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리고 3일 뒤, 크멜 공작은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물론 일어나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아직 몸 안에 노폐물이 남아 있고,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기에 갑옷을 입거나 싸우는 건 무리였지만, 그래도 멀쩡한 모습으로 군대 앞에 그 모습을 비추기만 해도 사기가 다시 솟아오르는 걸 보면 역시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덕분에 살았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제국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이제 지어 드린 약만 빼먹지 말고 잘 드시고, 온몸의 반점이 다 사라지면 완치입니다. 그때까지 술 드시지 마십시오. 그럼 저는 할 일을 다 했으니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급하게 온 터라 발데리안 가문에서 난리가 났겠군요.”
“아니, 이대로 간다고?”
“치료를 마쳤으니 가야지요. 애초에 저는 크멜 가문에 뭔가를 바라고 공작님을 살린 게 아닙니다.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치료한 거니 말이죠. 공이 있다면 절 믿은 라웰스 남작에게 돌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약 꼬박꼬박 챙겨 드십시오.”
치료를 마친 베오날드는 물러나고자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그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크멜 공작은 깜짝 놀라서 그에게 다가오며 외쳤다.
크멜 가문을 구한 거나 다름이 없는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그냥 간다니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지! 잠깐 기다려! 자네는 지금 이 크멜 가문 수장의 목숨을 살렸어! 근데 그냥 가겠다고? 이건 예의가 아닐세! 내 목숨 값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가?”
“정 보답하길 원하신다면 발데리안 가문으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허… 참~”
크멜 공작은 당황하면서 떠나는 베오날드를 바라보았지만, 베오날드 쪽은 나름 이유가 있는 빠른 도주였다.
지금까지는 쓰러진 크멜 공작을 치료한다고 다들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 거의 다 나은 데다 본격적으로 그에 대한 것을 알게 되면 이대로 가만히 둘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휴우~ 다행히 날 알아보는 놈은 없군. 할데온 유적에서 얼굴을 본 놈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베오날드는 이 크멜 가문으로 올 때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발데리안 가문에서 온 전령이라든가 발데리안 가문의 가신이라는 식으로 최대한 뭉뚱그리고, 가신들에겐 먼저 크멜 공작을 살리기 위한 조치들을 이리저리 지시하면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나마 깨어난 크멜 공작도 자신에 대해서 할데온 유적의 사건보다는 아들인 로이드 크멜과 싸웠던 기억이 우선이었기에 지적당하지 않았지만, 알려지게 되면 상당히 피곤할 테니 베오날드는 적당히 물러서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뭐, 알고 나면 상당히 분해할 거고, 그리고 목숨을 구해 준 의리가 있기에 할데온 유적의 문제가 해소될 수 있겠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지.’
목숨에 위협이 있을 가능성은 적지만 아무튼 지금 우선시해야 할 일은 발데리안군으로 돌아가서 항복 회담을 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상대는 크멜 공작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다렸을 테니, 시간적으론 지금 출발하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발데리안군의 진영으로 돌아온 베오날드는 예상했지만 당연히 오자마자 발데리안 백작의 병사들에게 끌려가서 백작의 앞에 무릎 꿇는 처지가 되었다.
발데리안군은 이미 전장의 제압은 끝났지만 아직 엄연히 항복 문서에 사인을 완료한 것이 아니었기에 전쟁 중인 상황. 전시 탈영은 어느 시대건 간에 중대한 범죄였다.
“…자, 그럼 어디 변명을 해 보겠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크멜 공작을 살리고 왔습니다.”
“뭐?”
“가르칸 공화국의 독에 당해서 쓰러진 크멜 공작을 살리고 돌아왔습니다.”
“뭐, 뭐무머머? 그놈을 왜 살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겐가?”
“지금 크멜 공작이 죽으면 제국에 큰 혼란이 옵니다. 안 그래도 이번 전쟁에서 바니로 백작가를 패배시켰지만 남쪽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르칸 공화국의 간섭이 커질 게 분명한데, 거기서 크멜 공작이 죽어서 크멜 가문이 약화된다? 볼레아 왕국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방파제가 흔들리면 즉시 제국의 불안 요소가 되며 자연히 반대쪽인 발데리안 가문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베오날드의 말은 구구절절 옳음으로 가득했기에 발데리안 백작은 도저히 뭐라고 할 건더기가 없었다.
