적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활동 자금이라는 건가? 좋다. 기꺼이 내주지. 하나 날 실망시키지 마라. 알았나?”
“명대로 하겠습니다!”
잠시 후, 라라 폰 노이멀은 금화가 든 주머니를 베오날드에게 던져 주었다.
주머니 안을 확인하자 백금화들이 번쩍이며 그를 반겨 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은 액수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자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을 듣질 못했구나.”
“아! 그게… 그… 베오라고 합니다.”
“베오인가? 그렇군.”
‘…내가 생각한 거지만 너무 조잡한 이름이었군. 하지만 먹혀서 다행이야.’
베오날드의 앞 두 글자를 딴 이름. 급조해서 둘러댔지만 먹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럴싸한 이름인 덕에 노이멀 총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넘어간 듯했다.
“그,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 잠깐만.”
이제 보수까지 받았으니 슬슬 몸을 빼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를 갖추고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갑자기 진한 살기가 그의 몸을 찌를 듯이 전해져 왔다.
베오날드는 순간 그녀가 부르는 말에 놀랐지만 최대한 동요하지 않은 척하며 돌아보는데, 그녀가 아까 전 무난한 분위기와 다르게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뭔가… 눈치챈 건가?’
“마지막으로 하나 전하지. 다시는 ‘라라’라고 하는 내 이름을 입에 담지 말도록. 그건 오로지 나의 아버님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몰랐을 테니 이번엔 넘어간다만, 한 번만 더 그런 무례를 범할 시 용서는 없을 줄 알아라. 알았나?”
“예, 예! 알겠습니다.”
다행히 뭔가 다른 게 아니라 호칭 문제였다는 것을 안 베오날드는 비굴하게 허리를 연신 숙이면서 텐트를 벗어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약 500년 만에 딸과 재회한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으로 인해서 머리가 복잡해진 베오날드였다.
***
항복 협정 회담은 그 뒤로 4일이 지난 뒤에야 끝났다.
협정 내용은 우선 바니로 백작가에 대한 가르칸 공화국의 간섭은 유지되는 걸로 결론이 났지만, 대신에 바니로 백작가의 자산에서 상당한 금액을 크멜 가문, 발데리안 가문, 제국 황실에 배상하는 것과 이후 세금 납부를 확실히 하겠다는 서명을 받는 조건으로 양측이 간신히 합의하면서 이번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휴우~ 아주 길어지지 않아서 다행일세. 겨울에 전쟁할 걸 생각하니… 어우우~”
“사실 전쟁은 겨울보다는 봄이 더 끔찍하지요.”
파종을 하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인데, 이때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건 그 한 해의 생산량이 뚝 떨어지는 것을 각오하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의 규모를 줄인다면 나름 소수로도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보자… 케드론,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할 테냐? 먼저 영지로 돌아갈 테냐? 아니면 수도에 있을 테냐?”
“내년에 졸업식은 해야 하니 수도에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곧장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아버님.”
“그렇지. 내 동생인 오스왈드가 맡아 주고 있긴 하지만 본래 영지는 케드론 네가 지켜야 하는 법이니 말이야. 그러면 딱 내년에 네가 돌아올 때, 이놈을 재상으로 임명하면 되겠군. 좋아, 그러면 그동안 혹시… 우리 아들용으로 저 마갑주라는 것을 한 벌 부탁할 수 있겠나?”
“비용만 지불하신다면 봄까지 만들어 보이죠. 헤어지기 전에 그러면 수치랑 재야 할 게 많겠군요.”
재상 임명의 일정이 구체화되고, 베오날드는 그동안 할 일을 임명받으면서 드디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됨을 느꼈다.
대귀족인 발데리안 가문의 재상. 10대 후반의 나이에 임명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자리였고, 아마 반발도 많을 것이지만 그는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상 한 번 해 본 것을 넘어서 대륙 단위를 손에 쥐고 놀았던 베오날드였다. 거기다 발데리안 가문의 신뢰를 얻고 그동안 수족처럼 움직여 줄 사람들까지 주변에 갖추었으니 그 자리에 올라갈 준비는 이미 다 끝난 셈이었다.
며칠 뒤, 회군을 통해서 발데리안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논공행상이 곧장 이루어졌다.
당연히 최고의 공로자는 하이디와 베오날드로 ‘마갑주’라는 새로운 마도구를 통해서 홀로 수많은 기사의 수급과 백장미 기사단을 절멸시킨 점이 공으로 인정된 것이었다.
하이디는 일단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가 되어서 작은 영지를 받았고, 베오날드는 재상 바로 이전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 영주 대리를 맡고 있는 오스왈드 아래의 관료 자리를 받았다.
‘음, 반대가 나올 줄 알았는데… 역시 없군. 애써 명분도 준비했는데 다행이군.’
겉보기엔 10대 후반의 아이가 벼락출세를 한 것과 같으니, 발데리안 가문 휘하의 귀족들은 만만한 이가 앉으면 자신들이 다른 수작을 부리기 편했기에 반대는 일절 없었다.
그리고 명분으로는 ‘마갑주’의 생산과 양산 연구를 위해서 직접 관리하기 위한다는 것까지 준비했지만 기우였던 것 같다.
