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득과 실의 격차가 너무나 큰 상황. 쉽게 결단이 내려지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결국 이렇게 되면 차근차근 간을 보면서 정한다는 방법밖에 남지 않는데, 이 회담은 꽤나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라서 다행이었다.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리지 않은 전쟁이고, 합의는 그저 휴전을 위해 정해진 만큼 서로가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치열한 대화가 오고가는 가운데 결국 시간이 많이 흐르자 이들은 해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저 잡종 년은 능글맞기 짝이 없군. 안 그러나? 발데리안 백작.”
“그건 동감이군요. 답답해서 미칠 뻔했습니다. 그냥 검으로 해결하고 싶은데 말이죠.”
“자자, 두 분, 진정해 주십시오. 기껏 전쟁을 끝내 놓고 또다시 싸울 생각이십니까?”
결국 오늘 회담은 종료됐고, 크멜 공작, 발데리안 백작, 이오날 경 셋은 텐트를 나오면서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노이멀 총리에 대한 뒷담화를 하며 본의 아니게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도 아무리 내부에서 파벌을 갈라서 싸우던 이들도 외적의 침입엔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 격이다.
“아무튼 오래간만에 한잔 어떤가? 할 이야기도 있고. 아, 물론 나는 못 마시지만. 의사가… 이거 낫기 전까진 마시지 말라고 했거든. 대신 맛있는 건 대접해 주겠네.”
“그냥 여기서 하지요. 길게 이야기할 것도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 ‘친구’, 못 넘겨줍니다.”
“…허, 내 속셈을 꿰뚫어 본 건가?”
“뻔한 거 아닙니까? 애초에 서로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눌 정도로 좋은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뻔히 독을 고친 그 ‘친구’를 내놓으라는 거겠죠.”
같은 무가(武家)이지만 파벌이 다르고, 성격도 다른 두 가문이었기에 평소에 교류하는 일도 잘 없었다.
제국과 손을 잡고 그 존립을 건 크멜 가문,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굴복한 발데리안 가문인지라 서로 사이가 좋을 리 없으니 속셈이 너무 뻔한 것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친구’란 바로 베오날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좋은 무기란 그것에 어울리는 사람 손에 있어야 제대로 쓰이는 법일세.”
“나는 못 쓸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지금 그 친구의 지위는 뭔가? 나는 우리 가문의 재상 자리를 줄 생각인데 말이지.”
‘재상’. 군주를 대신해서 국정을 통할하는 책임자의 자리.
이 경우 크멜 공작을 대신해서 크멜 가문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히겠다는 것인데, 듣자마자 충격에 빠지며 어처구니없어하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과한 이야기였다.
“10대에 재상? 하! 허풍도 심하시군요. 밑의 다른 가신들과 귀족들이 말을 듣기나 하겠습니까?”
“로이드 녀석과 붙여 줘서 차세대로 키운다고 양념 치면 충분하지 않겠나? 로이드 녀석이 지금 후계자들 중에 가장 강한 기사이지만, 내정을 하는 것엔 약하니 딱 좋은 조합일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 좋은 물건을 저희가 넘길 것 같습니까?”
“아니, 이건 그저 이야기를 해 두는 거고, 이 명분으로 이다음에 그 친구가 선택할 메리트를 주는 거지.”
크멜 공작도 사실 발데리안 백작이 베오날드를 넘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좋은 물건인데 그걸 그냥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이 시대, 인재란 천금의 보물보다 더 귀중한 존재였고, 심지어 젊은 데다 다양한 분야에서 유능하다? 지고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결국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크멜 공작은 그저 명분을 위해 한번 이야기를 해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그 친구가 떠난다고 한다면 곱게 보내 주게나. 그럼 이만~ 아쉽지만 이오날 경과 한잔해야겠구먼. 허허허.”
그렇게 호탕하게 웃으면서 떠나는 크멜 공작. 발데리안 백작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자신의 뒤에 병사로 위장하고 있는 베오날드에게 말했다.
“저, 저 양반은 평생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서 그런가, 도저히 사람 말을 듣질 않아요! 에휴! 그냥 꼴사납게 독에 당해서 죽게 놔두질 그랬나? 참 나!”
“하하, 원래 명가의 높으신 분들이 다 그렇죠.”
500년, 아니 이런 건 천 년이 지나고 만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일이라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실제로 과거 노이멀 가문도 그랬고, 그와 경쟁을 하던 대륙의 명문가들도 저랬으니 말이다.