이론으론 도저히 안 되자, 결국 도리의 문제로 넘어가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그럼 이야기를 하고 갔어야지 않나?”
“워낙 시급한 사안이라서 그랬습니다. 설명이 길어지면… 그 ‘독’을 치료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 버렸을 겁니다. 게다가… 크멜 공작의 목숨을 구한 빚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겠지요.”
“하여간… 말은 더럽게 잘하는군. 에휴~ 뭐, 됐다. 풀어 줘라. 결국 돌아오기도 했고, 크멜 그놈에게 빚을 지운 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일이니……. 다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백작님.”
결국 베오날드에 대한 처분이나 그런 이야기 없이 이번 무단 탈영은 그냥 넘어가게 된다.
어차피 그러지 않았어도 대충 적당한 벌이나 주고 말았을 일이지만 명분도 명분이고, 그 크멜 공작에게 빚을 지운 것은 크나큰 실리이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그였다.
“그러면 이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군. 알다시피 자네가 여기 없는 동안, 각 영지들의 항복 절차와 포로 및 시신에 대한 거래도 다 정리한 상태일세. 남은 건 이제 바니로 백작과 가르칸 공화국 군과 항복 회담을 진행하는 것뿐이지.”
“저도 거기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아, 물론 직접 회의하는 쪽이 아니라 그저 구경만 하는 입장으로 말입니다. 그 비겁하고 잘난 ‘노이멀’ 총리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데 대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좀 보려고 말이죠.”
“아아… 그렇군. 하하핫! 자기가 엿 먹인 상대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지! 게다가 비겁한 술수까지 썼는데 실패했으니 더더욱! 표정이 안 좋겠군. 그건 나도 보고 싶어지는군. 알았네! 기꺼이 자리에 끼워 넣어 주지.”
“아뇨. 뒤에서 병사 모습으로 구경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크멜 공작의 복귀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제 일말의 희망도 없어졌기에 순순히 항복 절차를 밟아 가는 가르칸 공화국 군이었다.
하나 항복이라곤 하지만 형태는 ‘휴전 협정’에 더 가까운 것으로, 무장 해제도 하지 않고 바니로 백작가가 아닌 성 앞에서 텐트를 치고 회담을 진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본래 항복한 측이 겪어야 할 굴욕이 전혀 없는 셈이었다.
새벽쯤 항복 협정에 사인하기 위해 오라는 크멜 공작의 서신을 받은 발데리안군 측은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출발, 이동을 서둘러서 오후쯤엔 바니로 백작가의 성 앞 텐트에 도착하게 된다.
“도착했군. 자네는 그대로 병사인 척 따르게나.”
“예. 위장을 철저히 했습니다. 크멜 가문 사람들이 알아보면 곤란하니 말이죠.”
바로 어제 돌아갔던 놈이 오늘 다시 회담장에 나타난 것을 보면 분명 혼란스러워질 테니 잘 감추기로 한 베오날드였다.
아무튼 발데리안 가문 측이 도착하자 항복 협정 회담은 즉시 시작되었다.
텐트 안에는 각자 최소한의 호위병만 두고 노이멀 총리, 크멜 공작, 발데리안 백작, 제국 수도군 대장인 이오날 경 이렇게 4명이 모여 있었다.
“그럼 우선 각 측이 준비해 온 협정서를 검토하겠습니다.”
그들은 각자 작성해 온 협정서 초안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항복 협정의 선을 조절하기 시작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 입장 차이가 생기는 부분에서 언성을 높여 가며 언쟁을 벌였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가르칸 공화국 군대가 바니로 백작가에 앞으로도 주둔? 엄연히 외국 군대가 제국에 군대를 남긴다니 어불성설이지. 썩 나가도록 하시오!”
“하지만 지금 바니로 백작가 지휘부가 불안정한 상황이며, 심지어 저희는 전략상의 이유로 태워 버린 곡물에 대해서 보상을 해 줘야 하기 때문에 그 절차와 과정을 위해선 가르칸 공화국 군대의 주둔은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운송 과정의 문제, 그리고 배분 및 물량 확인의 문제 등등… 보장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배상금 책정, 제정신인가요?”