“결국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되었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가능하면 수도에 자리 잡고 싶었는데… 뭐, 여기도 썩 나쁘진 않다. 게다가 발데리안 영지 바로 옆에 하이디의 영지도 생겼고, 나름 최적의 입지이지. 좋아, 그러면 다들 쉬면서 들어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 주겠다.”
베오날드는 모두를 모아서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 둔 것처럼 세인, 셀리나, 하이디, 베시아에게 발데리안 영지 개발 계획에 대한 청사진을 차분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베오날드가 발데리안 영지에서 일해서 좋은 점이라면 역시 500년 전에도 한 번 직접 개발해 본 곳이라서 지형과 각종 묻혀 있는 자원, 지맥에 대해서 매우 훤하다는 것이었다.
“발데리안 영지는 상당히 좋은 땅이지. 산이 좀 많은 게 단점이지만 그래도 철광석도 있고, 동쪽으로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서 자원도 풍부해. 하지만 난세의 혼란과 몬스터 때문에 서쪽의 개발이 불가능한 상태였지.”
500년 전, 발데리안 가문은 노이멀 가문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그가 쓸 영지는 베오날드가 대륙에서 고르고 골라 좋은 터로 잡아 주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산과 강, 서쪽으로 바다까지 끼고 있는 최적의 위치로 발데리안 가문의 충성심이 후대까지 이어질 거라 확신한 베오날드가 고심하고 철저히 조사를 한 거였다.
‘지금 지도 보니까 정말로 이 좋은 땅을 활용 못한다는 게 느껴질 정도군.’
그런 곳을 줬는데, 지금 지도를 받아 와 보니 생각 이상으로 이곳을 활용 못하고 있는 것에 베오날드는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나 반대로 지금 다시 살아난 그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아서 행복한 고민이기도 했다.
“아무튼 번영을 위해 여러 일을 다 같이 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역시 ‘길’의 정비지. 길이야말로 국가의 혈관이니까. 그래서 우선 겨울 동안 해야 할 일은 석재를 구하는 거다. 도로를 만들어야 하니 가능한 한 많이 말이지.”
한때 황제를 대신해서 통일 제국을 다스렸던 그의 경험과 지식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정책이었다.
물류의 이동이 수월해지고 안전해지면 안전해질수록 국가 경영은 수월해지며, 군사 이동도 빨라져서 손을 보기도 쉬워진다.
그렇기에 ‘길’과 ‘도로’의 정비는 그 어떤 시대에서도 개발을 하려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수도로 향하는 길을 정비하는 것과 서쪽의 바다로 향하는 길 2개를 뚫는 것인데… 이 첫 일을 하려면 진지 공사 명목으로 군대를 쓴다거나, 아니면 석재 채취를 우선적으로 해야겠군.”
“저기… 베오날드 님, 처음부터 석재로 길을 내실 건가요? 그럼 인건비를 줄인다고 쳐도 비용이 엄청나게 깨질 텐데요. 이건 견적이… 어우~”
건설과 막노동 일을 배운 덕에 어느 정도의 공사비가 나올 건지 예감한 베시아가 손을 들고 베오날드에게 건의했다.
분명 마땅히 좋은 의견인 것은 맞고, 발데리안 영지를 번영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언제나 이상엔 현실의 제약이 따르게 된다. 발데리안 가문이 싫어서 이때까지 길을 낸다는 방안을 쓰지 않은 게 아닐 것이다.
“음~ 좋은 질문이다. 확실히 아무리 좋은 계획도 현실성이 없으면 소용없겠지. 그리고 내가 오스왈드 님이나 백작님에게 건의한다고 해도 이런 대규모 사업을 벌이면 들어갈 자금의 양이 무섭다는 걸 알 테고~”
“그렇죠?”
“그리고 영지 재정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지.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짜내는 게 결국 재상의 일이다.”
숫자와 싸우는 건 이미 해 본 일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권력을 잡아서 무한정으로 빼돌릴 수 있는 황실의 재정이더라도 결국 한정된 숫자인 만큼 빼돌리는 양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베오날드는 머리의 혈관이 죽어 나가도록 피 터지게 머리를 굴렸으니 말이다.
“아무튼 또 바쁜 나날들이 될 거고, 이런 청사진이라는 것만 기억해 놔라. 실제적으로 겨울엔 뭔가 크게 움직이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럼 겨울엔 뭘 하시려고 합니까? 마갑주 제작에만 몰두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그래야겠지만, 더 중요한 게 있지.”
“중요한 거라면?”
“이제 우리는 완벽히 발데리안 가문의 식구가 되었다. 하이디는 작지만 영지가 생겼고, 나는 재상 후계자로 일하게 되었지. 그런 것을 발데리안 가문 휘하의 귀족들 중 누군가는 반기겠지만, 또 누군가는 반기지 않을 거다. 그것부터 처리해야겠지.”
이번 겨울, 도로 공사를 하기 전에 미리 해 둬야 할 것은 이른바 서열의 정리. 그리고 휘하 귀족 가문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자신들의 일을 방해할 자들은 미리 처단하고, 그러지 않을 자들은 굴복을 시키든 협조를 얻든 해야 하는 이른바 ‘정리 사업’을 겨울 안에 끝내고자 하는 베오날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