이런 건 결국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야 설명이 가능한 것이리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으음~ 솔직히 말해서 재상 자리는 좀 당기긴 하네요.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게 많아지니까요. 하하. 보자~ 마갑주 연구도 아예 새로 팀을 짤 수 있고, 할데온 유적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고~ 그리고…….”
“그걸 또 솔직하게 말하나? 참 나!”
“그야 전 공식적으로 아직 발데리안 가문의 지위라든가 작위가 없으니까요. 하하하.”
“아! 거참! 알았네! 알았어! 내가 지금 여기서 약조를 해 줌세! 보자. 크멜 가문에서 재상을 꺼냈지? 그럼 나도 재상을 꺼내지! 가서 해 봐! 일단 오스왈드 밑에서 일하는 형태로 시작하고, 케드론의 친우라고 하면 나도 가능해! 작위도 있어야 하니까 영지도 주겠네! 남작 정도는 되어야 재상의 자리에 어울리지!”
크멜 공작이 내지른 10대 후반에 재상이라는 파격적인 인사에 발끈한 발데리안 백작은 자신도 화끈하게 베오날드에게 재상의 자리를 주겠다고 내질러 버렸다.
같은 검술 명문가라서 경쟁 심리도 있던 터라 조금만 자극하니 그냥 내질러 버리는 성질머리가 케르웰의 후손답다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쉽네, 쉬워~ 유전이라는 건 꽤 그럴싸한 이론이군. 케르웰이랑 성격 똑같은 게 말이지. 하하핫. 크멜 가문엔 감사해야겠군. 거기서 베팅 금액을 크게 질러 줘서 단숨에 벼락출세를 하게 된 셈이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나?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나? 여신께 맹세코! 자네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말 거야! 진짜로!”
“하하,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런데 긴히 드릴 말씀이 하나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뭔데? 말해 보게! 베오날드 재상!”
“노이멀 총리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하는 건 좋은데… 자네 몸이 위험해선 안 되네. 알았나? 베오날드 재상.”
끄덕.
고개를 끄덕인 베오날드는 예를 갖추면서 대답을 했고, 우선은 발데리안 가문 측 텐트로 와서 갑옷을 벗고 나설 준비를 했다.
편지나 전갈을 보내서 반응을 보며 뜸을 들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런 건 베오날드의 성미에 영 맞지 않았다.
어차피 항복 회담을 위해 모인 자리여서 납치나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고, 발데리안 가문에도 이야기해 놨으니 조심스럽게 직접 대화를 하며 그녀의 반응을 보는 게 확실하리라.
“옛말에도 있지. 드래곤을 잡으려면… 용의 둥지로 가야 하는 법이라고 말이야.”
각오를 다진 베오날드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가르칸 공화국 진영의 텐트로 향했다.
“쿠룩! 멈춰라! 누구냐?”
다가가자 텐트 앞에서 경비를 서던 수인과 오크 병사들이 창을 겨누면서 경계를 했지만, 베오날드는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저기, 총리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만약 안 만나 주신다면 ‘서풍에 부는 별’이라는 시로 시집을 내겠다고 한마디만 전해 주십시오.”
“쿠룩? 그게 뭐냐?”
“귀중한 암호이니 그대로 전하면 아실 겁니다.”
베오날드의 말을 들은 오크 병사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암호라는 말에 일단은 텐트로 들어가서 노이멀 총리에게 향했다.
현재 그녀는 일전에 크멜 공작에게서 입은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았는지 피가 배어 나와 젖은 붕대를 시종인 엘프들이 갈아 주고 있었는데, 몸에는 수많은 칼자국, 화상 자국으로 된 흉터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냐?”
“쿠룩! 총리님을 뵙고자 하는…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누구지?”
“그게… 쿠룩! 모르겠습니다. 다만, 쿠룩! 만나 주지 않는다면 무슨… ‘서풍에 부는 별’이라는 시로… 쿠룩! 시집을 내겠다고 합니다. 쿠룩!”
“훗,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당장 썩 꺼지라고 해라. 어디서 말 같지 않……!”
실없는 소리라면서 무시하려던 찰나, 노이멀 총리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무언가 번뜩하고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풍에 부는 별’. 그것은 자신이 어린 시절 베노피스에 있을 때 지은 시로, 어릴 적 순수한 감수성을 가득 담아서 쓴 감상문 격의 시였다.
어린 시절에 쓴 글이라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내가 남겨 놓은 흑역사나 마찬가지. 심지어 지금과는 다른 지식이나 생각, 사상일 때 쓴 것으로 온갖 유치한 표현과 허무맹랑한 세계 평화 사상이 쓰여 있었기에 그녀에게 있어 흑역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데려와.”
“예?”