“그럼 기사에게 독을 쓴 건 제정신이고?”
“아쉽게도 전 기사가 아니고, 무인의 긍지 같은 것도 없는 몸인지라~ 호호홋.”
치열한 언쟁 속에서 협정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엄포와 고성이 오갔다.
아마 몇 시간 동안은 계속 이렇게 싸울 것이고, 심하면 여기서 며칠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동안 베오날드는 드디어 모습을 보게 된 노이멀 총리를 확인하고 충격에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군. 인상이… 아주 약하게 남아 있어서 겨우겨우 알아봤어. 설마 저 아이가… 노이멀 총리였을 줄이야.’
‘라라는 세상이 평화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지금 저기에 앉아 있는 고혹적이고 노련해 보이는 노이멀 총리의 인상으론 상상할 수 없는 딸의 얼굴을 떠올리는 베오날드였다.
라라 폰 노이멀. 무려 하이엘프와의 사이에서 나온 딸아이로, 하나를 알면 열을 알 정도로 총명해서 베오날드가 무척이나 아꼈던 아이였다.
하나 결국 하프엘프라서 가문의 후계자로는 무리였고, 장래에 자신이 죽으면 엘프들의 숲이나 도시로 돌아가서 동족을 위해 일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엘프 기준에선 수명이 짧은 베오날드와 조금이라도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그가 죽을 때까진 맡아서 키우기로 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군.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라라가 저런 모습이 되다니…….’
가장 상냥하고 마음이 따뜻해서 장래에 가혹하거나 힘든 결정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던 아이가 마치 자신처럼 큰 모습을 보니 충격이 배가되어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500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녀를 이렇게까지 변화시킨 건지 상상을 해 보려고 하지만,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곤란하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 아무튼… 노이멀의 후예는 맞긴 하군.’
드디어 고대하던 노이멀 총리의 정체를 알아냈지만 베오날드의 혼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끼던 순수한 딸아이가 누가 봐도 산전수전 다 겪은 지배자의 모습이 된 것만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 딸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뚜렷한 방법이 나오지 않아 더욱 머릿속이 복잡한 베오날드였다.
‘애초에 지금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라라는 있지, 커서 아빠랑 결혼할래~’
‘…아빠는 라라만큼 오래 못 사는데?’
‘그럼 지금 할래.’
‘하하, 무리란다.’
“기사도 같은 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 이상한 명예욕 관념에 대한 보상은 집어치우시죠. 게다가 ‘독’에 당했다곤 해도 죽진 않았잖습니까? 후훗, 대체 어디에 있는 누가 그것을 했는지 모르지만…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내 정체를 밝힌다고 해서 아군이 되어 줄지도 의문이군. 아니, 증명하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지만…….’
지금 눈앞의 라라, 아니 노이멀 총리의 눈빛 속에 증오와 분노가 가득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베오날드는 눈치챌 수 있었다.
500년간 결코 좋은 일이 있지 않았다는 정도만 예측이 가능한 가운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지 안 좋을지 갈등이 점점 커져 갔다.
‘일단 그녀도 의심할 거고… 어찌어찌 증명한다고 해도 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큰 위기일 건데… 하나 반대로 만약, 만약 나의 편이라면 앞으로 일하기가 엄청 편해질 텐데…….’
그녀가 현재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라는 점을 비롯해서 자신이 베오날드라는 것을 알고 믿고 일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만약 아군이 된다면 정말로 든든할 것이고, 굳이 이런 곳에서 가신 노릇 할 것이 아니라 아예 가르칸 공화국으로 건너가 같이 대륙 제패를 해 버리는 것도 썩 나쁘지 않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좋게 상상했을 때의 일이다.
‘하나… 날 원망한다면?’
그녀에겐 분명 좋은 아빠였다.
하지만 500년 뒤까지 그 마음이 이어지리라곤 보증할 수 없다.
그녀를 변화시킨 인생의 굴곡. 그것을 만드는 데 분명 자신의 죽음과 그 존재가 연관되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증오와 원망을 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적을 두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가? 후우우~’
투구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베오날드는 라라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주판을 튕기며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일지 계속 고민했다.