“다, 당장 그놈을 데려와! 너희는 빨리 상처 봉합을 마치고 서둘러 나가라! 긴밀히 해야 할 이야기다! 이, 이이이제야! 떠올랐어. 하하핫! 워낙 일이 많아서 말이야! 하하하하하!”
노이멀 총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흑역사를 미끼로 건 놈을 만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무르고, 자신의 검을 준비한 채 기다렸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흑역사를 알고 있다는 건 베노피스와 노이멀 가문의 상황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자였기에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어린 인간이군. 하지만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은데…….’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라라 폰 노이멀 님.”
“…내 이름까지 아는 걸 보면 보통 놈은 아닌 것 같구나. 그래서, 너는 대체 누구냐? 뭘 원해서 내 흑역사를 입에 담고 나에게 다가온 거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혹시 크멜 가문의 영지에서 발견된 ‘할데온 유적’이라는 곳을 아시는지요?”
“할데온? 아니, 모른다. 그건 바뀐 지명의 이름인가? 나는 대륙 중앙에서 도망친 이후 약 400년간 가르칸 공화국에서만 살아서 말이야. 그래서, 그 유적이 뭐지?”
“그곳엔… ‘탈피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아시지요? 대연금술사, 통일 제국의 지배자이셨던 베오날드 폰 노이멀 님이 만든 실험작들이 묻혀 있는 곳 말입니다.”
우선 그녀를 떠보기 위해서 베오날드가 내민 카드는 ‘할데온 유적’. ‘탈피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지금 밝혀져 있으면서 과거에 베오날드 자신이 만든 곳이었기에 그녀는 금방 알아차리고 반응했다.
“아! 거기! 그래! 알고 있어! 아버님이 황제가 부탁해서 만들었던 이상한 물건들을 그곳으로 옮기라고 했던 거 기억이 난다. 거기가… 인간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다고?”
“예, 맞습니다. 그것 때문에 크멜 가문과 제국 측이 서로 발굴하려고 하다가 분쟁이 생겨서 결국 교단에 의해 성지(聖地)화하려…….”
“그 교단 녀석들이 감히! 아버님의 유산을 노리고 역사 속에서 지운 놈들이 이젠 그 유산까지 넘봐?”
‘…교단을 적대시한다는 건 일단은 좋은 신호인가? 아니지, 역으로 안 좋은 신호일 수도 있군. 내가 여신에 의해서 살아났으니 말이야.’
격하게 분노하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라라 폰 노이멀의 모습에 베오날드는 아직 그녀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하면서 계속 떡밥을 던지기로 했다.
일단 할데온 유적에 대한 떡밥으로 이야기를 텄으니 계속 대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교단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신가 보군요.”
“당연하지! 감히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를 만들었던 아버님의 기록을 지운 놈들이니까! 아버님이 이룬 태평성대를 신나게 비방하더니 돌아가시고 난 뒤 대혼란의 시대가 감당 안 될 정도로 커져 버리니까! 알테리오 그 개자식과 손잡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 같으니 기록을 모두 지웠지! 역사가 흐르고, 사람들이 죽고 바뀐다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다니!”
“아아… 그렇군요.”
베오날드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분개하는 딸을 보며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을 했다.
알테리오가 새로운 황제, 그리고 다른 귀족들, 신관들과 손을 잡고 자신을 숙청하고 난 뒤에 새롭게 노이멀 가문의 가주로 집권했으나 결국 내부의 반발을 해결하지 못하고 내전이 일어나서 제국의 분열을 촉구시켰고, 계속 싸움과 혼란이 일어나는 국가들 사이에서 교단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이 혼돈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후세에 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역사 왜곡에 들어간 것이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아버님은 비록 제국의 국정을 마음대로 하셨지만 제국을 수십 년간 평화롭고 부유하게 번영시켰는데! 그 쓸모없는 인간들은! 그 위대하고 찬란한 업적을……!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싶다고 삭제해 버렸어! 절대! 절대 용서 못해!”
“…….”
“그래서 난 맹세했어! 그렇게 감추고 싶다면… 인간의 역사를 이 대륙에서 지워 주겠다고 말이야! 모조리! 깡그리! 그런 원숭이들이 살았다는 역사 자체를 없애 버릴 거야!”
과거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끝없이 분노하는 딸을 보며 베오날드는 입안에 쓴맛이 번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재능이 있어서 좋아했지만, 라라는 생각해 보면 유별나게 자신을 좋아했던 딸이었다.
그녀 가슴에 자리 잡은 분노와 증오는 필시 자신을 사랑했던 깊이만큼 새겨져 있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더 아픈 베오날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